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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줄리언 바지니의 에고트릭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7. 8. 7.

17.8.7

최근에 줄리언 바지니의 에고트릭을 읽었다. 줄리언 바지니는 자아와 의식의 문제를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로 그는 자아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 즉 철학적 심리학적 신경과학적 사회적 미래과학적 이며 종교적인 이야기들을 모아서 들려준다. 책은 무척 흥미로웠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이나 자아에 대한 몇가지 정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자아와 의식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아나 의식이라는 것은 생명현상의 일부라는 것이다. 생명이란 물질이 아니라 현상이며 따라서 마치 바다위에 생긴 파도나 대기 중에 생긴 태풍과 같다. 우리가 일기예보를 볼 때면 태풍과 그 궤도가 종종 지도위에 그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태풍이 저기에 있다고 생각하며 태풍을 마치 의자나 탁자처럼 확실한 경계를 가진 물건처럼 취급한다. 

 

태풍이 의자나 탁자와 같다는 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이야기다. 태풍이란 바다위의 파도가 바닷물에 일어난 현상인 것처럼 대기의 흐름이 만들어 낸 현상이며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대기와 구분할 수 없다. 우리가 만약 어딘가에 선을 그어서 이 안에는 태풍이라고 말하기로 한다면 그 선은 오직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될 것이다. 파도는 어떤가. 더 그렇다. 파도의 어디에 선을 그어서 여기에 파도가 있고 이 바깥은 파도가 없다고 할 것인가?

 

생명이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란 물질이 시공에 걸쳐서 만들어 낸 복잡한 형태의 태풍이며 파도라는 뜻이다. 생명은 외부와 물질을 교환한다. 그래서 새로운 물과 세포가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 계속 된다. 우리의 피부는 계속 죽어서 때의 형태로 배출된다. 우리 몸에서 배출되는 대변도 음식물을 소화하고 남은 찌꺼기인 동시에 몸안의 세포가 죽어서 나오는 세포의 시체를 배출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를 이야기할 때 손발이나 심장같은 것을 교체해도 나는 나라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물질이 아니다. 애초에 생명이란 물질 세계 속의 파동이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세상의 것은 모두가 물질성과 파동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원자 수준에서 분명해지는 양자역학적 효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물질 그 자체와 물질의 배치 혹은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자를 보자. 의자는 물질이라는 말은 너무나 옳은 것같다. 하지만 의자란 또한 다양한 물질들이 여러경로를 통해서 조립되어 특정한 형태를 이룬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물질이 아니라 사건이듯이 의자도 하나의 사건이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여러 원자들은 목재나 가죽의 형태가 되어 그 의자의 일부가 되었고 끊임없이 그 물질들은 조금씩이지만 그 의자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때로는 곰팡이나 녹같은 형태로 외부의 원자가 그 의자의 일부로 들어오는 일도 있다. 그러다가 그 의자는 부서진다. 그러면 그 의자에 머물던 물질들은 더 빠른 형태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의자도 태풍이나 파도와 같다. 다만 우리는 대개 인간의 시간이라는 기준에 따라 어떤 것을 순수하게 물질로 어떤 것을 순수하게 파동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칼 한자루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길다. 그것을 인간이 보고 있어서는 칼이 마치 파도처럼 생겼다 흩어지는 것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적인 시간에서 보면 철들이 모여서 칼이 되었다가 흩어지는것은 아주 순간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인간적인 기준 또는 물질적인 기준이란 것이 전혀 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리컵을 이루는 유리가 사실은 결정이 아니며 액체처럼 흐를 수 있는 것이라서 마치 아주 천천히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 물컵이란 물체가 있다라는 관점이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매사가 이런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면 뭔가가 잊혀진다. 그리고 그런 잊혀짐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뭔가가 인간적인 시간 규모에 따라 변하가며 그것을 인간이 매우 자세하게 관찰할 때 그럴 것이다. 바로 인간 그 자체에서 그 문제가 가장 심각해 지는 것이다. 

 

세상 만사의 파동적 물질적 양면성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이 그저 여기에 있다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영혼과 같은 본질을 찾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뭔가를 순수하게 물질이라고 해놓고, 나는 여기에 있다라는 식으로 선언하고 나서 보니 뭔가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비과학적이고 비물질적인 또다른 존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도 범하고 있는 심신 이원론의 오류다. 

 

하지만 우리는 신비한 존재가 필요없다. 모짜르트의 음악은 특정한 악기나 라디오같은 특정한 기계에서 흘러나오고 그것은 공기와 같은 매체를 통해서 소리의 행태로 우리에게 들려오지만 물론 모짜르트 음악을 모짜르트 음악이게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특정한 질서다. 그것은 악보가 음악 그 자체가 아니듯 물질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때로 우리는 이 몸 자체일 수 없다고 느낀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초과학적이고 신비한 뭔가를 도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몸이나 물질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은 대개 기존의 관계가 파괴되거나 변한 물질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시체 말이다. 우리는 분명 시체가 아니다. 그리고 시체와 우리와의 차이는 어떤 신비한 영혼이라는 또다른 존재가 아니라 물질 사이에 존재했던 특정한 질서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생명현상의 일부인 의식을 생각하면 보다 더 분명해 진다. 생명은 하나의 현상이며 생명 현상의 일부인 우리의 의식도 따라서 그저 하나의 현상이다. 나의 의식은 나라는 파도의 일부다. 바다에 존재하는 파도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 파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파도가 존재하는 매체인 바닷물 속의 물분자들이 특정한 형태로 서로를 당기기 때문이다. 즉 외부에서의 에너지가 특정한 형태로 서로 상호작용하는 물분자의 집합인 물이라는 매체에 가해졌을 때 파도라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나의 의식은 파도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게되면 그 파도는 생겨난다. 다만 그 매체의 핵심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우리 몸, 그 중에서도 우리의 뇌는 아주 복잡한 상호작용을 한다. 인간은 엄청나게 긴 기억을 하고 있으며 추상화의 능력때문에 엄청난 정보를 몸에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30-40년전의 일도 종종 기억해 낸다. 스스로를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지구라는 행성위의 주민으로 생각할 만큼 우리는 여러가지 지식들을 배우고 기억한다. 나는 지금 컴퓨터 화면앞에서 의자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단순히 그것뿐인 존재가 아니다. 나는 부모고 배우자이며 누군가의 자식이다. 태어나서 자라나고 지금의 내가 될 때까지 여러가지 경험을 했고 그 경험중에서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특히 더 잘 기억되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물리학을 전공했다던가 누군가와 결혼했다는 사건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건 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굉장한 일이다. 누군가가 40년전에 생겼던 파도가 아직도 바다위를 달리고 있다던가 안드로메다 성운의 영향이 만든 파도를 발견했다고 하면 굉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 몸안에서는 그런 일이 예사로 일어난다. 

 

나의 의식은 이렇게 복잡한 뇌를 포함하는 우리 몸을 중심으로 하는 물질계에서 존재하는 특정한 질서이며 우리의 몸이 기억하고 느끼는 시공간의 속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내는 하나의 패턴이고 가정이다. 나는 매순간 새로이 발견되고 창조된다. 어릴 적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라고 줄리언 바지니는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답한다. 이 말은 물론 맞지만 나는 파도 같은 보다 분명한 예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저쪽의 파도가 이쪽까지 왔다. 저 파도는 이 파도와 같은 것일까? 우리가 이 사람과 그때의 저 사람이 같은 사람이냐고 묻는 질문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든 의식이든 그것을 시공간 속의 고정된 물질처럼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기전의 사람과 죽고 나서 남는 시체가 같은 사람이냐고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인 것이다. 

 

줄리언 바지니는 또한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하나의 환상이냐고 묻는다. 우리의 의식이나 자아는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것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답한다. 그는 올바르게도 개념적 모호성을 인정하는 것이 핵심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지적하는데 이것을 나는 내식대로 인식에 있어서의 모호성이라는 문제로 설명해 보고 싶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르게 세상을 인식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 세상 그자체보다 훨씬 더 간단하거나 복잡하다. 아래에 보여주는 동영상은 원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동영상을 보면 우리는 몇개의 점들이 직선으로 움직이는 모습에서 하나의 원이라는 존재를 쉽게 느끼게 된다. 화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두개의 관점중 어떤 관점이 진짜 옳은가라는 것은 핵심적 질문이 아니다. 이 예는 우리가 어떤 질서속에서 그 질서를 하나로 설명할 어떤 존재를 쉽게 만들어 내고 그것을 실체로 느끼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로 현실은 약간만 다른데도 우리의 인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줄리언 바지니는 사진에서 10%의 점만 바꿔도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는 예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예로 가보자.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참으로 영어를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좋지 않았다. 대학때 영국으로 교환학생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영어 문법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영어라디오뉴스를 대충 이해하는 유럽학생을 보고서 어떻게 저런 말들을 다 듣고 이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 귀에는 왜 저런 쉬운 문장이 안들리는 건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 인식문제를 조금만 공부해 보면 오히려 말을 알아 듣는 능력이라는 것이 있는 쪽이 매우 신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아주 많은 잡음들과 섞여 있는 목소리가 매우 빨리 변하는 대기의 진동을 만들어 내는 상황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엄청나게 빠른 속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정도 뭘 들을까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이 분야에서는 칵테일파티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칵테일 파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고 피아노 소리에 집중할 수도 있다. 그에 따라 우리가 느끼게 되는 소리가 달라진다. 즉 우리는 그때 그때 특정한 잡음들을 배제하기 때문에  사람의 목소리가 깨끗하게 잘 들리는 것이다. 결국 목소리 인식이란 일종의 고의로 만들어 낸 착각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의 인식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맘대로 그 안에서 시그널을 찾고 나머지를 소음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실수도 하게 되는데 그중의 어떤 것은 우리가 체험하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도 있다. 입모양때문에 소리가 다르게 들리게 되는 사건 같은 것이 그렇다. 소리가 같은데도 화면에 다른 입모양을 보여주면 우리는 다른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예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던지게 되는 핵심적 질문은 우리가 자아라고 느끼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기억과 사회적 평가와 그때 그때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는 감각적 신호속에서 하나의 움직이는 원을 찾아 낸다. 우리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기억하고 추측하며 우리의 경험에서 다시 그것을 확인하고 바꿔나간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자기 일관성있는 그림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환상인가 아니면 실체인가? 공평하게 말하면 세상은 그냥 그대로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를 정확하게 나누려고 하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 우리는 대개 아무 이유도 없이 뭔가를 보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뭔가를 봤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모두 바위나 의자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시 우리를 원초적인 문제로 돌려놓는다.

 

이제 나는 두가지 문제만 간단히 언급하고 이 글을 마칠까 싶다. 첫째는 자아나 의식의 문제는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같은 곳에서 말하는 나없음 즉 무아의 상태가 어떤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이 두 문제다 줄리언바지니의 책에서 논해지고 있거나 언급된 것이지만 어느 정도 내가 불분명하게 느낀 것이기도 하다. 그 책은 매우 뛰어나고 재미있는 책이지만 어쩔 수 없이 모호하거나 반복되는 부분도 있다. 

 

자아나 의식의 문제는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일까? 이 질문에는 함정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뭔가가 과학의 범주를 넘어선다고 말하면 우리는 쉽게 사이비종교로 빠지고 있다는 의혹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쉽게 과학에는 한계가 있다면서 창조론이나 점성술로 빠지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과학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특히 현실속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형태의 과학에는 더욱 그렇다. 그건 거대한 해머로도 섬세한 조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과 같다. 이론적으로 과학이 할 수있는 것이라고 해도 현실속의 과학이 접근해서 결과가 잘 나오지 않는 분야는 너무 많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학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다. 사실 기본적으로 어떤 학문도 언어의 한계를 가진다. 학문은 토론과 정보의 누적을 위해 언어사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과학은 엄밀한 언어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과학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개념적으로 분명히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우며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자에 의해 오히려 뭔가가 파괴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예는 사랑이다. 사랑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개념을 정확히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사랑은 곧 섹스라고 정의하고 시작하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일년에 몇번 섹스를 했고 만족도가 얼마나 좋았나를 기준으로 사랑에 대한 과학적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그러다가 나중에는 도대체 이 과학논문에서 말하는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가는 잊혀지고 그래서 착각이 퍼지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문제로 해서 자아라던가 지성 혹은 민주주의 같은 개념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시작부터 문제를 겪는다. 뭔가 과학적 실험의 결과가 나와도 그것은 우리를 더 현명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어리석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뉴튼방정식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준다고 해도 사춘기의 고민에 빠진 딸옆에서 뉴튼방정식밖에 모르는 아버지는 점성술에 달통한 남자보다도 더 무력하다. 이론적인 가능성에 매몰되어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둘째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어떤 것일까? 질문을 이렇게 쓰고보니 무슨 불교교리에 대한 질문같은데 사실 줄리언 바지니는 어쩔지 몰라도 나는 불교교리를 파고들 생각은 없다. 나는 딱히 불교교리를 깊게 공부한 적은 없다. 다만 내가 없다라는 무아에 대해서 이 앞에서 쓴 것을 기반으로 한마디 언급을 남기고 싶을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라는 것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시공간 속에서 찾아진 하나의 패턴이다. 어린 아이의 세계는 단순하다. 따라서 그 자아도 단순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아이의 자아가 그 아이가 인식하는 세계의 대부분을 채운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자신에게 보살핌을 주는 사람이 한 사람 이상이라도 그것을 그저 어떤 보살핌의 손이라는 식으로 뭉뚱그려서 하나로 인식할지도 모른다. 아이가 좀 더 자란다고 해도 그 아이의 세계는 나와 부모라던가 나와 가족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이룩되고 그 세계의 대부분이나 모든 일은 결국 나에 대한 것이고 나는 여기에 있다는 식으로 느낄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존재를 알고 그 중요성을 느껴도 부모가 피곤한지 혹은 아픈지 별로 알지 못한다. 대개는 그저 내 욕구만 챙길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젊은 나이에 사회나 민족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에는 도달하지 않았다고 해도 굉장히 확장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배고픈 아이를 보고 측은하게 느끼는 것은 직접적 감정이다. 하지만 어떤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해 분개한다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왜 계몽적 이상에 빠지는 가, 우리는 왜 종교적이나 학술적 목표에 빠져드는가. 천명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느끼는 자아란 어떤 것일까? 

 

진정한 무아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전제해서 말하자면 무아란 그렇게 신비한 상태가 아니다. 세상을 나로 여기는 상태가 무아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크고 작은 세상을 이미 나로 여기고 있다. 내 자식의 손이 잘못되느니 차라리 내 손이 잘못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할 부모는 세상에 많이 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장소에서 더 크게 더 깊게 파고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더 큰 세상을 보게 될 때 그리고 그래서 자기를 잊게 될 때 우리는 타고난 불행도 잊을 수 있다. 

 

나는 현대인이 2천년쯤의 옛날로 돌아가서 온갖 미신에 빠져있고 세상 넓은 줄을 모르는 무식한 대중을 만난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하고 상상해 본다. 그는 아마도 부질없이 스스로를 고통주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가슴이 아플 것이다. 예를 들어 줄만 서면 모두가 먹을 수 있는데 새치기로 싸우느라 굶는 사람을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화도 날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왜 사는게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고통없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현대인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할 것같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닙니다. 그 나를 버리고 무아에 도달할 때 우리는 고통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같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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