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6
일전에 플랫랜드의 주석을 번역했던 일도 있었던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신간을 보내왔습니다. 옥스퍼드식 개념사고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책은 원제가 thinking with concepts으로 개념을 가지고 사고하기 라고도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이 책을 1963년에 쓴 영국인 존 윌슨은 옥스포드와 시카고에서 강의했던 교육학자입니다.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윌슨은 이 책을 통해서 주로 일상언어학파의 논증분석 기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소개하는 형식은 매우 간략하면서도 실용적입니다. 월슨은 이 책을 일종의 교과서로 생각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그 구성도 철학적 배경을 간략히 제시한 3장을 제외하면 무슨 참고서 처럼 기초적 기술설명과 예제풀이 그리고 연습문제 제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가정하고 있는 교육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개념적인 분석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사고와 글이 일관성을 가지고 튼튼한 근거를 가진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구성은 좀 뜻밖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편한 방식일 수 있을 것같습니다. 철학자들이란 대개 말이 많지요. 그래서 철학자의 책은 말이 많은 것에 비해 별로 도움이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책같은 것을 가지고 끙끙 대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은 일상언어학파의 논증기술을 제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철학을 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 글을 써야 개념상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가하는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로서는 이 책이 개념의 문제라는 철학을 가르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대개의 책은 말하자면 물고기를 낚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물고기를 줍니다. 이런 저런 지식과 가치판단적인 주장을 늘어놓습니다.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다. 4차산업혁명이란 이런 것이다라던가 이게 중요하다 저게 옳다라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언어와 개념을 분석해서 스스로 그 개념의 경계를 찾아가는 방식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 책을 가장 단순하게 읽은 사람은 아마도 이 기술을 읽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도 자신의 글을 분명하게 만드는 원칙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술을 일단 어느정도 따라하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이 기술의 바탕에 있는 철학 즉 일상언어학파의 개념적 분석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정보의 습득은 어떤 의미로 세계나 나와는 분리된 것입니다. 그건 이게 이렇다라는 사실이죠. 그러나 분석은 주체와 대상의 접촉을 요구합니다. 분석에는 나의 입장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히 나와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해 관찰하게 됩니다. 그런 점이 개념분석을 배우는 장점이지 않은가 합니다.
저는 사실 개념적 분석에 매몰되는 것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처음에는 개념분석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극보수적인 사고로 빠지게 만드는 종류의 책이 아닐까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객관적이고 주체적이며 논리적인 분석이 가능하다는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사실 과학이나 수학이 그러하듯 거대한 분석체계의 일부로 흡수되기 쉬운 것이 이 분석에 지나치게 빠져든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같은 말을 해도 다른 문맥에서는 다른 뜻이 된다는 것을 잊고 객관적 개념에 중독되기 쉽습니다. 그 결과 개념의 권위적 정의에 오히려 도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엄청난 증거로 쌓아올린 개념정의를 간단히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질량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매몰된 사람은 사람들이 말하는 질량의 개념에 빠져서 일반상대성이론이 말하는 질량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혁신이나 혁명에는 개념적 파괴가 따르기 마련이며 이럴 때 올바른 개념을 쓴다라는 원칙은 적어도 과도기 기간동안 망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지나치게 멀리하면 혁신은 불가능하고 개념분석은 자신을 자기 세상에 가두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월슨은 철학적 배경을 논하는 장에서 이러한 면에 대해서도 숙고하고 있음을 보입니다. 그는 우리가 가진 개념도구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 후에 철학이 해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게임의 법칙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개념적 분석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이것이 그저 하나의 기술이라는 경고도 해주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 책을 읽고 엄청난 철학적 깨달음을 얻거나 글쓰기가 엄청나게 좋아질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월슨은 그런 허황된 목표를 가지는 대신 착실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분명한 형태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인 것같습니다. 글쓰기 교실 교재로 쓰기에 적합한 책처럼 보이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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