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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이바르 에클랑의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9. 8.

16.9.8

이 책은 최적화에 대한 우리안의 믿음에 대한 것이다. 서구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중세 이전의 기독교 시절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그래도 가능한 세상중의 가장 좋은 세상이라는 것은 자연스런 믿음이었다. 그 이유는 만약 이 세상이 무한한 권능을 가진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면 그 세상이 열등한 것이라는 생각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한 나라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왕을 존경하고 그 왕에게 충성하는 백성이라면 그 나라에 설혹 나쁜 일이 있다고해도 그걸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가능한 선택중에서 가장 좋은 선택을 지혜로운 왕께서 내려주셨을 거라고 믿으며 왕에게 계속 충성하려고 할 것이다. 신이 만든 세상은 가장 최선의 세상이라는 생각은 라이프니츠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보다 복잡한 내용을 가진 모나드의 철학으로 바뀌고 후세의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믿어지게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신에 대한 믿음이 그 기반이 된다. 

 

 

과학의 시대가 열린 이후 이 믿음은 약간 변형되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믿음의 결론은 여전히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능한 세상들중의 가장 좋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명은 좀 다른데 신과 결론 사이에 자연의 법칙이 끼어들거나 아니면 아예 신을 가정하지 않고 그냥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렇게 된다고 말해진다. 다시 말해 세상에는 어떤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따라 가장 좋은 세상이 저절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면 적어도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 법칙을 찾아 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 학자들이 그렇게 했다. 때로는 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닌 경우에도 최적화의 법칙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이론이 바로 최적화의 증거라면서 잘못된 통설을 만들어 냈다.

 

이런 최적화의 예에는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지금도 시장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변동이 일어나고 경쟁이 저절로 가장 최선의 답을 찾아 준다고 믿는 시장주의자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자유시장의 이상은 환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다른 예는 진화론이다. 사람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진화론은 살아남은 사람이 가장 훌룡한 사람, 경쟁에 이긴 사람이 가장 훌룡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종종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것은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경쟁에 이긴 사람을 우수한 사람이라고 정의한 후에 우수한 사람이 경쟁에 이긴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그저 경쟁에 미친 사람, 어떻게 해서든 경쟁에 이긴 사람이 자기를 운명의 승자로 부르기 위해 만들어 낸 해석일 뿐이다. 우수하고 열등한 것은 주어진 문맥,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정의되는 문제고 이 세상에는 당연한 환경, 절대적 의미에서 공평한 환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예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특별히 어떤 법칙을 믿고 운명을 믿고 이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체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어떤 법칙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왕의 폭정에 시달리면서도 왕에 대한 충성심만 가득한 왕조시대의 백성이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문제의 근원을 쳐다보지 못하게 된다. 

 

이바르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런 법칙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어리석음과 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과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 우리 세상은 가능한 세계중의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 문제투성이의 세계이며 우리가 그걸 고쳐야 하고 고칠 수 있다. 어떤 법칙이 가능한한 최선의 세계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이러한 결론을 전개하기 전에 책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최소 작용 원리라고 불리는 것으로 모페르튀에 의해서 처음 주장된 것이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은 작용이라고 정의 되는 어떤 양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최소 작용 원리다. 어떤 상황에서는 단순히 이동거리가 작용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이동거리를 최소한으로 하는 경로를 따라 물체나 빛은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모페르퇴는 이 법칙을 주장하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능한한 세상중의 최선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법칙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작용을 아끼는 것이다. 최소 작용의 법칙을 연구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만든, 그러니까 이 법칙도 만들어낸 신의 의지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최소작용의 법칙은 오일러, 라그랑지, 헤밀튼 등의 학자들을 거치면서 물리학의 중심적 방법중의 하나로 발전했다. 파인만은 20세기에 이 방식으로 경로적분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게다가 최적화 문제가 많이 연구된 현대로 오면서 최소작용원리는 더 중요한 수학적 방법론이 되었는데 고전적 불확정원리같은 것이 이같은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바르는 책의 처음 몇장을 통해서 17세기 과학혁명 시대 이후의 과학과 철학의 변화를 개괄한다. 과학이 어떤 변화를 겪고 어떻게 종교와 충돌하고 종교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소개한다. 그러는 가운데 등장한 최소 작용의 원리는 종교적 시대에 당연히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주장된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미 의구심은 있었다. 클레르 슬리에는 나중에 에른스트 마흐가 비슷한 질문을 던졌듯이 최소 작용의 원리라는 것이 의심된다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유명한 수학자 페르마는 어떤 철학적이고 신학적 대답을 하는 대신 수학적 방식이 결과적으로 현재의 세계와 맞아 떨어진 것이라는 태도만을 취한다. 즉 수학은 그저 방법일 뿐 신의 의지라던가 철학이 어떻게 된다던가 하는 것은 주장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에서 최소작용원리가 해석되는 바로 그 시각이다. 즉 그저 방법일 뿐 최선의 세계 운운하는 철학이 거기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소작용의 원리는 그 방법론이 발전하면서 최소도 최고도 아닌 것이 되었다. 현실세계는 작용의 안장점이라고 불리는 곳에 대응하는데 그곳은 어떤 방향에서는 최소점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최고점이 되는 그런 곳이다. 따라서 가능한한 세상중의 최선의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모페르퇴의 믿음은 비슷한 믿음이 지금도 세상에 통하고는 있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좌초하고 만다.

 

이바르 에클랑은 또한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상당 지면을 쓴다.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기본적인 불확실성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양자적 불확실성이고 또하나는 고전적 혼돈이론에서 나오는 불확실성이다. 전자의 경우는 20세기 양자역학에 의해 지적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푸앵카레가 가장 선도적으로 많은 역학시스템이 자연스레 진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요동에 민감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발견함으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불확실성이든 그런 피할 수 없는 불확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을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정말 어떤 법칙이 있어서 우리는 이미 가능한 세상들 중에서는 최선의 세상에 살고 있고 있는 것일까? 만약 어떤 일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무작위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그건 말이 안되는 생각일 것이다. 

 

이바르 에클랑은 게임이론의 역사와 의사결정이론의 문제들을 통해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계속 지적한다. 예를 들어 다수결 원칙같은 것이 최선의 답을 찾아주는 자동적인 절차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믿음이라고 지적한다. 이미 1785년 콩도르세가 논문을 발표한 이래 수학자들은 다수결 원칙의 문제를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애로우는 콩도르세의 역설을 벗어날 절차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투표는 언제나 조작될 가능성이 있다. 다시말해 심지어 민주주의 시스템조차도 우리가 어떤 시스템을 쭉 따라가기만 하면 저절로 가능한한 최선의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선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 어렵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바르 에클랑의 결론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래도 과학적 합리주의를 믿어야 하며 자아 성찰을 통해서 자기의 철학을 구축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이바르 에클랑은 비선형 함수해석과 변분법 그리고 수리경제학 분야에서 연구를 해온 수학자로 현재 캐나다 브리티쉬컬럼비아 대학의 교수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최소작용원리를 통해서 책의 내용을 진행시킨다. 그러다보니 책의 설명이 지나치게 짧거나 기술적인 부분도 있다. 사실 대학교 학부시절에 최소작용원리를 처음배울 때는 모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리둥절해 한다. 그런 것을 몇줄의 말로 설명하다보면 위상공간이니 뭐니 해봐야 일반인은 따라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주장하려고 하는 내용을 잘 정리하지 못한 면도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느껴지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기술적인 부분은 5장정도까지고 그 이후는 수학적인 부분이 거의 없으며 내용도 좀 더 간략해 진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다. 최소작용원리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공계 출신 사람들은 앞부분이 더 재미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뒷 부분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 내용은 8장에서 다시 짧게 요약되어진다. 이런 책은 결론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내용이 중요하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어떤 통설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내용이 좀 거칠지만 어려움을 참고 한번 읽어둘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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