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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앤서니 T. 크론먼의 교육의 종말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8. 16.

16.8.16

 

참조 : 1. 이 책은 닐 포스트만의 교육의 종말이 아닙니다. 2. End라는 말은 끝이라는 뜻과 목적이라는 뜻 둘다 있는데 닐 포스트만이 그랬듯이 중의적 의미에서 이 단어를 쓴 것같지만 이 책의 제목은 오히려 교육의 목적이라고 번역하는 쪽이 좋지 않았을 까 합니다. 

 

왜 대학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포기하게 되었는가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그 형식상으로 말했을 때 한마디로 오늘날의 대학은 삶의 의미를 가르치는 인문학이 꼭 필요하다라는 말을 하기 위한 책이다. 어찌보면 뻔하고 고리타분한 결론을 가진 이 책은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의 중요성과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세상을 분석한 것들의 가치로 인해서 특별하고 흥미에 넘치는 책이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세속적 인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세상을 구할 슈퍼영웅처럼 소개된다. 크론먼은 우선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대학은 왜 이런 모습을 가졌는지, 왜 인문학과가 몰락했는지, 왜 현대인은 정신적 위기에 빠져 있는지, 다양성주장과 다문화주의같은 것이 어떤 폭압적인 성격을 가지는지를 그는 설명한다. 그후에 그런 세상에서 세속적 인문학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소개되는 것이다. 설사 당신이 나처럼 세속적 인문학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의 분석과 문제의식은 탁월하고 매우 유익하다. 항상 답보다는 질문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번 느끼게 된다. 

 

그의 질문의 시작 또한 고리타분하면서도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라는 명제인데 세상에서 이것만큼 중요하고 이것만큼 자주 무시되는 질문도 없을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다라는 질문은 지적으로는 혹은 철학적으로는 결판이 난 문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의미란 항상 우리가 어떤 테두리안의 세상을 사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당신은 당신의 나라에 충성하며 사는 것이 당신의 삶이 가지는 의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계적 규모로 보면 그 나라는 수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 국가일지 모른다는 식이다. 절대적 의미가 없는데 그걸 있다고 믿고 찾다보면 그걸 발견했다는 확신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악을 행하게 될지 모른다. 혹은 그저 끝없이 찾다가 무한히 추상적인 사고 속에서 길을 잃고 코 앞의 삶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때문에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의미에서 삶의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런 걸 찾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실천적인 의미에서는 답이 전혀 달라진다. 인간이란 어차피 지구나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을 사는, 죽기로 예정된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아이가 인생은 허무하고 어차피 곧 죽을 것인데 살아서 뭐하냐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한한 우리는 무한한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을 아주 짧게 경험하겠지만 그 작은 세상도 소중하다. 친구도 가족도 나라도 다 소중하다. 먹고 마시고 세상을 두루 구경하며 이성을 만나고 출세도 해보고 사치도 해보고 또한 깨달음도 얻고 아이도 키워보는 여러가지 경험은 다 진짜다. 그걸 진짜냐 아니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일단 좋으니까.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실천적인 의미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대부분의 다른 질문들과는 다른데 다른 질문들은 말하자면 우리가 아는 세계 혹은 우리가 받아들인 패러다임 안에서의 질문인데 반해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을 초극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논하자면 우리는 우리 삶의 바깥쪽의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삶이 어디에 어떻게 놓여져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삶뿐이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어떤 위화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것을 의식하려고 하는 시도다. 그리고 그런 시도가 이따금 성공할 때 우리의 삶은 경계를 넓히고 우리 앞에 새로운 우주는 펼쳐진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았던 우리의 삶의 의미를 다르게 느끼게 된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유한한 인식의 경계안에서 살겠지만 우리는 이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유년기를 돌아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주변사람들과 툭탁거리며 살던 아이는 나이가 들어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면 순수했던 과거를 그립게도 생각하지만 저 좁은 세상에서 툭탁거렸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반대로 말해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 삶은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포기한 삶, 재미없고 무가치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 중요한 질문을 오늘날의 대학은 포기했다. 요즘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종종 대학이 애초에 그런 걸 하는 곳이라는 생각자체가 없다. 그러나 대학의 본래 모습은 그렇지가 않았다. 대학은 본래 그 출발시점에서 종교시설과 잘 구분되지 않는 곳이었다. 대학은 지금처럼 과로 구분되고 학생들이 자기가 듣고 싶은 강좌를 골라서 수강하는 곳이 아니라 전인교육을 목표로 정해진 커리큘럼을 듣는 곳이었으며 취업을 위해 직업적 기술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선배 지성인으로부터 배우는 곳이었다. 

 

이 시기는 종교의 시대였고 세상은 발전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계속 순환하며 유지되는 곳으로 파악되었다. 지식인들은 지식의 분야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부했으며 진리의 확실함을 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확고히 믿었다. 따라서 대학의 교수들이란 진리의 빛을 가진 존재로 그것만 알면 인생의 의미는 확고히 알게 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의미를 배우기 위해, 진리를 믿고 유지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가입하기위해 학생들은 대학에 갔던 것이다. 삶의 의미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바로 대학의 존재이유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식이 축적되고 종교의 힘이 약화되며 과학혁명이 시작되고 나자 대학은 전혀 다른 곳으로 혁신되었다. 그 혁신이 가장 먼저 일어났던 곳은 19세기 초의 독일이며 미국의 유학생들은 이를 배워와서 19세기 후반 남북전쟁이후부터 미국의 대학을 개혁한다. 

 

문제는 우리가 일단 어느 정도 이상의 지식을 축적하고 나자 고전시대에 가졌던 그런 확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말하자면 고전시대에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누구인지 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이제 과학의 시대에서는 플라톤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끝없는 자료수집과 그 분석을 통해서 계속 접근해 가야할 목표이며 절대로 그 최종적 답에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확실한 진리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황은 다시 새로운 과업에 대한 헌신으로 치유된다. 그것은 크론먼이 학술연구적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어떤 주제에 대해 최종적인 답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험과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지적인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성 이상의 것을 가진다. 과학은 학술연구적 이상이 가장 확실하게 성취된 분야다. 

 

이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분야를 계속 나눠서 전문화를 한다. 우리는 비록 확고한 진리를 아는 한명의 인간이 되는 목표를 포기했지만 인간의 수명을 훨씬 넘어서서 존재할 진리의 탑을 건축하는 한명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소명을 가지고 살 수 있다. 학문을 하는 가치는 이렇게 최종적 진리의 발견에서 진리의 탑을 계속해서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전문화는 하나의 필요한 수단을 넘어서 윤리적 의미까지 가진 것이 되었다. 다시말해 어떤 좁은 주제에 대해 엄밀하고 자세히 파고들지 않는한 어떤 새로운 정보도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지식인으로서 비판받아야 한다는 태도가 보편적이 된 것이다. 우리는 독창적이고자 하는 학자는 전문화된 연구에 집중해야만 한다고 믿게 되었다.

 

진리의 탑은 관념적으로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대학의 구조가 이를 대표한다. 대학은 여러개의 과로 계속 분할되어졌고 사람들은 점점 더 작고 좁은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것이 독일에서 19세기 초에 일어난 대학의 개혁이며 미국에서 남북전쟁이후에 일어난 대학개혁이다. 이제 대학은 삶의 의미를 전달하는 곳에서 새로운 지식을 늘리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같은 대학개혁속에서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가르치는 분야는 점점 더 힘을 잃어 갔다. 그런 고민은 그 본질상 전문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교수들이 하는 일의 중심은 논문을 출판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 지혜를 반복하고 다음세대에게 전해주는 일이 아니다. 

 

물론 교수들은 때로 그런 일도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학술연구적 이상과 충돌한다. 첫째로 교수들은 논문쓰고 새로운 연구를 하느라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다. 경쟁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학술연구적 이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허황된 이야기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비판받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로 학술연구의 결과 지식이 누적되면서 지식세계 전반을 둘러본다는 시도는 점점 더 불가능에 가깝게 어려운 일로 변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가르치는 일은 가면 갈 수록 어려우면서도 비판받는 일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과학분야나 사회과학분야의 교수들은 자신이 삶의 의미같은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인문학 분야의 교수들조차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거나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전시대가 끝나고 학술연구의 이상에 따라 대학이 개편되었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포기되고 바뀌지는 않는다. 인문학은 이제 크론먼이 세속적 인문주의라고 부른 것을 따르기로 한다. 그것은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여러가지 형태의 인간의 삶들을 나열하고 비교하면서 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과 의미를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속의 인간들과 대화를 주선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 인문주의는 과학이 점점 발달하고 학술연구적 이상이 점점 더 강력해지면서 자연히 약화된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시기가 왔는데 그것은 1970년대 이후 정치이념과 구성주의 철학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인문학을 더욱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세속적 인문주의는 절대성을 믿던 고전주의 시대에 비해 회의적이며 다양성을 포용하는 태도를 가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다양성은 사고가능하고 학습가능한 수준에 머문다. 절대적 하나를 고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상대주의에 빠지지도 않는 균형을 가지는 셈이다. 

 

그런데 정치이념이 대학의 인문학에 영향을 주면서 세속적 인문주의는 약화된다. 왜냐면 결국 크고 복잡해 지는 사회속에서 금기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이것은 논의할 가치가 있는 고전작품들의 선정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지독한 남성우월주의자라면 그 사람을 인생의 모범으로 가르치는 것에는 정치적 반대가 따른다. 어떤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해도 그렇고 그 사람이 동양에 대해 서구가 우월하다고 믿는 문화적 우월주의자라고 해도 그렇다. 

 

정치적 영향력은 다양성과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을 통해 인문학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같으며 분명 어떤 측면에서 필요하고 그런 면이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모든 것을 엄격한 제약속에 두게 되면서 다양성을 소멸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타국의 문화를 비하하는 행위는 좋지 않지만 모든 문화가 평등하다는 관점으로 자꾸 압력을 행사하면 결국은 모든 문화가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점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법은 부정적인 방법을 통해 대통령선거를 하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통령이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열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후보에서 제외한다고 해보자. 그렇게 한후 남은 사람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최종 당선자를 뽑는 것이다. 그런데 큰 사회에는 여러가지 사람들이 있으므로 여러가지 의미있는 금기들이 있다. 게다가 그 금기들은 아주 많다. 그러니까 이런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큰 국가에서는 거짓말쟁이 말고는 아무도 후보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제일 큰 거짓말쟁이를 뽑는 것이 선거가 된다. 

 

크론먼은 정치적 이념의 문제때문에 학생들은 개인으로서 인문학을 배우지 못하고 어떤 집단의 대표들로서 인문학을 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개인으로서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흑인으로서 여자로서 인문학을 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 자기를 변화시키는데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정당성논쟁이나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이 인문학이 다룰 수 있는 한계를 너무 좁혔다면 구성주의철학은 반대로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학습하고 사고할 수 있는 삶의 모범들을 선정하는 것은 어려워지고 학생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일이 불가능해 진 것이다. 크론먼은 오늘날 인문학은 한계 안팍에서 웃음거리가 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논할 권위를 잃어버렸으며 동시에 학술연구적 이상에서 보았을 때도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학문이 된 것이다. 누구도 고대 그리스시대보다 오늘날의 물리학이 못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플라톤 시대이래 철학은 발전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학술연구적 이상의 비전속에서 철학자들은 이제껏 놀기만 한 셈이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 학술연구적 이상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이 뭐가 문제냐고 묻는 사람은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물을 때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대학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종교단체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것은 분명 가능한 방법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인문학과 같이 이성적 방법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이 완전히 이 일에서 빠진다면 종교단체들은 점점 삶의 의미를 이성적인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어떤 것으로 단언할 가능성이 크다. 

 

학생들은 이제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제대로된 고민없이 이것저것 지식 맛보기를 하다가 졸업을 하고 전문학자가 되거나 취업을 한다. 여기에 현대인들이 정신적 위기에 빠지는 이유가 있다. 신은 오래전에 죽었다고 선언되었는데 사실은 인간조차도 사망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전혀 고민하지 않거나 매우 부주의하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크론먼은 가능한 유일한 대안은 대학에서 다시 세속적 인문학을 부활 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크론먼은 예일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그런 인문학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나는 대학이 인문학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가치는 매우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가 책속에서 말한 정신적 위기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느꼈다. 따라서 투자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왜 안되는가는 누구보다 크론먼이 책 전체에 걸쳐서 잘 설명해 놓았다. 크론먼이 말했듯이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인 이상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의 부재라는 것이 어떤 대안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크게 공감하지만 그것이 대학 인문학 프로그램의 부흥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될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인문학과의 교수가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도와주는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는 날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것같다. 

 

한국만해도 그렇다. 이미 대학의 인문학과는 위기라는 말도 지겨울 정도다. 취업률로 학과를 평가하는데 인문학과학생들은 취업이 안되어서 너나 할 것없이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대학교 바깥에서는 인문학 열풍이 부는 것같다. 여기저기 인문학강좌가 열린다. 사람들은 열심히 인문학 책을 산다. 이것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고민한다고 해도 그것이 대학이라는 시스템에 의해서 해결될 것같지 않다는 나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게 만든다. 

 

문제는 고정된 큰 학습 프로그램이 시대에 맞질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날 내가 실직을 했다고 하자. 그럴 때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자연스레 그것은 그때 나의 상황과 연관되게 될 것이다. 대학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화하면 대학교때 그 인문학 강좌를 들었다면 지금 내가 삶의 의미에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가질 텐데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두꺼운 책을 읽고 긴 강좌를 듣는 것이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효율성이 좀 좋지 않다. 10년전에 들은 1년짜리 인문학 강좌보다 어제 읽은 기사 한편 혹은 어제 본 4컷짜리 만화 한편이 나에게 더 도움이 될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실직과 삶의 의미라는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어떤 유명 블로거가 그 주제에 대해 쓴 글 한편을 읽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게 될런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지식이 폭발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지식을 그 순간에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도 말해보자. 나는 물리학을 연구했던 사람이다. 때문에 물리학 자체가 삶의 의미를 말해주지는 않지만 물리학을 배우고 연구생활을 했던 그 삶이 있었을 때 나에게 가능했던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은 그런 배경없이는 참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당신도 나처럼 물리학으로 박사받고 연구생활 십몇년 해보는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문학은 다르다고 말할지 모르고 분명 다르겠지만 어느정도는 그와 다르지도 않다. 니체나 칸트에 대해 공부하면 삶의 지혜를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학교 수리물리학 책 한권 공부하면 삶의 지혜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나는 느낀다. 의심이 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라. 당신이 물리전공이 아니라면 대학교 수리물리학 책을 공부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수학을 그만큼 공부하면 인생관이 안바뀌는지는 어떻게 아는가? 사실 내 경험으로는 수학공부나 물리학 공부를 하면 인간이 바뀐다. 니체나 칸트는 훨씬 쉽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서양인일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수리물리학이 칸트보다 훨씬 쉽지 않을까?

 

나는 새로운 시대에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망에 의한 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검색해서 읽는 것 혹은 듣거나 보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넷플릭스는 온라인 비디오 렌탈회사인데 이 회사는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손님이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어떤 비디오를 추천할까를 선택한다. 우리는 언젠가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나의 상황을 듣고는 그렇다면 지금은 이런 걸 읽어보시는게 어떨까요라고 추천하는 걸 보게 되지 않을까? 사실 구글 검색을 해봤다거나 쇼셜네트웍을 통에서 글들을 소개받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는 삶의 의미를 인공지능이 대신 찾아준다는 뜻은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정보폭증에 그 근본원인이 있고 거기에는 기술의 발전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 말은 언젠가 그 폭증한 정보들을 적절히 이용해서 삶의 의미를 고민할 때 도움을 받게 될 수도 있을거라는 뜻이다.  나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런지도 모르면서 서양철학사 강좌를 1년내내 듣는 대신에 말이다. 크론먼은 기술의 발전에 대해 무관심한 면이 있는 것같다. 그 점은 좀 아쉽다. 그러나 이 책은 아주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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