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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8. 10.

16.8.10

안도 다다오는 현대 건축가들을 소개한 한 책자에서 건축가들이 꿈꾸는 대부분의 상을 받은 사람으로 소개 될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일본의 건축가이다. 그가 2008년에 자신의 자서전을 쓴 것이 바로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이다. 자서전이라고 하지만 자기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고 대부분이 그가 했던 건축 프로젝트들에 관한 것으로 책을 읽다보면 안도 다다오는 굉장한 일벌레였을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즉 너무 바빴기 때문에 너무 치열하게 살아야 했기 때문에 결국 일 이야기 말고는 다른 걸 이야기할 것도 없지 않았을까 싶은 이미지 인 것이다. 

 

 

그러나 유명하다던가 상을 받았다던가 하는 이유로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은 아니다. 도서관의 건축관련 책들 속에서 우연히 뽑아든 이 책을 나는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약간 읽었고 그가 그의 건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것에 공감했기 때문에 끝까지 읽었다. 

 

안도 다다오를 소개하는 방식에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수식어는 그를 늘상 따라다닌다. 바로 대학에도 가지 않고 독학으로 건축가가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학생시절 공부다운 공부를 한 적이 없고 한때는 프로권투선수로 먹고 살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진짜 재능있는 선수를 보고 프로 권투선수를 그만 두기로 한다. 그리고나서 전세계를 여행하고 혼자 독서를 하고 그리고 그냥 이일 저일 배워가면서 알게 된 것으로 28살의 나이에는 건축 사무실을 냈다. 물론 문을 열었을 뿐 손님은 없었다고 한다. 공모전을 위한 설계를 하고, 주문도 없는 땅을 위해 땅주인도 모르는데 혼자서 설계를 하거나 르 코르뷔지에같은 사람의 건물을 책에서 보고 그 도안을 거듭해서 다시 그리는 생활이었다. 

 

그는 세계를 여행하고 책을 읽으면서 68년 파리 데모에도 참여하고 나름 진보적 미술운동에도 관여했던 모양이다. 그가 대학도 나오지 못한 전직 프로권투선수라는 선입견으로 그의 지적인 능력, 문학적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며 예술가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는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재능이 있고 노력했다고 해도 그런 이력을 가지고 건축가가 된다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는 여러가지 행운이 따랐는데 내가 보기에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행운은 젊었을 때 이미 자기 건축의 원점을 발견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걸 통해서 자기만의 메세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걸 재능이라고 부르자면 재능이라고 해야하고 고집이라고 부르자면 고집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가 아무 것도 없는 시절, 세상과 타협했다면 그는 그저 저학력의 건설판 노동인력이 되는데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했고 그것을 비교적 일찍 하나의 집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 이것은 비록 행운이지만 처음의 집한채란 작은 것이라고 해도 성공한 뒤에 백배 큰 건물을 짓는 것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저절로 세워지는 건물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엄청난 재능과 노력이 아니었으면 세상은 그걸 손톱만큼도 인정안해줬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자기 건축의 원점으로 말하는 집은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이다. 크기가 가로 세로 3.6미터, 14.4미터 밖에 안되는 집인데 이 집을 짓는 공사는 이 집과 폭과 높이가 같은 전통적 집들이 양쪽에 바싹 붙어있어서 두 건물 사이의 집을 재건축하는 일이었다.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우선 이 집은 바깥으로 폐쇄되어져 있다. 들어가는 입구 하나를 막으면 집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은 2층높이의 담을 넘는 것밖에 없다. 위의 사진을 보고 착각하면 안된다. 옆쪽으로도 뚫려있는게 아니라 벽으로 막혀 있다. 두번째로 이 집은 집 중간의 정원, 즉 중정을 가지고 있다. 중정을 가진 집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아주 큰 특징은 아니지만 이 집처럼 작은 집에서 집의 3분의 1을 중정으로 쓰기로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특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집은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다.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안도 다다오가 이 집을 자기 건축의 원점으로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가 이후에 만든 건축물들에서도 안도 타타오의 특징들은 계속 반복된다. 우선 노출콘크리트는 그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다. 그를 소개한 서구의 책은 그가 콘크리트를 아주 매끈하게 만드는데 재능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건물들은 흔히 폐쇄적이거나 아예 건물이 지하에 있는 경우도 있다.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느끼는 건물들이랄까. 그리고 집착이라고 할만큼 중정을 집어 넣은 경우가 아주 많다. 중정이 하늘까지 열린 구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건물의 한 중간에 어떤 공간이 있어서 그 공간은 공용의 공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가 만든 첫번째 상업건물도 뚫린 중앙공간을 가지고 있다. 지하철역사를 만들어도 중간에 커다란 구멍을 층마다 뚫어서 자연환기가 되게 하곤했다. 이렇게되면 자연히 집은 미로처럼 둘러서 가는 동선들로 채워지게 되고 서로 뻔히 보이는 공간들이 실질적으로는 서로 분할된다. 

 

그렇다면 그 특징들은 어떤 고민의 산물일까. 일단 그 출발점인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이 주택 그것도 소형 주택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부자의 저택이나 상업건물 혹은 공공건물의 경우는 사실 건축의 목적이 상당부분 힘과 권력의 과시나 소비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건축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권력과 이상을 느끼게 하고 소비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에 아 저 건물 참 멋지네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나 이것 저것 소유하고 싶은 것을 담는데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랑질이다. 

 

그러나 안도 다다오는 도시 게릴라라는 말로 그의 건물을 말한다. 이것은 살기 위한 집이다. 그것도 무한정의 소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많은 제약속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한 집이다. 도시의 끝자락에서 도시를 살아내기 위한 집이다. 보여주기 위한 집이라면 우리는 그 집의 얼굴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바깥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집의 표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깥쪽으로 멋진 기둥과 창을 내고 지붕도 멋지게 올려야 한다. 

 

그런데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은 이 점을 완전히 무시한다. 바깥에서 보면 그것은 출구를 위해 구멍을 하나 뚫어놓은 콘크리트 박스다. 색칠도 안하고 심지어 창문도 없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를 너무나 철저히 무시해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렇게까지 폐쇄적으로 보이는 이 집은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보면 오히려 바깥으로 열려서 자연과 하나되기 위해 엄청난 집착을 하고 있다. 완전히 폐쇄적인데 완전히 개방적인 집이라는 이 모순은 작은 집의 3분의 1이 중정이라는 것에서 나타난다. 집안에 일단 들어가면 방들은 중정을 향해 열려 있다. 중정은 거리와는 다르지만 여전히 바깥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는 공간의 희생이 필요하다. 내가 엄청난 집착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보는 아파트와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을 비교하면 그 둘의 입장차이가 그야말로 극과 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파트는 흔히 완전히 개방적이면서도 완전히 폐쇄적이다. 폐쇄와 개방의 순서만 뒤집어 놓은 것이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먼저 개방을 보자. 요즘 아파트들은 커다란 창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아파트란 창이 없다면 박스안의 닫힌 공간이라 그 점을 극복하자면 아주 큰 창을 낼 수 밖에 없다. 엄청난 통유리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바깥에서도 안이 들여다 보이는 것이 요즘 흔한 아파트다. 이제 폐쇄를 보자. 그런데 아파트는 매우 폐쇄적이다. 물론 우리는 창을 열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바깥 공기와 날씨로부터 격리되어져 있다. 아파트에서 우리는 바람과 햇볕을 느끼기 위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설사 테라스가 있다고 해도 그 테라스를 통해서 거리로 나서게 되는 구조가 아니므로 별도의 이유가 있지 않으면 테라스에 잘 나가지 않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아파트 바깥의 풍경에 우리는 점점 익숙해 지고 어느새 바깥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냉난방도 조명도 계속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만 느끼게 된다. 어느새 우리는 박스 안의 삶을 살게 된다. 마치 창문이 그림인 것처럼 우리는 바깥을 쳐다만 본다.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은 반대로 폐쇄된 박스같으면서도 계속 바깥과 소통하며 살게 한다. 자연 조명과 날씨의 영향을 통해 시간을 느끼며 살게 된다. 안도 다디오는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은 물론 불편한 집이지만 그 집에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다시 말해 그런 삶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증거,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안도 다다오가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을 통해서 고민하는 것은 과연 우리는 뭘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날의 대저택같은 것을 짓는다면 고민이 필요없다. 그는 한계와 제약을 좋아한다. 그런 것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알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의 큰 한옥집처럼 몇칸의 집들로 이뤄져서 손님은 여기에서 만나고 혼자 있으면 저쪽으로 가고 하는 식이라면 즉 자원에 한계가 없다면 우리는 뭐든지 더 가지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래서는 뭐가 진짜 중요한지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가난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한계와 제약을 경험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이 말해주는 것은 이렇다. 인간은 자연속에 살아야 하며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문명속에서 흔들리는 인간은 자연에 열리면서도 오히려 자기를 지키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만약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이라면 타인에게 콘크리트벽만 보여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옥처럼 대청마루를 내고 바깥을 느끼며 살면 된다. 도산서원처럼 작은 집을 지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도시처럼 작은 땅에 사람드이 모여사는 곳에서 그렇게 집을 지으면 오가는 사람들이 우리집 안방을 다 들여다보는 꼴이 될 것이다. 

 

 

도시에서는 우리는 바깥과 안을 구분하는 벽이 필요하다. 여기는 나를 표현하고 나를 지키는 공간, 나의 세계라고 말할 장소가 더욱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한 중간에 중정을 내서 세상과 자연을 느끼는 것이다.  보여주기와 자기를 지키는 선택에서 안도 타다오는 자기를 지키는 쪽을 택함으로써 그의 건축의 기본 방향을 잡았다.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확실한 자기를 가지지만 겉은 소박하고 튀지 않는다는 그의 정책은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후에 성공한 건축가가 되어 여러 다른 건축물을 지을 때도 주변과의 조화, 전통과 주변 경관의 유지에 집착한다. 예를 들어 그가 오모테산도힐즈 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렇다. 이 건물은 도준카이아오야마 아파트를 재건축하여 만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 그 자리에 전보다 훨씬 높고 사치스러운 건물을 지어서 자신들의 힘과 부를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그렇게 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시민들이 사랑하는 그 길은 옛 정서를 완전히 잃게 된다. 그 동네는 역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는 거리에서 보면 건물의 높이가 가로수를 넘지 않게 했고 건물을 바깥에서 볼 때는 원래 거기에 있었던 건물과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게 했다. 그리고는 거꾸로 땅속을 파고들어가서 내부 공간을 확장했다. 지상3층에 지하3층의 건물을 지은 것이다. 그가 만든 절이나 미술관도 지하로 파고들어간 경우가 종종 있다.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도 돈의 제약이 물론 있었겠지만 짓는다고 하면 층수를 높여서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가 오면 안방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우산을 펴야 하는 집을 만들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본래 그 집의 크기가 2층이고 옆집도 2층이니 한 집만 층수를 올릴 수는 없다는 것이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 집만 3층으로 튀어오르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안도 다다오가 성공했던 이유는 그가 현대 문명속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집이 뭔가를 미리 고민했던 건축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풍요에 빠져들고 이것저것 다 가지려고 할 때, 기술적 발전속에서 역사는 지워지기만 할 때 그는 뭐가 중요한가, 무엇은 버릴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모더니즘 건축가들을 포함해서 다른 많은 건축가가 지은 집들은 더 많은 소유라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공간을 최대한 크게 확보해서는 그 안에 우리가 욕심나는 것을 모두 담으려고 한다. 이런 거 저런 것도 '있어서' 좋은 집이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소유의 옥석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정부분 자본주의 시장논리와 닮아 있다. 수요와 공급은 시장에서 저절로 균형을 맞춰서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시장주의자들의 믿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욕망하면 (수요)된다. 더 욕망하면 더 소유하게 되고 그것이 꿈이 이뤄지는 것이다. 부작용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 능력때문에 더 가질 수 없어지는 상황은 저절로 오는데 그것이 바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점이다. 

 

아마도 우리가 시장주의자들에게 세뇌되었기 때문에 무한정의 욕망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겠지만 이것은 여러모로 어리석다. 예를 들어 안도 다다오는 건축물을 지을 때 목적이 없는 공간을 확보하려고 한다고 한다. 건축가도 그게 뭐에 쓰일 건지 모르는 공간을 턱하니 부지에 남겨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도 다다오는 그 건물이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는 건축가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확실성에 대비해서 그는 다 채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다 채우지 않을 때 건물은 제대로 사용되게 된다. 우리는 꽉꽉 채워서 가지고 있는 것들도 즐기지 못하는데 말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빨리 이동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집을 더 많은 것으로 채우고 집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는 동선이 중간에 방해받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 그것을 편리한 것으로 말한다. 안도 다다오는 집에 자연을 끌어들여 자연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에 우선 큰 투자를 한다. 게다가 그것때문에 집이 불편해지고 동선이 길어지면 그것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바로 지금 있는 곳에 더 집중할 수있다. 편한 것,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와 환경과의 조화, 자기를 찾고 자연을 느끼며 사는 것이다. 

 

도산 서원은 멋지지만 오늘날 복잡한 도시안에서는 좋은 건축의 예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안도 다다오의 주택도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 바뀌어 가고있다. 사실 세상을 바꾼 철근 콘크리트와 유리의 주택도 겨우 1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3D프린트같은 새로운 기법이 또 건축을 바꾸면 안도 다다오 주택이 가는 한계는 극복하면서 그 장점은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집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도구가 등장하더라도 우리가 뭐가 중요한지, 뭐는 덜 중요한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채우려고만 한다면 좋은 집은 불가능할 것이다. 

 

안도 다다오는 젊은 시절 르 꼬르뷔제를 선망해서 직접 보고 싶었지만 르 꼬르뷔제의 죽음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안도 다다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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