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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6. 2.

16.6.2

최근에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버지를 잃은 경험을 이 책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나도 1년전에 아버지를 폐암으로 잃었다. 이 때문에 이 책의 내용에 새삼 여러모로 느끼는 점이 많았다. 

 

가완디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그다지 새롭지 않지만 많이 외면되는, 그러나 점점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일이 이렇게 되는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오늘날은 의학의 발전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전보다 많다는 점이다. 환자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의사에게는 언제나 뭔가 해볼 것이 남아있다. 그러나 더 큰 힘은 더 큰 지혜로움과 합치지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에게 부담이 된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더 강하게 던지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이처럼 더 발달된 의학의 힘으로 우리가 뭘 해야 할 것인가를 전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는 세계의 부유한 국가는 다들 빠르게 고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고령화속도에 있어서 세계에서 압도적인 1등이라고 한다. 노인이 많아지면 노인들 스스로도 노인 문제를 겪지만 젊은 사람들도 부담을 진다. 모두가 신경써야만 하는 사회문제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젊은 사람도 결국은 늙는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의미를 아주 미약한 의미에서라도 의식이 있다던가 아니면 그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의학의 힘으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환자를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은 전에는 별로 큰 문제가 없었다. 의학이 잘 발달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그렇게 해도 사람들은 길고 긴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 가완디는 미국의 대통령들의 예를 들면서 과거에는 대통령들 조차도 병에 걸리면 대개는 몇일 안에 죽고는 했었다고 지적한다. 부족한 기술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는 좀 더 분명했다. 멀쩡히 살거나 아니면 빠르게 죽는 것이다. 작은 장애도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약간 과장하자면 돈만 충분히 있다면 생명을 무한히 증가시킬 수 있다. 극복하지 못할 장애가 없다시피하다. 다만 그걸 살아있다고 부를 수 있는가가 문제다. 삶이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연장이 한 인간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게 되는 행위가 된다는 기묘한 표현이 종종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환자는 숨은 쉴지 모르고 가끔 의식도 돌아올지 모르지만 실은 자기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을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일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살아오면서 이룩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파괴한다.

 

부질없어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이런 저런 긍지를 가지고 있다. 환자의 긍지는 환자의 투병생활이 길어질 수록 망가진다. 가족을 위해 자기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투병의 고통을 겪으면서 얻어지는 거의 무의미한 시간들때문에 가족이 파괴되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투병생활을 힘들게 만드는 큰 이유중의 하나다. 또한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는 당연히 외로워 지는 것이 두려울 것이다. 그런데 가망없는 투병시간이 한없이 늘어나면 환자는 결국 외로워 질 수 밖에 없다. 삶은 고문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미래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 것이 가완디가 보여주는 것중의 하나다. 

 

힘든 시간을 겪고나면 대부분의 가족들은 환자를 시설로 보낸다. 그런데 그 시설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그저 숨쉬는 것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환자가 숨쉬고 있고 체중이 줄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 할 일을 해내고 있다고 파악한다. 예를 들어 환자가 약과 밥을 제시간에 먹고 옷을 제대로 입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은 인간의 삶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기 쉽다. 일단은 기본적인 것을 해야 한다,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환자는 낯선 곳에서 군대처럼 정해진 시간에 따라 일들을 해야 하고 실제보다도 훨씬 더 무능한 취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관리하는 쪽에서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 옷을 입는 환자를 기다려 주는 쪽보다는 헝겊인형에 옷입히듯이 후다닥 옷을 입혀버리는 쪽이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요양원에서 환자를 묶어두고 비인간적 대우를 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는 했다. 

 

의료시스템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부분은 우리가 무엇을 중히 여기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환자가 오래 살아남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가 환자의 삶의 질, 환자의 행복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그것을 어떻게 측정하고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외로운 노인에게 주사를 놔주는 사람은 보상을 받지만 그 노인의 손을 한번 잡아준 사람은 시스템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행위에 보상운운하는 것이 괴씸해 보일 수 있지만 전체 시스템을 보면 결국 보상을 많이 받는 쪽이 기꺼이 보상없이도 그런 일을 해줄 사람들을 밀어낸다. 

 

게다가 여기에는 아주 역설적인 문제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 환자의 수명연장을 보상하는 시스템이 실은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삶의 마지막에서 화장실에 자기 힘으로 간다던가 자기 옷을 자기가 입는다고 하는 것이 실은 환자에게 아주 중요할 수 있고 그런 것이 무시되었을 때 환자의 수명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숨쉬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중환자실은 사람을 급격히 그저 숨만 쉬는 존재로 퇴화시키기 때문이다. 

 

가완디는 기존의 요양원을 대체하기 위한 시도들을 소개하면서 죽음에 대비하는 호스피스 상담을 기존 치료와 병행하거나 자율을 증대시키거나 새와 동물들과 채소를 키우는 일들을 통해 책임을 더 지게 만드는 행위가 삶의 질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수명도 연장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더 오래살려는 노력을 멈출 때 우리는 더 오래 살게 된다.' 

 

삶의 질이란 심리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본래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존재다. 인간은 돼지처럼 우리에서 먹을 것이나 받아 먹고 살 것같으면 살고 싶어하지 않고 실제로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면들이 노화로 약해진 노인들을 돌보는 사업들에서 무시되어졌고 지금도 많이 그렇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단순할 때 우리는 수명연장을 이유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그 수명연장에도 실패하게 될 수 있다. 

 

내 아버지는 1년전쯤에 폐암으로 투명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그때 느꼈던 것을 위에서 말한 보상의 문제와 연결시키면 이런 점을 또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진단과 관리를 보상하기보다 특정 치료를 보상한다. 예를 들어 한 노인이 있다고 하자. 노인들은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아도 약을 대여섯가지씩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치명적 상태의 노인이 병원에 오게 되면 이 노인의 몸의 어느 부분들에 문제가 있는가를 진단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들을 어느 순서로 치료해 나갈까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술할 체력이 없으면 설사 치명적 암으로 그걸 당장 없애야 한다고 해도 수술을 못한다. 약해진 노인들은 사소한 이유로도 치명적 상황에 빠지고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노인들의 병은 젊은이의 병보다 더 전체적 시각을 요구한다. 자동차를 수리하듯이 치료를 할 수는 없다. 사람은 고장난 부분을 나열하고 어느 순서든 거의 상관없이 하나 하나 부품을 갈고 나면 나중에 부웅하고 힘차게 도로를 달리는 식으로 치료될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의 전문화된 의료시스템은 특정치료들을 각각 보상한다. 치아 임플란트를 하면 돈을 벌지만 치주염을 진단하는데 실패했다고 해서 처벌을 받지는 않고 진단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돈을 받지도 않는다. 보상은 진단 후의 치료에 집중된다. 그러니까 병원은 백명의 환자를 받아서 그 백명을 다 고치는 것보다는 천명의 환자를 받고 그 중에서 치아 임플란트 환자만 골라서 빠르게 치료를 하고 나머지는 우리는 모르겠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는 쪽이 훨씬 더 돈을 잘 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차가 아닌데 병원은 점점 공장같아진다. 

 

의료시스템의 이러한 측면은 병원의 거대화, 전문화때문에 급격하게 심해지는 것같다. 삼성병원같은 곳에 말기암환자를 데려가면 마치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공장에 갔거나 자판기들이 끝없이 늘어선 곳에 간 느낌이다. 의료행위는 한없이 분업화되고 사람들은 이미 거의 로보트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팔근육전문 의사는 환자를 보고 내가 팔근육에 대해 뭘 해줄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과다한 치료를 하고 시간을 낭비한다. 이것은 의사나 병원이 나쁜 것이전에 인간의 기본심리다. 망치는 세상을 모두 못처럼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전문화된 의사는 지나치게 많은 병들의 이유를 자기 전문분야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안되면 또 다른 전문의사에게 환자를 보내고 체력이 부족한 환자는 다시 검사를 받고 새 의사에게 자기 상황을 설명하며 그러는 가운데 병은 더 심해지고 변화해서 어떤 경우에는 다시 처음의 의사에게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것은 여러가지 합병증이 동시에 진행되는 환자에게는 최악의 상황이다. 이러다가 환자가 죽어도 물론 누가 이 환자를 죽였는가는 확실치 않으므로 처벌도 없다. 하물며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겪게되는 고통에 대해 누가 책임지겠는가. 환자의 가족도 의사도 모두 책임이 없다. 그냥 세상이 그럴 뿐이다. 

 

가완디는 호스피스 간호사가 환자에게 질문하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호스피스 간호사는 환자가 뭘 원하는지, 뭘 느끼는지에 집중해서 질문하더라는 것이다. 삶의 질이란 결국 그 사람이 뭘 느끼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어떻게 말하면 삶이란 나의 느낌이라고 말할 수 조차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생명을 연장한다는 것은 나의 느낌, 내가 느끼는 자아가 유지되도록 하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은 자꾸 사는 것은 이러저러한 것이고, 행복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단정지으려고 한다. 너는 스스로 잘 모르고 있다. 전문가의 말을 들으라고 한다. 채소밭을 가꾸는 것은 노동이며 책임을 지는 행위니까 환자의 노동량을 줄이고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더 좋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피해야 할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우리는 환자의 삶과 자유를 파괴한다. 

 

가완디는 너무 늦기전에 환자와 그리고 자기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라고 권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당신은 뭘 느끼는가.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것은 당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당신은 지나치게 죽음을 외면해서 실은 지나치게 먼 곳의 일만 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다가 죽음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면 우리는 느낀다. 우리는 누군가를 상실하기에는, 우리는 지금 죽기에는 너무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가완디는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우리 고민해 보자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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