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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5. 3.

16.5.3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 심리학을 한 청년과 한 철학자의 대화속에서 소개하는 책으로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가 공동집필한 것이다. 기시미 이치로는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해 온 그리스 철학 연구자이며 고가 후미타케는 작가라고 한다. 이 책에는 나오는 이야기들은 매우 공감가는 이야기였지만 나로서는 비약이 느껴지는 곳도 종종 있었다. 나는 때로 책읽기를 중단하고 그것을 다시 재구성해야만 했다. 이제 그것을 여기에 써두기로 한다. 

 

 

 

아들러는 프로이트나 융같은 저명한 심리학자였지만 이제는 상대적으로 잊혀진 사람이다. 그는 심리학을 과학으로 만들고자 했던 프로이트와 대립되는 주장을 펼쳤고 이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는 비판도 받았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굳이 아들러의 주장들을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그것을 철학이라고 부른다. 

 

이 점은 기억해 두는 것이 필요한데 만약 여러분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증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얼마간의 불편함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엄격히 말해 여러가지 자료와 논리를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여 독자를 설득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여러가지 사례들을 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으로 착각될 수도 있으나 차분히 이 책을 읽으면 사실 이 책에 나오는 말들은 거의 독단적으로 선언되며 그것이 옳은 말이라는 것은 첫째로 유명한 아들러가 그렇게 말했다는 점 둘째로 그 말들이 일관성을 가진 무모순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기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증명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방식의 제시이며 그렇게 제시된 메세지에 공감하여 거기에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뒤에 보다 분명해 지겠지만 그것이 아들러식 사고 방식이다.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이 마음에 들면 참가하라 싫으면 말고 하는 식이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도 과학이 아니지만 그래도 프로이트의 이론은 인과론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점에서 과학이 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나 현대의 인지과학에서 인간이란 과학의 대상으로 원인과 결과의 이어짐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유의지란게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은 입력과 출력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 함수와 같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입력을 바꿔서 출력을 바꾸거나 함수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즉 학생의 학습환경을 바꾸면 학생이 공부를 잘하게 되고 학생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트라우마를 해결하면 학생은 공부를 잘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어떤 객관성이 있는 관계나 법칙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아들러의 심리학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프로이트와 다르다. 아들러는 거꾸로 주관성과 자유의지를 인간의 핵심으로 놓는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이란 단 하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 선택에 달려있다. 심지어 과거조차도 그렇다.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하는 것도 우리의 주관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러식의 관점에서는 우리는 왜 이런 저런 식으로 선택을 내리는가 하는 질문에 관심이 집중되게 된다.

 

오늘날 인과론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유의지적인 관점은 인과론적인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기이하게 들리기 쉽다. 이 책은 우리가 오늘날 경쟁에 시달리고 불행한 이유는 우리가 인과론적인 관점에 따라 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의도나 선택을 강조하는 목적론적인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모두 행복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삶이 우리의 선택들로 이뤄져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만든다. 세상일을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잘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복잡한 일인 것같다. 그에 비하면 변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훨씬 쉬울 것같고 단순할 것같다. 그러나 아들러는 실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쓸데 없이 복잡하게 산다고 말한다. 

 

책은 세계는 아주 단순하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청년이 철학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상은 복잡하고 책임질 일도 걱정할 일도 아주 많아 보인다. 절대 단순해 보이지 않는데 왜 세계가 단순하다는 것일까? 그것은 자유의지나 선택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고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 혹은 바꿀 수 있는 것에는 관심을 집중해야 하지만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 혹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인 주제에 영원하고 보편적인 법칙에 자신을 매이게 해서 온갖 쓸데 없는 의무만 잔뜩 짊어지는 일을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나를 잘 봐주면 좋겠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럴때 프로이트적인 혹은 인과론적인 사고방식은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하면 직장 상사가 나를 좋아하게 될까 혹은 반대로 나의 어떤 면이 직장상사로 하여금 나를 싫어하게 만들까를 고민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일은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규칙을 가지게 되고 많은 일을 잘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고민은 삶을 고달프고 복잡하게 만든다. 아들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그의 과제이니 남의 과제를 침범하지 말고 자기 일이나 신경쓰세요!’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움받을 용기도 바로 이 이야기다. 남이 나를 좋아하건 미워하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실제로 언제나 누군가는 나를 미워하기 마련이니 미움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다. 인생 복잡하게 살지 말라는 이야기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명쾌하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여러가지 불평이나 반론을 펼 수 있지만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 봤나를 점검해야 한다. 아무렇게나 살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세상을 전부 구할 수 없다. 그렇게 해야할 일을 늘려서는 오히려 하나도 잘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헛된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삶을 더 꼬이게 만드는데 객관적인 세상의 인과론으로 세상을 자꾸 보는 우리는 습관적으로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러한 요점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장자에는 빈배의 이야기가 나온다.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떠내려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번째 소리치는데 그 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기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 하겠습니까? (오강남역, 장자, 388p)

 

또 힌두교의 성전인 바가바트기타에도 이런 구절들이 있다.  

 

깨달은 자는 이 세상에서 제가 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이라 생각하는 것이 없고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 없다. 일체의 산 것 중에 어느것에도 그의 이가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다.

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제 의무를 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하는 것보다 낫다. 제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니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뿐이다.

 

아들러의 말은 우리가 장자나 바가바트기타가 권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세상을 살 때 부질없는 세상사들에 시달리지 않을거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들러는 또한 목적론적인 관점이란 것을 통해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 세계가 우리가 만들어 낸 세계라는 것 즉 주관적 인식의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하는 것에서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목적을 위해서 세계를 만든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책임이다. 

 

상사가 괴롭혀서 일하기 힘든 직장은 나쁜 상사라는 원인이 일하기가 힘들어진다라는 결과를 만드는 곳이 아니다. 그보다는 일을 안하기로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 상사가 나쁜 상사로 존재하는 세계로 만들어 진 것이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사람을 못만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싫어서 부끄럼증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불쌍한 존재라서 불행한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불쌍한 존재로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서 스스로를 불쌍한 존재로 만든다. 다른 인간이 없다면 우리는 불쌍한 존재가 될 필요도 될 이유도 없다. 

 

객관적 세계관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이 말들에 어리둥절해 질테지만 이 말들은 분명히 진실의 일부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각본을 쓰고 직접 출연하는 연극같은 것이다. 우리가 꾸는 꿈같은 것이다. 우리가 꿈속에서 누군가와 싸운다면 실은 싸우고 있는 나도 내가 싸우는 상대방도 모두 내 머리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실은 꿈을 꾸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가상 세계속을 걷고 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린 시절에 쓴 일기가 있다면 그것을 펼쳐보거나 어린 아이들을 관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각자의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 세계는 어른의 세계와 상당히 다르다. 그곳은 말하자면 사탕하나, 게임 아이템하나가 인생이 걸린 문제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판단이 어른의 세계와 다르다. 그 세계안에 있는 어린 아이는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어른의 관점에서 보면 그 세계의 악당은 악당이 아니고 그 세계의 절친은 절친이 아니다. 첫사랑은 과도하게 아름다워 보이고 아이는 대개 너무나 넓은 세계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그 세계는 객관적인 면도 있지만 역시 누군가가 만들어 낸 판타지다. 그 세계에 갇히게 된 것은 그 사람의 선택때문이다. 우리는 학폭이나 가정폭력같은 것으로 고민한 끝에 자살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왜 그 학교나 가정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누가 그 사람들을 그 세계에 가뒀는가.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판타지가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주관적인 세계를 살고 있다.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도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작다. 그러니 그것들이나 신경쓰고 우리가 바꿀 수 없는 부분, 예를 들어 남들의 마음같은 것은 신경쓰지 말고 살아야 한다. 빈배를 보듯 마음과 머리를 비우고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은 단순한 곳이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허무하다.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 버리고 사는 것같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을까? 사실 우리의 행복이란 상당 부분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칭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욕망을 가진 인간이지 득도하여 욕망이 없어진 도사가 아니지 않는가?

 

아들러는 행복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준다. 행복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속감은 내가 그 세계 혹은 그 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느끼게 된다. 책은 바로 이 공동체 감각을 느끼는 것이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있는 세계에 대해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소속감을 가지게 되지는 않는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자신의 학교에 대해 소속감을 느끼고 행복에 이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함으로써 더 큰 공동체에 눈 뜨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세계를 확장한다고 우리가 저절로 행복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그 세계를 위해 일함으로써 행복에 이른다. 그건 누가 알아주거나 칭찬해줘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애국자라면 이 나라 사람 누구도 몰라도 내가 이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는 행복해 진다. 내가 과학의 신봉자라면 과학 공동체를 위해 뭔가 하고 있을 때 나는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의 성공이나 유명세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가 자신이 나에게서 받는 사랑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아들러는 우리가 타인에게 헌신하는 일을 하는 것에 행복의 비밀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타인에게 헌신한다는 것이 그저 아무나 돕고 살면 그것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니다. 그 타인은 우리의 세계안의 타인이며 그것은 주관적 관점 혹은 이념에 따라 만들어 진 세계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 세계의 일부인 타인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당신이 당신의 이념에 충실하다는 뜻이 된다.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에게 구속당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가 살고 있는 그 세계를 선택하고 그 세계를 만들었다. 당신은 그 세계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세계안에서 그 배우자에게 헌신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로 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잘 나눠서 행복에 도달하는게 아니라 말이다. 

 

우리의 이념이 만들어 내는 세계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존재가 당신의 일부다. 당신은 마치 극본을 쓴 작가가 연극 속의 모든 배역에 대해 중요성과 애착을 느끼는 것같은 입장에 선다. 작가는 그 자신이 한가지 배역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 세계에서는 타인을 위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며 여기에 있어도 된다라는 소속감을 증대시키는 일 즉 행복해 지는 길이 된다. 결국 아들러가 말하는 것은 자기의 세계를 성장시키는 일 혹은 공동체를 키우고 지키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일이 행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이다. 

 

행복하게 사는 일이 참 간단하고 단순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모두 행복하지 못한가. 그것은 우리가 인과론에 중독되고 객관적 세계관에 중독되었으며 상벌교육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하기 보다는 핑계를 찾고 원인을 찾는데 바쁘다. 객관적 세계관 속에서 1등이 되기 바쁜데 그러다보니 모두가 패배자고 초조하다. 우리는 칭찬을 받고 벌을 받는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살기 보다는 남의 기대에 맞춰서 사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삶은 쓸데 없이 복잡해지고 쓸데 없는 비교와 경쟁속에서 바쁘고 우울하다. 남의 기대에 맞춰서만 살 때 우리는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소속감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남의 평가에 달린 일인데 남의 평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며 예측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갑작스런 은퇴같은 불행앞에서 우리의 자존심은 무너지고 열등감을 느끼는 일은 고질적인 것이 된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자연 법칙의 노예인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가. 그 답은 사실 우리 개개인의 선택 이상으로 모두가 공감대를 가지고 뭘 선택하고 믿는가에 달려 있는 것같다. 우리가 인과론적인 인간관을 대부분 믿는다면 설사 소수의 사람들이 아들러의 주장을 믿고 살아간다고 해도 그들의 삶은 결코 쾌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수자의 믿음은 도전받을 것이다. 아내가 뭘 믿든 그건 그 여자의 문제고 나는 나대로 산다는 식으로 살아서 정말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우리는 주류 문화를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소수자는 문화운동을 벌여야 한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말고.’ 오늘날 아들러의 메세지는 점점 더 중요해 지고 있다. 왜냐면 프로이트식으로는 우리가 너무 불행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들러의 조언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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