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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에인 랜드의 파운틴헤드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4. 11.

16.4.11

미 연방 준비위원회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이 존경했던 사람이 쓴 책, 장한나가 내 인생의 책으로 소개한 책 그리고 철학적 건축 소설. 파운틴 헤드를 선전하는 글귀에는 이런 말들이 나와 있었다. 나는 건축에 대해 관심이 있으며 철학에도 관심이 있고 실은 이 파운틴헤드의 영문판을 우연히 10년정도전에 사두고는 읽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민승남 번역의 파운틴헤드를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복잡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 대한 반응을 좀 찾아보니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고 읽어본 적은 없지만 슈퍼크래쉬라는 세계경제위기를 다룬 책은 그 위기의 근원이 그린 스펀이 공감하고 존경했던 파운틴헤드의 저자 에인 랜드에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책에 대한 내 짧은 소감은 막장드라마라는 것이었다. 다만 요즘의 한국 막장드라마와는 조금은 다르다. 첫째로 나는 한국의 막장드라마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이 책은 무척 재미가 있다. 둘째로 막장 드라마가 막장이 되는 구도는 비슷하지만 원인이 되는 가치가 좀 다르다. 한국 막장드라마는 대개 혈연이라는 것을 그 근본 가치로 둔다. 다시 말해 자식을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망치는 일을 해도 자식인데 그럼 어떻하냐고 뻔뻔하게 말하는 식이다. 잘은 모르지만 요즘은 그 혈연관계를 이중으로 엮는 일도 많은 것같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자식을 자식인줄 모르고 지금 자식을 위한다면서 부모가 자기 친자식을 아주 괴롭히다가 나중에 그게 자기 자식이란 걸 알게 되어서 감정이 180도 바뀌게 되는 그런 이야기다. 혈연은 물론 중요한 것중의 하나이지만 그런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인간들이 끝도 없이 나오는 한국 막장드라마들이 나는 지겹다. 알았어 알았다구하는 말이 절로 나올 것같다. 

 

파운틴헤드가 막장드라마가 되는 이유는 이 소설 역시 한 개인이 느끼고 지키고 표현하려고 하는 자기 정체성의 중요성이라는 것이 다른 모든 가치를 전복시키도록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 인간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하워드 로크는 세상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게 지내면서 자신의 예술적 소신을 밀고 나간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몇명의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매력과 사랑때문에 흔들리고 범죄와 불륜과 폭력에 물든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채우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개미같은 존재로서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그야말로 숲속에서 벌레소리를 만들어 내는 귀뚜라미떼처럼 세상에서 웅웅 거리기만 한다. 그들은 무가치한 복제품만 만들어 내고 진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의 삶을 번거롭게만 만드는 날파리떼다. 그리고 물론 이 소설은 하워드 로크가 결국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의 가치를 절대시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윤리적으로 극단적으로 변하기 쉽고 실제로 그렇다. 예술적 절정을 이룩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뿐 아니라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를 극찬하는 이 소설이 왜 예술가인인 장한나의 내 인생의 책이 되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이 혈연관계 이야기만 나오는 한국드라마와는 달리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에인랜드가 강조하고 지키려고 하는 가치가 분명 소중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는 태도는 대개의 경우 별로 도움이 안된다. 스포츠 선수나 예술가처럼 이미 어떤 특정분야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나 도움이 많이 될 것이고 보편적인 삶의 자세로서 수용했다가는 터무니없이 나쁜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슈퍼크래쉬의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190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 부르크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던 에인랜드는 이 책을 1943년에 썼다. 그의 아버지는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에 의해 전재산을 몰수당한 사람이었고 에인 랜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미국의 개인주의에 매료되어 1926년에 미국으로 간다. 다시 말해 에인 랜드는 낡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구도가 생기던 초기에 살았으며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 시작할 때 미국에 살았다. 에인 랜드의 메세지는 지금 보면 매우 치우친 것이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미국의 장점을 말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하기에 적당한 것이었다. 

 

에인 랜드는 개인의 가치를 지나치게 절대시한 나머지 한 개인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한다. 위대한 음악의 가장 절정에 해당하는 어떤 하나의 소절이나 음표도 결국 다른 부분이 있기에 위대해 질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사회의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떤 하나의 인간이 어떻게 모든 상식과 언어를 혼자서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누구나 그를 둘러싼 세상이 주는 선입견과 편견에 물들어 있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대망상인데 에인랜드는 좀 그런 면이 있다. 어떤 인간은 세상을 한번 보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라는 것에 대해 어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보며 그것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표현된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자신이 변화하고 흔들린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런 모습을 가진 인간은 제대로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종국에는 모든 인간을 하찮고 무가치한 존재로 비하하게 될 뿐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 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순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자기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우리는 결국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존재일 뿐이야. 완벽하지 못한게 당연하지.'라고 말하는 것을 체념이나 변명으로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옳다. 계속 내가 못하는게 당연하지라고 말하다보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변명은 필요없어, 완벽하지 못한 것은 존재해서도 안되고 존재할 값어치도 없어라는 믿음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인간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을 것이며 결국 자기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저 일중독자의 윤리이며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이상적 노동자의 윤리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단 하나의 파괴되지 않는 인간인 하워드 로크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일 뿐이며 대부분의 인간은 완벽을 절대시하다가 자기 파괴나 하워드 로크에 대한 사랑에 빠지는 소설속의 다른 인간들이 되고 만다. 에인랜드는 히틀러나 레닌을 미워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추종자와 매우 닮아 있었다. 

 

이렇게 파운틴 헤드는 시대에 뒤진 책이고 극단적인 책이며 재미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나면 별로 미덕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이 파운틴 헤드를 단순하게 시대에 뒤진 책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들이 자식을 국제중학교에 넣으니까 나도 따라서 넣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던가 남들이 투기를 하면 나도 투기를 하는 인간들이 버글거리는 사회에서는 그럴 자격이 없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사회가 과연 자격이 있을까?

 

현대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그런 것처럼 한계와 모순을 가진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건 우리는 아직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 시스템의 기초적 가정중의 하나가 인간의 독립적 자아다. 사람들이 그저 몰려다니면서 파벌을 만들어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고 표를 돈에 파는 식의 관습이 존재한다면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가 없다. 빵만드는 법을 제빵사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빵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괴상한 일이 벌어진다.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분야가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시대다. 그렇지 못하고 그저 기계적으로 일하는 분야는 대부분 자동화를 통해 기계의 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일 수록 자기의 무지를 인식하고 자제하는 모습과 높은 식견을 가지고 규칙을 지키는 모습이 필요하다. 교통신호따위 지키지 않는 운전사로 가득찬 나라에서는 결국 좋은 차는 길을 다닐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는 백종원과 황교익의 설탕 논란에 대해 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황교익은 나는 백종원을 만난적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유감도 없으며 백종원은 사업가로서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자신은 평론가로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인터뷰하는 기자는 황교익과 백종원이 만나서 화해를 하면 안되겠냐는 식의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대립을 개인적인 호불호의 문제로 해석하는 자세다. 언론의 수준이 이 모양이면 음식이 문화가 되기도 어렵고 평론이란 게 의미를 가지기도 어렵다. 한마디로 전문가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섬세하게 만든 요리에 고추가루 설탕 마구 퍼넣는 손님들만 세상에 있다면 섬세한 요리따위는 의미가 없다. 

 

파운틴해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예들을 볼 때 역시 에인 랜드가 옳아라고 말하기 쉬울 것이다. 날파리들은 세상에서 침묵시켜야 해 하고 말하기 쉬울 것이다. 파운틴헤드를 읽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에는 정치적으로 에인 랜드의 추종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과학발전을 위한 기금을 어떻게 써야 할까를 생각하면 노벨상 수상자들을 불러오는데 돈을 다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이다. 동시에 노벨상을 배출하고 싶다는 나라에 있는 서울대같은 큰 대학이 학생들이나 연구자가 쓰는 저널구독같은 것을 줄이기도 하고 말이다. 누가 중요한가. 결국 하워드 로크라고 생각되는 몇명이면 나머지 모든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몇명이 정말 하워드 로크라고 생각하는 것도 대단한 착각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추천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고민스러웠지만 결국은 독후감을 쓰기로 했다. 약점과 강점이 분명한 책이고 위험한 책이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책이고 그 위험은 독자 자신이 감수해야할 부분일 것이다. 게다가 혼란이 없으면 발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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