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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4. 5.

2016.4.15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히브리대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는 유발 하라리는 2011년에 사피엔스를 히브리어로 출간했다. 히브리어를 쓰는 이스라엘의 인구가 8백만정도라서 그 도서시장이 클 수가 없다는 것과 이 책은 정말 방대한 주제를 아주 많은 자료조사를 통해 다룬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사실 이 책은 그후 30개국에서 번역출판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피엔스는 한글판이 6백페이지나 되는 책이며 그 주제는 더욱 야심찬 것이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 전부에다가 그 미래까지 언급한다. 더구나 하라리는 그저 널리 알려진 인류의 익숙한 역사를 대강 대강 언급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치열하게 인류의 역사에 대한 대중적 상식을 깨기 위해 노력하며 23페이지에 이르는 참고문헌들을 언급해가며 각각의 주제에 대한 최신의 이론들을 소개하고 비교하며 그것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은 흥미로운 역사적 과학적 사실들과 일화들로 가득 차 있어서 아주 재미가 있다. 그래서 두꺼운 책이 두껍게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이런 종류의 책은 즐거움만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뭐가 남으며 그 많은 사실들을 통해서 저자는 뭘 이야기하는가하는 부분이 이런 책의 진정한 가치와 연결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뭘까? 유발 하라리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총균쇠와 사피엔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총균쇠는 역사의 진행에 대해 이론을 제시하고 답을 준다. 다시 말해 복잡해 보이기만 하는 역사의 진행방향들이 어떻게 총균쇠라는 핵심적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어져 왔는가를 말하는 책이다. 

 

사피엔스는 주로 이론들을 폐기하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가 아니면 대부분 착각이라고 가르친다. 역사학자는 결코 미래를 예측하는 이론을 제시할 수 없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불완전하다. 예를 들어 그 시대를 제일 잘 아는 당세의 사람들에게 가까운 미래는 매우 불확실하다. 현재를 사는 우리의 미래만 해도 몇십년후면 천국같을 것같기도하고 지옥같을 것같기도 하다. 그러나 몇십년이 지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 왜 역사가 그렇게 흘렀는지 아주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망각을 통해 더 모르게 되었는데도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과거의 역사가 왜 이리저리 흐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분명하고 간결한 이론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시대의 역사가 왜 하필 그렇게 흘렀는지 더더욱 알 수 없어진다. 우리는 사피엔스의 성공이나 기독교의 성공을 보면서 사피엔스나 기독교가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어서 성공했다는 설명을 만들어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즉 성공의 필연적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피엔스는 어쩌면 네안데르탈인에게 멸종당할 수도 있었고 기독교는 몇몇 사람들의 몽상으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그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뭘 위해 공부하는가? 하라리는 역사는 우리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러저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인류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기 쉽지만 실은 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피엔스는 그 사촌들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실제로 과거에는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하는 6개의 다른 인류가 사피엔스와 한동안 이 지구상에 공존한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혹시 그것은 인간이 그들의 생존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인간에 대해 뭔가를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인가 아니면 앞으로는 다를 수도 있는 과거일 뿐인가. 

 

하라리는 역사라는 주제를 통해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게 아니라는 설명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 나가고 그것들은 때로 사람들의 윤리적 금기를 건드린다. 예를 들어 인종간에 유전적 차이가 존재한다거나 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동물의 유전자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금기중의 금기다. 그러나 최신 결과를 통해 실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인류의 유전자안에서 발견되었다같은 것을 지적한다. 또 제국주의는 잔혹한 것이라는 것이 대중적 상식인데도 제국주의가 단순히 나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선악의 구분은 어려운 것이며 제국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실은 더 오래된 제국의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하라리는 우리가 통상 위대한 진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농업혁명도 실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렵채집의 시대때 보다 더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이런 사실들을 통해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하라리에 대해 어떤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면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다. 유발 하라리는 단지 우리의 무지를 자각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소중하다는 메세지를 반복하려고 하다보니까 자꾸 우리의 상식을 건드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위에서 언급한 말들도 등장하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어떤 한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하라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무지를 자각하는 것 혹은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사피엔스가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하라리가 인지혁명과 과학혁명이라고 불렀던 사건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예증된다. 7만년전에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피엔스가 더 큰 무리를 협동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침팬지는 타고난 본능에 따라 20에서 50마리 정도의 개체들이 한 무리를 이루며 서로를 직접 대면하는 사회 생활을 한다. 본능에 따른 생활이라는 것은 침팬지의 사고 혹은 인식내용이라는 것이 굉장히 원초적이고 기초적인 것 뿐이라는 뜻이다. 즉 실재로 존재하는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는 그와 전혀 다르다. 인간은 서로가 뭘 믿는가를 사고하고 인식한다. 그래서 서로의 믿음은 하나의 실체가 되고 그러다보면 상상의 체계가 하나의 실체가 된다. 이것이 인지혁명이고 그 핵심은 언어의 발달이다. 

 

인간이 상상의 체계를 실체로 믿는 극명한 예는 푸조나 삼성같은 법인이라던가 제국 혹은 돈같은 것들이다. 축구같은 게임이나 신같은 존재도 이 예에 든다. 그런 것들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적어도 무게를 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일단 그것들을 믿으면 그것들은 서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협동하고 공존할 수 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외국에 처음 나가서 한국 사람을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도 이것을 느낀다. 비록 한국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도 한국사람이라고 하면 왠지 믿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이라는 개념은 한국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파악하는 사람들을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로 묶는 힘이 있다. 

 

고대의 인간들도 어떤 상상의 개념을 통해서 통상 직접적인 대면만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집단보다 훨씬 더 큰 집단이 협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프리카의 한구석에 있던 사피엔스가 전세계를 무섭게 채워나가고 먹이사슬의 맨 위로 단숨에 뛰어오른 비밀이다. 구술언어의 한계는 문자의 발명으로 극복되고 인간은 마침내 제국을 건설할 힘을 가지게 된다. 

 

상상의 체계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어떤 체계가 가능할까라는 넓은 신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무지의 자각이기도 하다. 이제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그 신세계로 나아가 더 더 근사한 것을 구축할 수 있고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의 힘이 될 것이다.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의 차이는 너의 마음이라는 신세계에 대해 그들이 관심을 가졌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차이뿐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과학혁명이래의 세계역사도 무지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얼마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 승리하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라리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제국과 돈의 문제와 깊이 연관시킨다. 그것은 단순히 소수의 사람들이 과학에 흥미를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 사회전체가 과학에 돈을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850년 이전만 해도 실은 아랍이나 중국쪽이 더 문화적 기술적으로 앞서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서구는 하나의 제국이 되어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는가. 왜 과학혁명은 유럽에서 일어났는가. 그 시대의 아랍이나 중국은 이제 이 세상에는 발견할 진리가 더 없으며 자신들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학발전이란 현실적으로는 결국 돈과 정치의 문제다. 특정한 발전을 후원할 사람이 있어야 그 방면으로 발전이 일어난다. 중국의 정화는 콜럼버스의 선단을 애들 장난으로 생각하게 만들만큼의 대단한 선단을 가졌었고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도 발견했지만 중국인들은 이미 자신들이 이 세상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즉 먼 곳에 있는 새로운 대륙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무슨 큰 득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발전에 대한 선입견은 신세계에 대한 관심을 축소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도 그것에 대해 뭘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화의 선단을 해체해 버린다. 

 

그러나 서구는 달랐다. 서구는 일찌기 성장과 더 많은 지식이 더 큰 권력이 된다는 발상에 빠져 있었다. 이 차이가 결국 유럽이 세계를 재패하는 제국으로 자라나서 지금 전세계가 실질적으로 유럽문화에 의해 주도되게 상황을 만들었다. 유럽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며 그 무지를 더 많은 관찰과 이론화를 통해 메꿀 수 있고 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과학혁명의 본질이다. 과학과 제국주의 그리고 탐험의 시대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도, 심지어 한글같이 뛰어난 문자를 만들어도 그걸 가지고 지식을 널리 퍼뜨리며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무지를 자각하는 능력이다. 

 

하라리는 왜 무지를 그렇게도 강조할까? 적어도 이 책안에서 그가 그렇게 하는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당연한 것이란 없다, 역사는 반드시 그렇게 흐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배우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역할에 대해, 현재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때문이다.

 

경제학적, 사회학적 이론 혹은 역사에 대한 이론은 어떤 의미로 우리의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 세계는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여 갈뿐이며 따라서 미래는 어떤 의미로 우리의 선택과 무관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멜더스의 인구론이나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 혁명이론등은 사회나 역사는 이러저러하게 흐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들에서는 적어도 어떤 노력들은 무의미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와줘도 생활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며 역사가 공산사회로 흘러가는 것에 역행하는 것은 무의미한 노력이다. 

 

따라서 이런 이론들을 해체하는 것은 거꾸로 우리의 선택이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하라리는 인간강화나 개조가 일어날 수 있는 현대를 보라고 말한다. 미래는 우리의 예측과는 다를 것이지만 인간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측이 아니라 현대인이 그런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가 여자로 변할 수 있는 수술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변하도록 수술을 받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던질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더 큰 능력은 더 많은 윤리적 가치적 질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더 큰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며 역사와 사회의 변화는 결코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하라리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하라리는 우리가 우리의 욕망 자체를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신에게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한다. 사피엔스라는 책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마지막 사피엔스인지도 모른다. 인지혁명 이후의 사피엔스는 이전의 사피엔스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유전공학과 인공지능기술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전혀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뭘 원하게 될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적어도 두가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농업혁명은 인간을 반드시 더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하라리를 포함해서 인간은 아직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역사를 바라 볼때도 우리는 행복의 관점에서 바라본 적은 별로 없다고 하라리는 지적한다. 그저 객관적 물질적 수치로만 본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뭘 선택하건 우리는 행복의 관점이란 걸 기억하면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아파트 평수가 30평에서 70평이 되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가 그걸 위해 어떤 댓가를 치뤄야 하며 인간성의 어떤 부분이 포기되고 교체되는가를 생각해야 하며 결국에는 우리가 더 행복해 질까에 대해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나머지 하나는 물론 미래가 법칙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선택의 결과라는 점이다. 지구는 이미 굉장히 이상한 곳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이 먹고 사는 가축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은 멸종했거나 그 수가 급감해서 실질적으로 인간은 지구를 인간과 소, 돼지, 닭으로 채워버렸다. 가축들은 마치 생명체가 아닌 것처럼 키워진다. 그것은 마치 단백질 공장같다. 우리는 이것이 자랑스러운가? 50년뒤 인간이 만들 세계는 얼마나 이상할까? 우리는 세계가 그렇게 된 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때문이라던가 어떤 경제적 사회적 법칙때문이라고 변명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특히 인간이 이토록 대단한 능력을 가지게 된 시대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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