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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과학한다는 것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11. 27.

15.11.27

피셔는 수학과 물리학을 퀼른대학에서 공부하고 칼텍에서 생물학으로 박사를 받았으나 과학사를 가지고 교수자격시험에 통과한 독일인 교수다. 그의 지적 이력이 보여주듯이 그는 단순히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연구를 수행했던 과학자로서 과학을 논한다.

 

 

과학한다는 것이라는 책은 현대의 과학이 놓여진 위치를 재점검하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새로워져야 하는지 혹은 새로운 학문으로 대체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책이다. 피셔는 그 과정에서 이 책이 만들어지게 된 기본적 동기가 된 질문에도 답한다. 그것은 왜 현대인들은 교양에 있어서 자연과학을 인문학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공부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다. 

 

과학을 논하는 것은 과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이 놓여진 자리, 문맥을 살피는 작업이 되므로 메타과학 즉 철학의 영역에 있게 된다. 피셔가 말하는 요지중의 하나는 오늘날의 과학이 가지는 문제는 과학이 더이상 ‘원리적인 통일성을 드러내기 그리고 관조의 대상이 되기’를 멈췄다는 것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철학에서 자라나온 과학은 이제 철학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물론 철학을 포함한 많은 말들이 현대 사회에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말만을 가지고 피셔가 말하는 것을 미리 단정해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아래에서 계속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들과 함께 이해되어져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피셔는 과학과 예술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퍼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나 월슨의 통섭같은 책을 떠올리게 한다. 퍼시그는 그의 책에서 세계를 분석적 측면과 낭만적 측면으로 분리하는 것이 현대의 질병이 되었다고 인식하고 퀄리티라는 일원론적인 존재로 통합해서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질병은 고쳐질 수 있다고 말한다. 월슨은 통섭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말하고 있지만 과학적 분야가 인문학을 흡수합병하는 식으로 그것을 묘사했기 때문에 많은 비판에 처했다.

 

이 '과학한다는 것'이라는 책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나 통섭보다 어떤 면에서는 못하고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나다. 이 책은 과학적 발전의 역사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보다 더 뛰어나지만 흥미진진하게 그것을 개인적 드라마로 절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못한 것같다. 이 책은 통섭보다 더 수긍할 수 있는 철학적 관점을 제시하지만 아무래도 세부적 과학묘사에는 통섭쪽이 더 뛰어난 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인지과학과 뇌과학분야는 분량상 생략하기도 했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형이상학과 과학적 지식의 양쪽을 모두 겸비했다는 것이다.

 

피셔는 인식의 과정에 있어서 개념이전의 것인 표상을 내세우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이 퍼시그의 퀄리티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같은 역할을 한다. 즉 표상이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예술과 과학은 서로 다르지 않으며 과학이 예술에 영감을 줄 수도 있고 예술이 과학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피셔는 월슨도 도달하려고 했던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이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점에서 말했을 때 현대인이 가져야 하는 교양이 뭔가가 질문된다면 자연과학은 반드시 포함되어져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 책이 풀려고 하는 문제는 말하자면 20세기의 유명한 난제다. 나는 이미 이 문제를 공격한 두권의 책을 거론했다. 그 시초를 보면 적어도 현대과학이 발달을 시작하던 시기에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이며 철학자 듀이도 철학의 재구성을 논했고 피셔도 이 책안에서 몇명인가의 다른 저자들이 같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논한다. 이 문제는 단순히 유명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점점 더 강해지는 과학문명속에서 윤리적으로 압살당하고 마는 현대인이 겪는 문제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과학문명의 힘을 느낀다. 그리고 가장 흔한 대응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 과학적인 시대에 과학으로부터 도망치고 그것은 그렇게 가치있는 일이 아니라고 폄하한다. 과학은 사람이 꼭 알아야 할 교양의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핵개발과 심장이식수술부터 시험관 아기와 유전공학적 발전까지의 예들에서 나타나듯이 과학으로부터 대중이 도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훨씬 더 커진다. 그것은 마치 사용법이 복잡하다고 사용법을 읽지 않고 흉기를 작동시키는 것과 같다. 대중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은 정치적 압력으로 작동해서 과학정책을 결정하기때문에 대중이 과학에서 도망가는 현실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것이다. 인류는 스스로를 멸망시키기에 충분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시대에 뒤진 샤머니즘적인 윤리감성으로 작동시킨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대중이 지지한 원숭이 같은 정치가가 핵무기의 스위치를 눌러버리거나 인터넷망을 파괴해 버리지 않을까? 그렇다고 과학자는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주는가? 이와같은 현실을 대중의 책임으로 돌리기보다는 현대의 과학이 가진 근본적 한계로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

 

과학과 인문학이 융합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과학은 새로운 과학으로 발전하거나 새로운 학문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그럴때 우리는 더 바람직한 세상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있다고 피셔는 말한다.피셔는 거듭해서 세상을 보는 창으로서의 과학을 말한다. 그것은 예술과도 같은 역할을 하며 그 핵심은 개념이전의 이미지인 표상인데 이것은 반드시 수학이 아니라 예술적 방법을 통해서도 전달 될 수 있을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과학의 근원적 가치는 생활의 편의나 자연의 정복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넓히는데 있다는 것이다. 피셔는 진화를 논하는 곳에서 인식의 확장이란 심지어 진화의 목표라고 생각될수도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몸통부분을 이루는 내용들은 여러가지 과학이론이 어떻게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예들에서 거듭나타는 것은 상보성과 상호작용이다. 세상에는 하나의 객관적 시각이 있는게 아니라 다수의 시각이 있다. 그 시각은 상호공존이 불가능하면서도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이것은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며 다른 어떤 것보다 20세기 과학들이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을 보자. 양자역학은 하나의 이론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그 안에 고전역학에서는 동시에 수용할 수 없는 두가지 측면을 같이 포함한다. 즉 배중률이 깨진다. 전자나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진리는 상호 모순되지 않는 단 하나의 말로 표현되지 못한다.

 

현재의 과학과 새로운 과학의 차이는 그 과학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질뿐만 아니라 인간을 바꾸는 과학이라는 점에 있다. 인간과 과학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속에서 서로를 만들어 간다. 새로운 과학은 이 점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과학이다. 이 말은 좀 무시무시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편견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질뿐만 아니라 인간을 바꾼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반감이 없다. 우리가 다른 예술가가 만들어 낸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 예술가가 느낀 감정 혹은 표상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우리를 바꾼다. 뭔가를 인식하고 느끼는 것은 적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즉 우리를 바꾸는 행동인 것이다.

 

이같은 설명은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간은 예술활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바꿔왔다. 록큰롤 음악은 어떤 사람에게는 신나는 음악이고 예술이지만 수렵생활을 하는 원주민에게는 고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의 미적감각은 문화적 경험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과학적 설명의 만족도는 어떨까? 우리가 어떤 과학이론을 만족한 것으로 여기는 궁극의 판단기준이 과학이론이 보여주는 설명이 우리의 내적 표상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대한 미적인 만족감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내적 표상과 인식의 범위가 우리의 과학활동에 의해 변한다고 한다면 성공적인 과학이론은 마치 진화의 결과같은 것일 것이다. 즉 절대적인 만족을 주는 결과는 없고 모든 결과들은 많은 우연들이 모여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이것은 오해하기 쉽고 기괴하게 들리지만 우리의 과학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과학이며 인간은 우연을 포함하는 진화과정의 결과물이라는 설명에 모두 동의한다면 그렇게 이상한 말은 아니다.

 

새로운 과학이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술과 구분되지 않는 과학이다. 현재의 우리는 과학에 대해 객관성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뉴튼의 역학은 그냥 역학이고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그냥 상대성이론이다. 이것은 모짜르트의 음악이 모짜르트라는 개인의 특징을 가진 창조물이라는 것, 그래서 그가 느끼고 본 표상의 표현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과학의 주관성, 과학의 개인성이 부정되는 것은 물론 객관적 측면의 강조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과학의 의미를 대부분 망각하게 만든다. 이런 태도는 과학이 성취된 과정을 망각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아마존 부족의 종교를 목격한다면 그것은 아마존 부족의 특징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과학은 그런게 아니며 개성과 만들어지는 과정을 무시해도 좋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개 이런 종류의 확신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우리는 객관화로 과학의 의미를 오히려 감소시킨다. 우리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바하를 존경할 수 있다. 절대적 음악을 존경하는게 아니라 바하의 개성과 성취를 사랑한다. 과학적 이론이 완전히 몰개성적이며 시대를 초월해서 변화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이다. 따라서 교양공부를 할 때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가치있게 느끼지만 과학이론은 평범한 한 인간에게는 별로 가치있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의 피땀어린 노력과 열정의 결과로 보는 사람이 훨씬 적다. 그래서 고전역학의 발견자인 뉴튼 같은 과학자도 그저 하나뿐인 것을 발견했을 뿐인 행운아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새로운 과학이란 모짜르트의 음악처럼 그 과학적 이론을 만든 과학자와 교감하게 만들어 주는 과학이며 그런 대화를 통해 우리의 인간성을 고양하는 과학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려워도 공부할만한 것이 된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런 개념은 낯설지만 실은 19세기까지만 해도 과학은 응당 이래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과학이 아직도 철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시대다. 그것은 전문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유실되었다. 

 

모짜르트 음악을 듣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바꾼다. 이 점은 확률통계나 뉴튼 역학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틀속에서 우리는 전에라면 그저 원래 그런 것으로 생각했을 많은 것들을 설명이 가능한 것, 상호 관련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뉴튼은 엄청나게 많은 유령을 없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수학과 자연과학을 그저 도구로만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의 내면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인간의 일부지만 과학은 낯선 이물질로 여긴다. 그러면서 의식하지도 못한 채 징크스나 미신같이 ‘원래 그런 것들’에 매달린다

 

양자역학의 예는 새로운 과학에 대한 생각이 단순히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과학발전에 필수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람들이 고전적인 과학만을 과학이라고 고집했으면 양자역학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학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현대의 생명과학을 넘어서는 생명과학은 나타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곧잘 유전자가 곧 생명의 핵심이라는 말에 빠진다. 그래서 유전자라는 분자조각이 생명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는 스스로 질문한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인가 죽어있는 것인가. 유전자는 살아있는 것일까? 예술가들은 종종 과학자들이 생명을 파괴한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정말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운가? 이것이 생명을 파악하는 올바른 방법일까? 피드백을 포함하는 현대과학의 특징은 아직 그런 특징을 가지지 못한 것들도 사실은 그런 것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통과 인식의 확장이 과학의 근본가치일 때 현재의 과학형태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아주 소수의 과학자들만이 상아탑안에서 과학을 이해하고 많은 대중들은 물론 심지어 스스로를 과학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생각할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일을 주어진 메뉴얼대로 할 뿐 과학이 가진 근원적 표상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대중이 문자를 배우기 시작하던 시대에 소수의 사람들이 쓰고 읽기를 독점한 상태나 마찬가지 아닐까? 라틴어나 한문이 아니라 쓰기 쉬운 글자들이 책의 대중화를 도왔듯이 과학도 이런 차원에서 대중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피셔가 말하는 예술로서의 과학이다. 예술로 소통되고 예술로 발전도 하는 과학이다.

 

피셔는 스스로 이것이 쉽지 않은 작업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책을 천천히 읽어보면 이러한 작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앞에서 거론한 윤리적 문제만을 생각해봐도 알 수있다. 대중이 집단적으로 점점 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변한다면 과학문명은 자살하는 문명이 될 것이다. 새로운 과학이 뭔지는 피셔도 다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소통을 위한 과학이며 단순히 한가지 객관적 이론이기보다 여러가지 상황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넓혀가도록 설계된 과학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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