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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17. 7. 14.

17.7.14

새로운 책,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 출간되었다. 나는 글쓴이인 동시에 첫번째 독자로서 그 이야기를 다시 읽었는데 새삼 느끼게 된 것이 있다. 그 책은 기본적으로 한가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책은 이 질문을 간접적으로 다룰 뿐이고 나는 아래에서 내가 왜 그랬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그 질문에 보다 직접적으로 답해 볼까 한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자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인생을 포함한 모든 것의 의미나 가치가 어떻게 해서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되는가 하는 인식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의미를 그것이 놓여진 문맥속에서 혹은 그것이 놓여진 세계 속의 위치에서 발견한다. 어떤 것이 진공속에서 홀로 존재할 때 그것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 못해 이 세상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라도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대상이 가지는 의미는 홀로 정의될 수 없으며 언제나 그것과 그 주변의 것이 가지는 관계속에서 발견된다. 그 관계가 다르면 그것의 가치나 의미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한 잔의 물은 사막에서는 매우 귀한 것이고 식사후 식탁을 치워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져다 수채구멍에 버려야 할 귀찮은 물건이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옆에서는 그림을 망쳐버릴 수도 있는 흉기가 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인식해야 우리 인생의 의미를,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의 의미를,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탁자위에 놓여진 물 컵을 단순히 보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작고 유한하며 세상은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개미의 세상 인식은 세상이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이상으로 개미의 한계에 의해서 더 많이 결정된다는 것에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개미는 스스로의 한계때문에 은행대출이나 운전면허증 혹은 중력의 법칙이나 양자역학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종종 개미와는 다르게 인간은 세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본다고 말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경험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움직이지 않는 팔이 퇴화하듯이 우리가 설사 뭔가를 알았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그저 고정된 것, 당연한 것으로 인식할 때 그것은 점점 우리의 인식 영역 바깥으로 사라진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에서 그 부분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에 대한 연구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보거나 듣는 일조차도 '그저 단순히'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즉각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시각에는 맹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즉 안구와 뇌사이에는 피와 신경신호가 드나들기 위한 통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망막에는 빛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그러니까 신호만으로 판단할 때 우리가 보는 세상에는 검은 구멍이 뚫려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구멍은 우리의 뇌가 만드는 가짜 신호로 메꿔지고 우리는 그런 구멍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성대뿐만 아니라 심장근육을 포함한 우리 몸안 여러부분들이 몸바깥의 음원들보다 고막에서 더 가까운 곳에서 여러가지 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이 소리들 때문에 방해받아서 외부의 소리를 못듣게 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청각의 민감성이 적절하게 조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전체적 인식은 단일한 감각보다 더 복잡한 문제다. 이것을 완벽히 해내기에는 우리는 모두 너무 바쁘고 너무 게으르다. 유한한 자원과 시간을 가진 우리는 이 세상을 전부 볼 수가 없다. 세상을 모두 경험할 수가 없다. 세상을 모두 기억할 수가 없다. 우리는 물론 문자같은 발명품과 추상적 개념에 의존해서 우리의 능력을 증폭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자꾸 어떤 것을 당연한 것, 고정된 것으로 기억하고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작아진다. 마치 낡아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집과 같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도 계속해서 수리해 주지 않는다면 점점 붕괴하고 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어린 시절만 해도, 변할 수 없는 사실로서 거기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계속해서 다듬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기억은 점점 조각이 나서 연결되지 않는 부분들로 나뉘어 지고 결국에는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변해서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긋지긋했던 것을 그리워하게도 되고 그렇게 좋아했던 것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도 되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 보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망각하고 왜곡하고 그렇게 왜곡된 과거의 조각들을 서로 끼워맞추면서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 낸다. 스스로의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세상이 주는 선입견이나 선전에 따라가게 된다. 세상이 우리를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말하면, 우리는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따라서 우리의 어린 시절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변하는 식이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우리를 부러워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똥도 호기롭게 먹기 쉽다. 

 

우리는 지나치게 객관적 세계라는 관념에 중독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정리하는 일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가 살아온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구성하는 것들은 우리의 행동에 무관하게 그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와서 뭘 하건 내 어린 시절은 그저 과학적 사실로 저기에 존재하며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과학적인 문맥속에서는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의미와 가치가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 보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어린 시절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 의해서 창조되고 있다. 세계적인 유명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그런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달랐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사람이 이미 성인이 된 이후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던가 혹은 그저 운이 없었다면 그나 그녀는 그다지 성공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이 가지는 의미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순간 당신이 한 줄의 글을 읽는 것이 당신의 어린 시절을 바꾸고 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객관적 세계의 신봉자인 당신은 물론 진짜 어린 시절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르며 그것만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사실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진짜 어린 시절이라는 관념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허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알아야 존재하는 그런 허구 말이다. 당신이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고 진짜라는 사실은 자신의 무지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믿는 허구다. 우리는 우리의 진짜 어린 시절따위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영원히 알수가 없다. 관계를 맺어서 이야기가 되고 하나의 관념이 되지 못한 사실들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 결코 포용되지 못한다. 어렸던 당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중에서 아직도 당신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들은 결코 진짜 어린 시절같은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철학이란 세상을 인식하고 사물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철학자라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하는 전문가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잘하건 못하건 해야만 하는 생명의 유지 과정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일을 하고 성장한다. 하지만 성장을 말하기 이전에 우리는 일단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어제보다 1mm도 성장하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그저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숨을 쉬고 음식을 먹어야 한다. 날마다 몸도 씻고 외모도 정리해야 한다. 집도 청소하고 옷도 빨아야 하며 사회적으로 내가 선택한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성장 이전에 생존과 현상유지를 위한 것이다. 생명이란 생체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말해지는 동적평형을 유지하고자 즉 자신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자 꾸준히 일해야만 하는 존재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어도 존재할 수 있는 바위가 아니다. 손발이 바쁘다고 불평해봐야 사실 진짜 바쁜 것은 우리가 잘 때도 움직이는 심장이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직장을 잃고, 가족은 붕괴하며 친구도 잃을 것이다. 버둥거림을 멈춘 것은 이미 죽어있다. 

 

몸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그렇다. 애초에 생각과 몸이라는게 두 개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보수하고 유지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의미에서의 철학이란 건축과 닮아있다. 우리는 열심히 집을 지어서 집을 늘리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끊임없이 무너져가는 집을 두루 보수하고 유지해야 한다. 집짓기가 직업이 아닌 사람이라면 너무 큰 집은 관리하기가 힘들어서 나름의 문제가 있지만 관리를 하지 않고 방치해 놓으면 정신의 집은 조금씩 무너지고 작아지거나 한쪽만 기괴하게 확장된 형태가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점점 작아지거나 우리의 시각이 남들과는 지나치게 다른 기괴한 것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만큼 사물이 가지는 의미, 우리의 삶이 가지는 의미도 줄어든다. 모든 변화를 제거한 삶이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것은 이때문이다. 

 

철학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무너지고 훼손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게으름때문에 혹은 일상의 바쁨때문에 사물을 그저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당연한 것, 원래 그런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된 것은 차츰 흐려져 사라져 버리고 만다. 우리는 때로 자기의 건강이라던가 배우자라던가 꿈같은 아주 소중한 것도 잊어버린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세지들을 단순히 반복한다. 우리는 미워해야 하는 사람에게 환호하고 사랑해 줘야 마땅한 사람에게 침을 뱉기도 한다. 

 

정신의 집이란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정체성이고 우리가 존재하는 핵심적 이유이기 때문에 자기의 집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짓고 수리해야 한다. 설사 장대한 건축물이 된다고 해도 그것을 전부 남이 지어준다면 의미가 없다. 설사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 정신의 집을 잘 지어준다고 해도 나는 결국 제대로 그걸 유지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집에 휘둘리게 되거나 그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 전공인 사람들을 포함해서 여러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건축자재나 인테리어 재료를 파는 사람, 집짓는 일에 고용되고는 하는 일꾼들과 같다. 우리가 집짓기가 전문인 사람을 고용해서 집을 수리하듯이 우리는 그들로 부터 집수리나 확장에 필요한 재료를 사들인다. 업자도 여러가지다. 어떤 사람은 원재료만 산더미처럼 공급한다.  어떤 사람은 엉터리로 남의 집을 맘대로 고쳐놓고는 많은 댓가를 요구하고 알아서 거기서 살라고 한다. 하지만 집의 전체적 배치에 대한 고민이나 그 집에서 살 사람의 개인적 특성에 대한 고려없이는 때로 엄청난 양의 원자재도 장대한 디자인의 집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 때가 있다. 

 

물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시간도 에너지도 유한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이 무한하다고 믿는 사람은 화장실만 거대하게 짓다가 자신의 시간을 다쓴 사람처럼 될 수 있다. 그는 완벽한 집을 완성하고 거기에 살려고 꿈을 꾸면서 일단 화장실짓기를 시작했는데 완벽한 화장실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서 결국 화장실만 짓다가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화장실이라도 완성된 화장실이 완벽하다고 과신하는 사람도 바보지만 일단 완벽하게 화장실을 짓고 나면 다른 것을 지을 수 있는 때가 올거라고 믿는 사람은 바보다. 우리는 일단 어설프게라도 살 수 있는 집을 지어놓고 그것을 계속 다듬어갈 수밖에 없다. 

 

책,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은 정답을 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이 이야기들은 애초에 태생이 그렇다. 스스로를 둘러보고 스스로와 대화하는 중에 자연스레 자라나온 것이다. 나 자신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랄까? 그러다보니 이게 정답이야라고 말하는 시스템을 제공하기 보다는 이건 좀 좁은 것같고, 여기는 좀 흉한 것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식이다. 

 

나는 스스로의 글에 대한 독자이기도 하다. 철학을 하지 않는 닭같은 이야기를 통해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과거의 나와 대화를 한다. 나는 나의 나의 이런 생각들이 즐거웠고 유용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중에도 이런 대화들이 유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쁠 것이다. 그것은 조금 더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가까워지게 만들어 주고 내가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남겼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책도 영원하지는 않지만 책은 사람보다는 훨씬 더 잘 독자를 기다려 줄 수 있다. 이 책이 좋은 참을 성을 가지고 적당한 인연을 만나 마침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던 사람과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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