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해 온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너는 친일파인가 빨갱이인가
지금 이순간에도 이 질문의 힘은 다 없어졌다고 할 수가 없다. 지난 10년간 종북이라는 말이 좌파라는 말 이상으로 유행했는데 이것은 빨갱이라는 말을 변화시킨 것으로 봐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부가 세습되는 경향이 크다. 다시 말해서 자수성가형 부자들이 많은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최고부자들은 다 세습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과거로 돌아가보면 부자들의 과거에는 대개 친일파로의 연결이 있다.
친일파인가 빨갱이인가 하는 질문은 대한민국의 탄생때부터 있었다. 한반도 분단과 더불어 이땅의 사람들을 억압할 구실이 필요했을 때 다수의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았던 남한은 빨갱이 사냥에 집중했는데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너는 친일파라는 지적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에 이어서 이 억압의 방법을 다시 한번 강하게 사용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일제시대 군인출신인 박정희로서는 친일파 논쟁을 반공논쟁으로 반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면이 있었던 것이다. 빨갱이 사냥을 하는 정부에게 있어서 정부에 반대한다는 것은 곧 빨갱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는 반공을 외치던 박정희가 오히려 남로당출신이었지만 이 사실은 오랬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로 남았다.
지금 한국에서 자유한국당을 지지하는 사람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거의 질문에 아직도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준표나 유승민같은 보수정치인들은 여전히 냉전시대적인 관점을 보이는 말들을 쏟아내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현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중에도 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문제의 중요한 한 부분은 우리나라의 인구구조다. 1960년에는 한국인의 20%정도가 40세 이상이었는데 지금은 반 이상이 40세 이상이다. 고령화사회가 과거에 빠져 살아가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다. 보수정치인들도 결국 지지층의 구미에 맞추다 보니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를 직시해 보면 이 질문의 힘이 한계에 이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일제가 끝난지 60년이 넘었고 빨갱이라는 개념도 한없이 애매해진 요즘 우리나라 사람의 압도적 다수는 친일파도 빨갱이도 될 수가 없다. 친일이라고 잘못말해지는 민족 배신자들이나 일제부역자중에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재벌개혁이나 사학재단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친일파라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장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현재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냥 헌법적 질서를 깨고 있다는 것 뿐이다.
게다가 빨갱이라는 말이 공산주의자라는 뜻이라면 공산국가인 베트남이나 중국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요즘 시대에 빨갱이 잡자는 말이 무슨 뜻인가? 시진핑이 방한 했을 때 그에게 빨갱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던가? 빨갱이 잡기는 냉전구도하에서 시작된 것인데 냉전구도가 무너진 것은 벌써 수십년이 되었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도 벌써 28년전의 일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우리나라는 북한을 제외하고는 중국이나 베트남같은 공산국가와도 잘 지내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념적 이유로 빨갱이 잡기를 계속할 수가 있으며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북한과 싸우면서 일본보다도 더 적대적으로 지낼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가 든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에 빠져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젊은 세대는 도대체 우리가 뭘 가지고 싸우는지, 왜 모든 남자들이 군대를 가야하고 한국이 막대한 군사비를 써야 하는 지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유가 없다. 과거에 빠져서 살아야 한다면 중국과 일본과도 이렇게 지내면 안되는거 아닌가?
하지만 인간은 질문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과거의 질문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질문이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고, 과거의 질문이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질문은 무엇일까?
나도 정확한 답은 모른다. 사실 그 답이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았으며 특정 개인이 그걸 결정한다기 보다는 대중에 의해 그것이 결정될 것이다. 다만 이미 미래로부터의 질문이 될 몇가지 후보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지역이냐 중앙이냐
쇄국이냐 개방이냐
공장경제냐 정보경제냐
지역이냐 중앙이냐
이 질문은 더 이상 지역이 수도권의 식민지 상태에서 유지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 이상 전체국가와 같은 개념을 강조하고 그 대표로서 수도권이 모든 것을 가져서 지방은 그저 수도권 지역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수도권의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으며 균형적이고 합리적으로 국토를 사용하는데 우리는 실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쟁은 단순히 지역과 중앙의 개념을 넘어서 있다. 중앙계획적 일처리의 대표는 태능선수촌식의 사고다. 즉 국가대표를 잘 뽑아서 그들에게 모든 자원을 집중하면 전체 국가가 이득을 본다는 사고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에서 이런 사고는 적어도 무한정 옳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대표로 삼성이나 현대같은 기업을 내세우고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그 기업들을 후원해야 한다는 식의 발상도 마찬가지다. 재벌기업을 지배하는 한국의 재벌가문들이 한국의 대표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보다 평등한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쇄국이냐 개방이냐.
한국은 이미 개방된 국가인 것도 같으면서도 매우 폐쇄된 국가이다. 그런 현실을 만들어 내는 가장 강력한 장벽은 바로 분단현실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지나치게 미국에 예속되고 지역에서 폐쇄적으로 살고 있다. 한국의 고질적 권위주의와 적폐인 구조가 합리화된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인, 일본인, 유럽인들과는 다르다고 말해진다.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얻게 된다면 이런 현실은 바뀔 수 있다. 우리는 북한은 물론 만주와 그 접경지역을 통해서 우리를 내보내고 바깥것을 들여오는 진정한 세계화를 할 기회앞에 있다. 과거로 부터 자유로워질 기회앞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발전의 정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자리가 생기고 경제가 번영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모든 개방은 위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쇄국과 개방에 대한 구체적 방안에 대해 논쟁이 있게 될 것이다.
공장경제냐 정보경제냐
이것은 단순히 한국만의 일이 아니고 온 세계가 정보기술의 발달로 그 산업적 변화를 겪게 되는 시대에 한국이 어떤 곳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될 것이다. 한국은 인터넷 선진국이고 정보산업이 발달된 곳으로 오해되고 있지만 사실 새 시대를 여는 인공지능 기술에서 뒤쳐져 있고, 인터넷 상거래도 불편하며, 아직도 굴뚝 경제에 매여서 미래로 가는 길을 제한당하고 있다. 인공지능기술이 보편화됨에 따라 아주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려고 하는 시대에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한국의 부가 보수적인 재벌기업들에게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더 빨리 미래로 가도 부족한데 과거에 얽매여만 있다. 우리는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 우리는 어떤 교육시스템이 필요한가같은 것도 다 이 논쟁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언론들은 새 질문에 몰두하는 것같다가도 다시 과거의 질문에 빠져든다. 이는 시대는 변했지만 여전히 많은 돈과 권력이 과거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당면한 시대적 과제가 있다면 이 낡은 질문의 족쇄를 깨고 묶여져 있는 우리의 힘을 해방시키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응당 새로운 질문으로 새로운 논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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