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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패배자가 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8. 6. 7.

일과 가정에서 모두 훌룡한 여성이 있다. 말하자면 남편에게는 매력적인 애인이며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인 동시에 회사에서는 능력있는 직원인 그런 사람이다. 이런 여성은 통상 슈퍼맘이라고 불린다. 세상에는 슈퍼맘의 남성판인 슈퍼대디라는 개념도 존재한다. 그것은 매력적인 남성이면서 집안일도 잘하고 직장에서도 성공해서 돈과 명예를 가져오는 남편이다. 


슈퍼맘이나 슈퍼대디라는 개념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해도 괴로워하지 말라고 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즉 그런 사람은 슈퍼맨처럼 세상에 없는 초인이므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괴로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상 여전히 괴로워 한다. 현실은 대개 우리의 기대보다 못하고 그래서 세상에 슈퍼맘, 슈퍼대디는 없다고 자기를 위로해도 여전히 삶에 대한 패배감은 때때로 우리를 눌러온다. 




삶에 대한 기대치는 아무래도 타인과의 비교에서 발생한다. 즉 모두가 스테이크를 먹으면 나도 스테이크를 먹고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보라. 우리는 아무래도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자기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이며 우리의 기대치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외출을 할 때 아무래도 외모에 좀 더 신경을 쓰지 않는가. 남에게 보이는 몸매에 신경을 써서 운동도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는 것같은 다른 사람들이란 사실은 허구다. 그들은 과장하면 안간힘을 다해 멋진 사람인 척하려고 하고 있다. 안힘든척 즐거운 척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이 허구에 빠져서 자기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기 쉽고 자신의 의지약함을 탓하며 인생의 너무 많은 부분을 허비하게 되기 쉽다. 


오늘날에는 미디어의 발달덕분에 타인과의 비교문제가 더 심각하다. 국민들이 모두 재벌이나 왕족만 나오는 드라마만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사실 드라마속에서는 가난한 여자도 매일 예쁜 새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미디어에는 사회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대로 나오지만 아무래도 가장 사치스럽고 가장 성공했고 가장 잘난 사람들이 미디어의 주목을 보다 더 끌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란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미디어속의 사람들로 만들어 진 환각이다. 


우리는 대개 이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환각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나만 해도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군사훈련을 받으러 군에 가서야 학력과 직업, 지역에 상관하지 않고 사람들을 섞어 놓은 작은 세상은 내가 매일 매일 보고 겪는 세상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작은 부분에서 일상에 빠져지내느라 아무래도 환각에 빠져든다. 매일같이 빈민촌에 가는 사람도 거기에 의사나 경찰로 간다면 빈민촌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 결국 세상속 삶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란 상당히 그 근거가 빈약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우리가 패배자가 되는데에는 주변사람과 미디어의 영향으로 기대치가 높아진 것을 제외하고도 적어도 두가지의 이유가 더 있다. 하나는 경쟁에 대한 찬양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발전을 위해서는 경쟁이 필요하며 다양한 사람들과의 경쟁끝에서 발전이 오고 보다 좋은 답이 찾아진다는 생각에 너무 익숙하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상식과 중앙통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가 오히려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경쟁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우리가 우리 주변의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환각에 빠진다고 했는데 이런 자유주의적 혹은 자본주의적 사고에 우리는 너무나 깊게 빠져서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왜 패배자가 되는가? 경쟁하기 때문이다. 경쟁을 하면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경쟁을 좋은 것으로 배우고 경쟁에서 등돌리지 말라고만 배운다. 발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실상 모두가 패자가 된다. 가난할 때는 고기를 한 주에 한번 먹으면 성공한 것같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모두 부자가 되고 그래서 모두가 그정도는 하게되면 기준은 점점 올라간다. 그래서 1인분에 5만원도 넘는 스테이크를 돈이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은 패배의식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그런데도 기준을 점점 올리는 행위는 대개 찬양된다. 경쟁은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학원에 아이를 보내지 않는 부모는 패배감을 느낀다. 아이가 경쟁에서 빠져 나온 것같고 경쟁없이는 우리는 모두 타락하고 퇴보할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슈퍼맘이나 슈퍼대디가 세상에 어디있냐고 말하면서 자신의 패배감을 위로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삶과 경쟁의 기준점을 계속 올려왔기 때문이다. 하나를 해내면 우리는 두개 세개의 일을 해야할 일에 더 한다. 동네 산책이나 하고 일년 한두번 국내 여행가는 것이 고작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일년에 한번 정도는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와야 남부끄럽지 않게 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국내 1등을 달성했다면 이제 세계 1등을 노린다. 우리는 그런 새로운 기준을 위해 뭔가를 포기한다. 


경쟁이 나쁘다던가 좋다던가 아니면 적당한 경쟁이 좋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경쟁과 발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해 지기 위한 수단이고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까 경쟁을 통해서 발전도 하고 행복도 해지며 우리가 보다 만족할 삶을 살게 된다면 경쟁은 실제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통상 이렇게 사고하지 않는다. 그냥 경쟁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타인과 계속 비교한다. 그래서 어느날 뒤를 돌아보면 무의미한 경쟁에 빠져서 삶의 질이 떨어져 왔는데도 경쟁을 계속하는 것같다. 무엇을 위한 경쟁이고 발전이었을까?


우리는 축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도 축구에서 패배했다는 것에 괴로워 하는 것같은 삶을 산다. 그러다가 모든 힘이 빠지고 나서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느 순간 문득 깨닫게 될 수 있다. 아 그게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어 불치병 판정을 받는다던가 회사에서 퇴출된다던가 하는 때가 오면 나는 이제까지 뭘 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지도 모른다. 자식에게 모든 경쟁에서 이기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는데 그 자식이 엉뚱한 곳에서 성공하거나 엉뚱하게 아프기라도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나는 이제까지 뭘 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우리는 삶이란 경쟁이라는 생각에 중독되어 있다. 경쟁에 지지않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 더 나쁜 것은 모두가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중독 현상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패배자가 되는 이유다. 


우리가 패배자가 되는 마지막 이유는 정상적 인간이라는 개념때문이다. 정상적 인간이라는 개념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종종 명절이 되면 친척모임에 가기 싫어한다. 수없이 많은 친척들이 마치 무슨 팔다리가 없는 사람을 말하듯이 나이가 들었는데도 배우자가 없는 그 사람에게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외쳐대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놀리는 것은 하다보면 가학적인 재미도 있는 것이어서 사람들 중에는 과장되게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몸이 정상이 아닌 것이 아닌가라던가 애가 어릴 때부터 좀 이상하기는 했다는 식으로 말한다던가 사실은 무슨 대단한 과거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같은 말을 해대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팔이 두개 여야 정상인 아기가 팔이 하나 밖에 없이 태어난 것처럼 흥분해서는 계속 왜 이러냐고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슈퍼맘이나 슈퍼대디처럼 혹은 꾸미지 않아도 단정한 외모를 유지하는 인간의 개념처럼 정상적 인간이라는 개념도 대개는 세상에 있기 힘든 사람을 말하고 있기 쉽다. 그것은 수백년전의 농경시대로부터 산업화 시대를 거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꾸 확대된 것같다. 예를 들어 사람은 특정한 연령이 되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진다는 개념은 단순 노동이 중요하고 아이들 교육비가 크게 들지 않았던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유아 사망률도 높아서 아이를 7-8번 가지는 일이 흔했다. 그래도 다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집안에 그들에게 시킬 것이 많아서 사람은 많을 수록 좋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학교에 가고 졸업하면 취직해서 월급을 받는 노동자가 된다는 개념은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 졌다. 서로 다른 시대에 생긴 정상적 인간의 조건들이 그냥 더해지면 문제가 생길 것은 뻔하다. 한마디로 우리는 더 피곤해 진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한문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일이 많다. 물론 아는 사람도 많지만 아무래도 요즘은 지금 중년이나 그것보다 더 노년인 사람들이 어렸을 때만큼 한문이 중요하지는 않다. 그래도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세대를 보면 배웠다고 하면서 이런 것도 모르면 어떻하냐고 걱정한다. 물론 이것은 한문만이 아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성장할 때 아이들이라면 배웠던 것을 요즘 아이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어른들이 아는 정상적인 인간조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는 요즘 시대라서 더 해야만 하는 일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컴퓨터를 모르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었다. 요즘은 그렇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정상적인 인간 조건의 일부가 된다. 


어떻게 만들어 지건 여러가지 조건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개념들은 본래 우리를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여성억압의 핵심은 여성이라는 개념이다. 여자는 본래 이러저러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여성해방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을 남성처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도 여성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개념을 없애는 것이다. 개념에 억압당하는 것은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남성도 진정한 남성은 이런 저런 것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과 의무에 걸려든다. 


시간을 낭비해서 초조한 것은 인간뿐이다. 두꺼비는 삶을 허비할 수가 없다. 삶을 허비한다고 초조한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인간이 되는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초조한 것이다. 존재하는데 실패하는 존재라는 이상한 상태를 우리는 만들어 낸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났는데 여자가 되는데 실패하고, 남자로 태어났는데 남자가 되는데 실패한다.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자식이 되는데 실패하고 부모가 되었는데 부모가 되는데 실패한다. 그래서 우리는 패배자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런 저런 개념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낭비하는 거북이는 없고, 삶을 허비한 두꺼비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온갖 개념을 만들어 스스로를 실패자로 만든다. 그 개념들은 어쩌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는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좋은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동문으로 부르고 사귐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러나 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에 놓여진 도구들은 인간을 구속하고 상처입힌다. 그래서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을 실패자로 만든다. 


우리는 왜 패배자가 되는가. 스스로 그렇게 되기도 하고 남을 패배자로 만드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어서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멋진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미녀의 미소를 광고로 내보내는 행위는 그보다 못한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패배감을 느끼게 해서 집을 사기 위해 노예같은 시간을 보내라고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요즘 다 이정도는 살고 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그 표정이 말이다. 


한국사람은 서로를 만나면 꼭 직함을 부르는 경향이 있다. 이러니까 부장들 사이에 과장이 끼면 자연스레 과장은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부장이 되지 못해 본 사람이 뭘 알겠어라고 다른 부장들이 말하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우리는 출세하고 싶어서 밤이고 낮이고 경쟁에 몰두한다. 


서로가 서로를 찔러대면 세상이 피로 물들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일을 한다. 어떤 때는 참 엄청나게 그렇게 하는 것같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패배자가 되고 불행하다. 누군가는 꿈에나 그릴 것같은 삶을 살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스스로의 선택이 혹은 누군가의 악의가 그들을 패배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원은 스스로 허물어 진다. 이제 그런 짓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 사이를 걸어다니며 경쟁과 비교와 선입견을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신병자다. 다른 사람들에게 곧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하고 말하는 그들이야 말로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응당 그들을 치료해 줘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우리가 패배자인 이유는 그런 정신병자들이 더 정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세상에 있기 때문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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