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핵가족화를 넘어 1인 가구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외국의 예이긴 하지만 21세기에 없어질 제도로 결혼제도를 꼽는 곳도 있으니 가족의 해체는 시대적 현상이다. 열심히 아이를 키우고 일했던 사람들도 어느날 뒤돌아보면 만약 결혼만 안했었다면 훨씬 가볍게 살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하고 살 수 있었는데 가족에 묶여서 평생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우리는 어쩌면 가족제도의 종말을 목전에 둔 세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적 현상이라고 해서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부의 양극화 현상도 시대적 현상인데 우리가 그걸 시대적 현상이니 좋은 것이라고 더욱 그렇게 만들자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모든 공동체나 조직은 안과 바깥을 가지고 그 조직의 서로 다른 부분들은 서로 소통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고 너무 급격하게 변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안과 바깥이 유지되지 않고 조직원들간의 소통 문제도 심각해 진다. 가족을 지탱해온 이유들이 해체되고 그 최후의 보루가 되는 가족의 기억이 더이상 생산되지도 보존되지도 않는다.
일단 오늘날에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기는 일이 많이 줄었다. 산업화 시대이전에는 집과 가족이란 생활공간인 동시에 생산공간이었다. 즉 요리도 직접하고 농사나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생산도 집에서 했고 교육도 집에서 이뤄지는 것이 많았으며 놀이도 그랬다. 가족의 테두리 바깥에서의 삶이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가정에서 보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물리적인 시간도 그렇지만 시간을 어떻게 쓰는 가를 보면 더 그런데 집에 가면 잠을 자거나 티비를 볼 뿐이다. 이래서는 배우자도 가족도 의미가 별로 없다. 직장동료가 훨씬 더 말도 잘 통하고 쉽게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통상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가족만이 알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요즘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다시 말해서 배우자가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부모와 자식도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남편의 여자 직장동료가 아내보다 남편에 대해 더 잘알고, 아내의 남자 직장동료가 남편보다 아내에 대해 더 잘아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추억도 직장동료와 훨씬 더 많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은 가족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현실을 무신경하게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제도가 위협받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나 가정이라는 테두리가 생기는 중요한 한가지 원인은 아무래도 섹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의미에서 더 그랬고 그래서 집안에서 정해주는 사람과 자동으로 결혼했지만 요즘은 성적으로 끌리는 상대와 같이 살고 싶은 것이 결혼의 중요한 이유다. 배우자와 직장동료는 다르다. 배우자와는 섹스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서적으로도 작은 차이가 아니다. 성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깊은 친밀감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이유가 뭐든 (예를 들어 섹스리스 부부도 많다) 요즘에는 이것이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사람도 많은 데다가 성윤리가 해체되어 가면서 결혼없이 동거하거나 섹스를 하는 일은 이미 상당히 보편화되었고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솔직히 섹스때문에 결혼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만 그것은 점점 약해져 가는 이유라는 것이다.
가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억이다. 다시 말해 가족의 해체란 결국 주로 가족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기억은 가족만의 일은 아니다. 기억은 모든 조직의 핵심이다. 기억이 없으면 모든 조직은 죽는다. 기억이 없으면 질서가 없고 공평이라는 말 자체가 극히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진다. 예를 들어 국가에서 역사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역사가 기본적으로 공평한 사회가 어떤 곳인가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몇년이나 고생해서 딴 의사자격증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의료체계 전체가 공중분해 될 것이다. 결국 의료체계도 기억의 산물이다. 사실 모든 사회 질서가 그렇다. 기억없이는 줄서기도 안된다.
가족의 역할도 그렇다. 과거에는 자식은 부모의 노후대책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부모를 자식이 부양한다는 개념이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형제인데 15년만에 만난다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너무 놀라고는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놀라지 않는다. 형제 남매란 어린 시절을 같이 지낸 사람들이지만 요즘은 연락이 전보다 쉽게 끊기는 것같다. 가족의 끈은 한국에서도 30년전보다는 훨씬 약해졌고 요즘에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퍼져 살기 때문에 형제 자매지만 이민가서 연락이 끊겼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은 그렇게 놀라운 것도 아니다.
경제공동체로서의 역할도 노후 대책을 세우는 가족의 역할도 기억의 문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가족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 기억이 있을 때 그 기억들은 그 조직안에서 움직이는 일종의 가상화폐가 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받는 돈도 돈이지만 사랑도 기억한다. 배우자들은 서로가 같이 지낸 시간과 도움을 기억한다. 그렇게 해서 어떤 시기에는 가족 중의 누군가가 희생을 하지만 다른 시기에는 다른 사람이 그 희생을 보상한다는 것이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기본적 조직논리다. 즉 기억을 통해 사회적 보험을 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거의 일중에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까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쓰레기 밖에는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을 선택하고 이야기를 만든다. 역사가 바로 그런 것이다. 무엇이 역사가 되는가 하는 질문과 어떻게 역사를 쓰는가하는 이야기는 실질적으로 같은 이야기인데 결국 누가 역사를 쓰는가가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 지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가 만들어 지고 나면 현실적으로 그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은 매우 힘들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우리의 머리속에 이미 있는 이야기에 맞아 떨어지는 사실만 기억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버려진다. 일단 그런 이야기가 누적되면 과거를 뒤져서 이야기를 수정한다는 것은 낭만적 환상에 가깝다. 많은 기록은 이미 유실되었고 우리는 자신과 서로의 기억을 이미 수정한지가 오래이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는 자신을 가문의 희생자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사실은 집안에서 엄청난 혜택을 받고 성장했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누군가가 그런 관점을 지적한다고 해서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은 반드시 논리적이지 않고 결론이 뭐건 공평하지도 않다. 공평같은 개념은 사실 매우 통계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이다. 특정한 두 사람 사이의 일에서 공평은 잘 정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간에는 어느 지점이 공평한 것일까? 어떤 아가씨는 어떤 남자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번 웃어준 것이 매력적이라서 평생을 그 남자의 노예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후회가 없을 수도 있다. 사실 진실을 알아보면 그 남자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웃었는데 말이다. 이게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사회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답이 안나온다. 한번의 미소가 한 평생의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냉담한 부부가 일단 각자 자신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길게 쓰고 나면, 철없는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혼자서 길게 쓰고 나면 상황은 꽤 절망적이 된다. 같이 살았는데도 기억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기 일쑤다. 기러기 아빠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식을 외국에서 교육시켰는데 자식이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는게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할 때 옆에 없었던 아빠를 원망한다는 이야기도 흔하지 않은가? 만나지 않으면서 각자 쓴 이야기는 대개 서로 많이 다르다. 우리는 객관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객관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가장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가장 많은 것을 해준 사람에게 가장 감사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가족같은 소규모 집단에 있어서 기억을 보존하는 매우 중요한 한가지 방식은 리더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리더는 그러니까 기억장치고 이야기 생산장치다. 리더의 가장 큰 덕목은 조직을 잘 살피고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의 기준에서 선택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기억하는 것이다.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조직 내의 모든 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리더가 저번에는 개똥이가 희생했으니 이번에는 소똥이가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공평하다고 인정한다. 즉 리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리더의 이야기대로 조직이 돌아간다. 그것이 리더가 있는 조직에서 기억이 만들어 지고 유지되는 방식이다. 리더의 기억과 판단에 대한 신뢰가 이 조직안에 존재하는 질서의 근원인 셈이다.
이것은 반드시 낡은 구조가 개인을 억압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리더가 그 집단에서 가장 훌룡한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다. 주말에 같이 놀러가자는 모임을 가져도 총무를 지정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총무가 꼭 반드시 가장 잘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총무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모임이 우왕좌왕하면서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지 뭐가 결정되는 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보다 민주적인 방식의 조직도 있다.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대개 리더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 그러나 작은 조직에서 리더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실용적이 못된다. 그것은 마치 담당자없이 어떤 행사를 기획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보다 민주적인 가족은 권위있는 가장을 가진 가족보다 훨씬 더 자주 모두가 모두를 만날 필요가 있다. 민주적인 방식에서는 모든 가족구성원들은 아주 자주 만나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과 이야기들을 갱신하고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위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없고 결국 가족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서는 뿔뿔히 흩어질 것이다. 이것은 성공하기도 힘들고 성공한다고 해도 각자의 신발을 신발만드는 전문가가 아니라 모두가 각자 만드는 것과 같이 비효율적인 과정이다.
현대인들 중에는 과거의 가족을 독재라고 말하면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현대야 말로 가장이 꼭 필요하다. 왜냐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가족들이 같이 지내는 시간이 훨씬 짧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상호 모순된 요구를 자주 한다. 가족들이 서로와 공유하는 시간은 줄이려고 하면서 가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삶보다는 보다 민주적인 삶을 원한다. 이건 숙제를 할 시간은 줄이면서 숙제는 더 많이 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 해체되는 것은 그래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족간에 믿음이 있어야 가족이 유지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 믿음을 이상적으로 유지할 만큼 여유가 없다. 사람들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쪽 방향으로의 절충을 모두 시도한다. 최대한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더 많은 대화와 기억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집안의 규칙과 가장의 권위도 인정하는 것이다. 요즘은 한국도 집에서 같이 음식을 만든다던가 텃밭을 마련해서 같이 채소를 키운다던가 하는 가족 공동의 작업을 늘리는 집이 생기고 있다. 주말이나 저녘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낀다.
물리적인 가족 시간의 확보도 중요하고 집안내부에서 지켜지는 규칙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가족이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따뜻한 기억,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것에는 상상력과 공감능력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
따뜻한 기억은 반드시 가장 비싸고 유명한 뭔가를 하거나 먹거나 간다고 생기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가장 행복했던 날 중의 하나는 내 친구들과 가스버너를 들고 뒷산에 가서 라면을 끓여먹었던 기억이다. 그날은 왠지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는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이유로 라면을 친구들과 먹었던 이 날을 매우 따뜻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지만 사실 객관적 사실만 보면 흥분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좋은 음식을 먹은 것도 대단한 산에 간 것도 아니었으니까.
옆집은 벤츠를 탄다거나 유명 리조트나 놀이동산에 다녀왔다같은 것에 신경써서는 따뜻한 기억은 생기지 않는다. 반면에 커다란 식탁에 둘러 앉아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던가 저녁에 같이 산책을 나가서 전에는 몰랐던 멋진 산책길을 발견한다던가 하는 것에서는 따뜻한 기억은 생겨날 수 있다.
따뜻한 기억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가족의 삶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내는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을 소중하게 유지하는 믿음을 요구한다. 응답하라 1988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 드라마 속의 세계가 따뜻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지금 중년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세계를 살았지만 모두가 그 시절에 그렇게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똑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족은 이전에는 그저 자연현상처럼 그냥 생겨나는 것이었다. 좋던 싫던 존재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결국 주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그때는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인도에 단둘이 있으면 싫던 좋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족은 저절로 만들어 진달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반드시 주변 사람에게 의존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족은 만들어 지기도 유지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가족같은 것이 필요없는 시대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 시대는 가족의 논리를 이해하고 따뜻한 가족의 기억을 만들어 내고 보존하는 능력을 시험하는 시대다. 이전에는 가족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가족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작품같은 것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시대를 아직도 전근대적 가족 질서와 싸우는 시대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억압하는 질서도 나쁘지만 모든 질서가 깨어지고 무질서하게 된 자유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비판과 파괴는 쉽지만 창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오직 현재만을 산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결국 기억속에 존재할 뿐이며 우리의 현재도 우리가 과거를 살면서 만들어 낸 이야기의 연장선상위에 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따뜻한 기억로 채워진 하나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그 이야기에 여러 사람이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여럿이 모여서 살 때 인간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인간관계가 더욱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족의 사라지지 않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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