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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주의자들과 촛불정신

by 격암(강국진) 2018. 6. 22.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서려고 하는 과도기에는 당연히 문화적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여러가지 싸움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과거의 패러다임과 싸울 때는 같은 동지들이었지만 일단 과거가 확실히 과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 


해방이래 한국을 지배해 왔고 사실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문화는 분명 지난 몇십년에 걸쳐서 약화되어져 왔다.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두환이 받아들인 것이 큰 사건이었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것이나 김대중-노무현의 민주 정권이 10년동안 한국을 바꾼 것도 큰 사건이었다. 권위주의적 문화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밑에서는 시대를 거슬러 다시 복원되는 것도 같았지만 박근혜의 탄핵이래로는 오히려 그것이 권위주의  시대의 확실한 마지막이 된 것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총에 맞아 죽어서 영웅으로 남은 박정희의 신화도 무너졌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겪으면서 권위주의적 문화, 상명하복적 문화로는 한국이 정말 더이상 발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상유지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동안 부패는 빠르게 퍼졌고 나라를 운영하는 합리적 시스템은 망가졌다. 이명박 정권때는 대통령이 뭐든지 자기가 다 잘안다는 식으로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4대강 공사에 대한 찬반토론을 할 때는 목사가 토목공학과 교수의 전공지식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해외자원투자에 대한 뉴스를 보면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일이 참으로 주먹구구식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명박의 가장 큰 실정중 하나는 전문가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서 전문가 시스템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이다. 이건 사실 국가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다. 박근혜 정권 때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 최순실이 박근혜 뒤에서 실질적 대통령 노릇을 했다. 대통령이 장관이나 비서에게도 얼굴을 안보여주는 가운데 그녀가 대통령을 독대하면서 공직자를 임명하거나 올림픽을 준비하는등 국정에 관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게 되었다. 이게 나라냐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폐세력을 무너뜨리고 권위주의의 시대를 확실하게 과거로 만들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겨우 청와대를 바꿨을 뿐이다. 권위주의적 사고와 시스템은 법률시스템에서 금융시스템, 언론계, 공무원사회, 교육 분야와 국방분야등 우리 사회의 온갖 장소에 남아 있고 무엇보다 재벌가문이 법을 지키지 않고 세습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재벌회사의 안에 남아 있다. 요즘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한진그룹의 가족들이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문재인 정권이 탄생하고 대통령의 인기가 70%를 안정적으로 넘으면서 지난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확실한 압승을 거두자 많은 사람들은 과거는 이미 과거가 되었으며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넣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같다. 하지만 실은 아직 이명박과 박근혜의 재판도 끝나지 않았고 삼성같은 거대 재벌에 대해서는 이기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문재인 정권은 어떤 정권인가? 아마도 문재인 정권을 잘 말하는 단어는 휴머니즘일 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문재인은 보다 평등하고 상식적인, 나라다운 나라를 세울 임무를 가지고 정권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을 휴머니즘 정권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해도 휴머니즘이나 인본주의같은 단어 하나가 한국 사회가 가지는 여러 문제들에 있어서 언제나 분명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현실세계의 문제는 언제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관련되어 있고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 질문은 휴머니즘적 관점에 따르면 사실 그 답이 자명하다. 사람이 중요하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답이 이렇게 자명하지 않다. 언제나 악마와 문제는 중간과정과 세부사항에 있다. 도대체 누가 어떤 돈을 어떤 단체에 얼마나 기부해야 할까? 나라가 세금으로 해야 할까 아니면 개인 기부로 해야 할까? 외국사람들을 도와야 할까 아니면 한국인들을 먼저 도와야 할까? 구호 단체는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얼마전에 한국 유니세프가 많은 기부자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한국 유니세프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UN의 산하기관이 아니었고 그냥 다른 구호단체같은 사단법인일 뿐이었다. 게다가 한국 유니세프의 간부들은 해외출장을 갈 때 비싼 대한항공의 비지니스석을 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적되어진 한 비지니스석의 가격은 640만원이나 했으니 이 돈으로 몇명의 어린이들이 구호를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작은 돈을 기부했던 사람들은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도와야 한다는 당연한 소리를 반복하면서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전부 매정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설사 문재인 정부가 어떤 특정사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금새 문재인과 이명박, 박근혜는 하나도 다르지 않다거나 심지어 문재인이 박근혜보다 더 나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문재인 정권에서도 내각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으니 문재인도 이명박이나 마찬가지로 남녀차별적인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사실 남녀를 구분하지 않아도 여성들이 약자로 사는 사회가 한국이라면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는 정권은 자연스레 여자를 위한 정책을 펴게 된다. 


자기 생각과 자기의 메세지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 몇가지로 짜맞춘 어떤 관점과 사상이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하며 가장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그들이 악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기때문이다. 그들은 악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일단 유아론적 세계에 갇혀서 급진주의자들이 되고나면 이들을 설득하여 다시 변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철학자 칼 포퍼는 이미 그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창궐이 열린 사회의 최대의 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칼 포퍼는 이 책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길게 비판하는데 그 핵심은 본질주의를 믿는 급진주의자들은 이상세계의 설계도가 우리의 현실이라던가 우리 자신과는 동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급진주의자들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시공을 초월하는 정답이 이 세상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한발한발 앞으로 걸어나가는 개혁을 믿지 않고 세상을 싹쓸어 버리고 자신의 설계도대로 세상을 만들면 그게 이상적인 사회가 될거라고 생각한다.  진리는 객관적이고 정답은 하나니까 다른 사람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적어도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렇다. 몇몇 깨어 있는 사람들이 아는 정답을 이 세상에 구현하면 그게 정의로운 사회고, 이상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 급진주의자들이 바로 열린 사회의 적들이며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플라톤 방식으로 의심불가능해 보이는 명제들에서 사고를 시작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논리와 개념에 의해서 장님이 된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던가 정치가란 어떤 사람인가같은 질문의 답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급진주의자들이며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바보고 장님이다. 그러면서도 종종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무슨 무슨 주의를 공부해 본 적이 없군요같은 소리를 남발한다. 


요즘 분위기에서 문재인과 박근혜가 구분이 안된다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바보가 어디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생각보다 훨씬 쉽게 올 수 있다. 권위주의적 정권이 물러나면 자기 주장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몰려 나온다. 자기의 주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모두가 최대한 큰소리로 자기 주장을 외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도 아니고 휴머니즘 사회도 아니다. 그건 그냥 무정부 상태다. 


중요한 것은 내 목소리도 있지만 남의 목소리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의 목소리를 조화있게 귀기울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남들은 그냥 말하는데 누가 확성기 들고 와서 떠들면 이제 다른 사람들도 확성기를 쓰기 시작하고 더 큰 앰프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중에는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 뿐더러 이따금 어떤 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보다 더 커져도 그 소리가 정말 중요한 소리인지를 믿을 근거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질서, 무정부 상태다. 


이 무정부상태가 만들어 내는 비효율과 혼란이 권위주의를 부활 시킨다. 열린 사회를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이것을 노무현 정권때 겪었다. 사법부 독립을 위해서 대통령이 내려와서 검사들과 대화를 한다고 하니까 난리가 났다. 민주적 질서는 상호 존중 위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고졸 대통령에게 대학교 학번을 묻는 검사가 나올 정도였다. 대통령이 젋은 검사자리까지 내려오니까 그 머리 위에 올라앉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아직 민주적 사회의 경험이 너무 적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처리하는 관행이나 기준이 제대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있는 관행이란 권위주의의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니 따를 수 없는데 그걸 없애고 나면 '적당한' 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기준이 없어진다. 


그리고 이럴 때 급진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은 유행병이 퍼지듯 대량 양산된다. 문재인 정부는 병사들의 처우를 크게 좋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자 이번에는 병사월급이 최저임금이 안되면 군대가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는 식이다. 우리는 여러가지를 믿는다. 불쌍한 희생자 하나 데려와서 이 사람을 그냥 두자는 말입니까 하고 정책을 바꾸자고 말하기는 쉽다. 미국이나 프랑스나 일본에서는 이러 저러한 제도가 있는데 왜 우리는 그걸 못하냐고 외치기는 쉽다. 영국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이렇게 해주는데 한국 남자는 왜 이렇게 못해주냐고 말하기도 쉽다. 그리고 그런 말들은 다 나올 수 있는 말들이다. 


다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러다가 눈 먼 급진주의자로 스스로를 변질시키는 것이 너무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농업정책이나 선거제도나 교육제도나 연금제도나 복지제도에 관심을 둘 수는 있지만 이런 부동산 정책을 당장 바꾸지 않는 한국은 망해도 싸다는 식의 발언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하기는 생각보다 너무 쉽다. 다른 걸 떠나 나도 타인도 사람은 누구나 유한한 존재이고 그래서 현실 사회도 문제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눈이 멀면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것을 자각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노무현과 이명박의 차이가 안보이고, 문재인과 박근혜의 차이가 안보이게 된다. 


박근혜를 탄핵하고 권위주의 시대의 종말을 선언한 것은 촛불혁명이었다. 그리고 가장 촛불혁명적인 광경은 전경버스 위에 올라간 사람이 정의를 크게 외치고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광경이 아니었다. 단상위에서 노래하거나 연설하는 유명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버스 위에 기어올라가려는 사람에게 밑에 있는 이름없는 시민들이 내려오라고, 평화집회하자고 외치는 광경이었다.


합리적인 결정이 만들어 지는 과정은 하나의 문화의 결실이다. 그리고 문화는 일조일석에 만들어 지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보다 길게 권위주의적 유산들과도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 나라 문을 닫고 다 고쳐서 나라를 재시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방통위가 언론을 다루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왜 조선TV는 계속 방송을 하는가? 그럼 방통위를 단숨에 날려버리면 어떨까? 그럼 그게 새로운 문화인가? 최순실이 민주검찰을 외치고 자유한국당이 법을 외치는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을 분노케 한다. 판사들의 판결이나 영장심사는 왠지 엉망인 것같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확실히 참기만 하는 것으로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이 오는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창의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급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지를 계속 의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공부는 해야하지만 하려면 제대로 많이 해야 한다.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라는 칼 포퍼가 말하는 본질주의 공부를 암기과목 공부하듯이 해놓고 이제 자기는 세상을 다 알았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사고하지 말고 확률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우리는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이고 합리적인 사람인지 주목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일단 신뢰가 쌓이면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법칙도 만들고 패자는 승부에 승복할 필요도 있다. 자기가 믿는 것이 있다고 해서 너도 나도 극단으로 가면 우리는 다시 권위주의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하나 하나 쌓아가서 믿을 만한 시민들의 망이 만들어 지고 관행이 쌓이게 되면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나라가 서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런 단계에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에도 청와대를 바꿨는데도 나라가 비이성적으로 흘러간다. 국민이 민심을 폭발시킨 선거가 있었어도 지금도 국회가 열리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법도 개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왜 현실이 예전과 다를게 없냐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구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런 분노는 급진주의자들에게 연료를 제공해서 나라를 뒤로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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