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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적은 여자, 인간의 적은 인간

by 격암(강국진) 2018. 7. 6.

요즘 장자연 사건보도나 예멘난민 문제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이런 말들이 거듭 떠올랐습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저는 비슷한 말을 적어도 두개는 더 만들 수가 있는데 그것은 남자의 적은 남자이고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들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들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자연 사건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여성들이 여성의 권리를 외치지만 사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이 모든 여성이 아니라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성범죄는 어느 것이든 무서운 것이지만 강간과 몰카중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인가는 비교적 분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몰카가 강간보다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는 것같아 보입니다.


이 문제는 어떤 여성이 누구에게 당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피해자가 외국인 여성이냐 한국인 여성이냐에 따라, 빈곤층 여성이냐 부유층 여성이냐에 따라 우리의 반응은 달라집니다. 어떤 아프리카 반군이 여학생들을 단체로 납치하여 강간하고 인신매매하는 일이 벌어지면 그것은 종종 한국에서 성적인 농담을 들었다는 여자기자의 일보다 사소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같습니다. 또 우리는 중학교 여학생이 중학교 남학생에게 강간당한 것과 40대 남성에게 강간당한 것은 매우 다르다고 여깁니다. 


이런 반응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가족이 성희롱을 당하는 일이 어디 지구반대편에 있는 여성이 강간을 당한 일보다 저를 더 흥분하게 만들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여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건 여성에 대한 일반적 개념만으로 제 반응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되고 구분됩니다. 현실은 우리가 쓰는 단어들 한두개로 말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더 초월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습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상의 문제가 끼어듭니다. 사상이란 우리가 몇개의 개념들을 써서 세상의 구조를 흉내낸 것입니다. 초상화가 모델과는 다르듯이 현실과는 다르죠. 많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거기서 등장하는 개념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라는 말이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여성의 단합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상에 충실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여성들 모두에 대해서 평등한 관심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자연스럽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실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위선적이지 않게 이런 사상을 순수하게 따르는 일은 솔직하게 말하면 고통스럽죠. 갑자기 온 세상이 내가 책임져야 할 식구처럼 되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종종 훌룡한 사람들입니다. 진보는 본래 어느 정도는 이런 고통을 받기 마련입니다. 지나친 원리주의자가 되면 모두를 괴롭히게 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순수한 사람들이 어떤 사상에 너무 깊게 빠지면 자신이 일반적 개념에 따라 살지 못하는 죄책감에 깊이 빠지고 많은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분노를 가지고 그런 분노를 퍼뜨리려고 하게 됩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나 여자나 노동자같은 말이 내 앞에 놓인 책상위의 특정한 사과 한알처럼 구체적 실체라고 믿는 겁니다. 그것들이 특정한 용도에 쓰이는 도구가 아니라 장소를 안가리는 만능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실제로는 이것은 마치 포크레인으로 탁자위의 밥그릇속에 있는 밥을 떠먹으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대참사를 만듭니다. 


사상의 맹신자들보다 더욱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은 숫자로는 더 많죠. 그들은 자신이 그 논리를 차용해 오는 사상에 대해서 순수하고 성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그 말들을 남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그들은 여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그건 자신이 아쉬울 때만 그렇고 그들은 실제로는 모든 여성을 하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는 다른 여성을, 다른 인간을, 차별하는데 한점의 주저함도 없으면서도 자기 몫을 더 받길 원하면 여성평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 가족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자신이 스스로의 엄마를 착취하고 있어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은 여성으로서 착취당하고 억압당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나와 다른 생활형편을 가진 어떤 여성들이 어떤 험한 꼴을 당해도 관심이 없죠. 입만 열면 여자를 말하지만 사실은 저 여자와 나는 모두 여성이라는 생각이 없는 겁니다. 여성착취와 차별은 남자만 하는게 아닙니다. 여성도 못지 않게 합니다. 어떨 때는 보통 남자보다 오히려 훨씬 더 심합니다. 


이쯤되면 많은 여성들이 저를 여성을 비하하는 사람으로 말할 법합니다만 저는 결코 여자만 이렇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고 남자의 적은 남자이며 인간의 적은 인간입니다.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다 이렇습니다. 조금씩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쓰는 단어의 무거움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인간이나 한국인을 말할 때 진정 그게 어떤 뜻인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자기 편할 때 스스로를 인간이나 한국인으로 부릅니다. 이런 말들 뿐만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말들이 그렇죠. 우리는 말의 무게를 잘 모릅니다. 그나마 사상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도 쉽사리 급진주의자로 변해서 단어 몇개 배우고서는 세상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로 단정짓습니다. 그걸 지적해 주는 사람에게는 공부가 부족하다고 오히려 잘난체를 하지요. 


세상엔 힘든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부를 때 우리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의무도 떠올리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그들 모두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지금 우리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될 뿐입니다. 쉽사리 숫자 몇개 늘어놓고서 우리가 난민 문제에 대해서 나쁘다거나 우리는 문제가 없다거나 하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개나 고양이 미용실이 사방에 늘어선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외면하는 일이 당연할 수는 없는 것이죠. 인간이 개나 고양이보다는 더 소중한 거 아닙니까? 또한 우리 사회에 내재된 사회적 분란의 상황과 역사를 무시하고 난민문제를 이야기할 수는 없죠. 북한정권이 갑자기 무너지거나 중국에서 내전이 일어나 엄청난 수의 난민이 생긴다면 우리도 지금처럼 한해에 몇십명정도씩만 난민으로 인정해 주는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 국가들을 식민지로 다스렸던 역사가 있다고 한다면 더욱 더 그렇겠죠. 예맨사람도 북한 사람이나 중국인처럼 인간입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인본주의를 말그대로 실천할 수 있다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우리가 한계가 있는 인간이라는 현실에 맞질 않으니까요. 인본주의는 가장 위대한 관념인 동시에 가장 비인간적인 헛소리입니다. 


요즘 세상이 전보다 좋은 세상이기는 한 것같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자유롭게 폅니다. 말하자면 권위주의 세상이 물러가니까 사상가들이 마구 나타나는 것같습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말들을 만들고, 여러가지 분류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상식에 대한 감각이랄까 중용에 대한 감각이랄까 그런 것이 없어지면 우리는 오히려 더욱 더 장님이 됩니다. 그리고 밥 세끼 먹으면서도 밥 한끼 먹을 때보다도 더 배가 고프다면서 차라리 밥 한끼를 먹고 살자고 말하는 것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상식이니 중용의 감각이니 하는 것은 한 사회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경험의 누적속에서 얻게 되는 무형의 자산인데 한국은 그게 여전히 많이 부족한 것같습니다. 배웠다는 사람도 그렇고, 어떨 때는 배워서 더 바보가 된 것같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사실 한국은 반만년역사를 자랑하지만 조선시대 이전의 문화와는 크게 격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수천년전의 플라톤보다도 이황을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과거를 부정하고 공격하기 바쁘고 그것들이 번역도 잘 안되어 있으며 사실 우리가 가진 문화의 상당부분은 서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단어들도 다 영어를 어설프게 일본이 번역한 것을 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경제를 말하지만 왜 이코노미(economy)가 경제인지도 복잡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한국인에게는 국가라는 개념도 낯선 부분이 있습니다. 따지다보면 결국 우리의 경험과 언어가 아니라 남의 경험과 언어가 그 바탕에 있어서 프랑스가 어떻네 미국이 어떻네하고 말하게 됩니다. 배운 사람이 더 바보가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도 자기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차단하는 것이 외국의 개념을 배우는 데 있어서 더 편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사이비 종교가 이렇게 많은 것도 다 이때문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정신적 단절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이상한 이야기에 빠집니다. 그리고 한번빠지면 거기서 헤어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는 자력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벽을 느끼고 필요하면 그 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해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해방되려면 일단 자기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겠죠. 


단어로서의 여자도 남자도 인간도 버리면 그냥 현실의 우리가 남습니다. 때로 우울하고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현실적인 우리죠. 그러고 나면 한가지를 깨닫습니다. 화가 날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지만 화가 가라앉으면 알게 됩니다. 결국 남자도 여자도 인간도 없듯이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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