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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개혁과 영화

by 격암(강국진) 2018. 8. 2.

사람들은 흔히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는 그저 우수한 선전도구정도의 것이고 진지하고 진보적인 철학이나 사상을 제대로 추구하는 것은 역시 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의 경우는 상황이 그 반대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어쩌면 거꾸로 영상 매체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그걸 어떤 단어나 관념으로 구체화함으로써 미래적인 사고에, 한국 사회가 가진 갈등의 해소법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한국적 사상이란 두꺼운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에 있고 한국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은 한국 사회에 누적된 모순들과 매체의 특성때문이다. 한국은 적어도 조선의 말기이래 100년이 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었고 엄청나게 많은 외국의 문물을 한꺼번에 흡수했다. 그래서 수 많은 패러다임, 수 많은 상식들이 서로 부딪히고 있는데 그들 중 어느 것도 지배적인 위치를 가지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의 종교와 정치만 봐도 한국이 얼마나 복잡한 나라인지 알 수 있다.  한국은 어느 산에 가도 절이 있는 나라이고 이때문에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법 한마디쯤은 안다. 하지만 한국은 또한 동시에 마치 전국이 공동묘지처럼 보일정도로 교회 십자가가 많은 나라다. 세계의 10대 거대 교회들중의 절반은 한국에 있으며 정치가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국에는 유교문화도 여전하다. 세계에 보기 드문 족보를 유지하면서 여전히 명절 제사를 지낸다. 유교적 질서도 여전해서 젊은 남자랑 결혼한 여자는 그 남자의 형과 결혼한 어린 여자에게 형님소리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한국이다. 


또 정치는 어떤가. 한국의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이라고 말해지는데 한국의 대통령중에 퇴임후 명예를 지키며 살다가 죽은 사람이 없다. 있다고 해도 삼당야합과 IMF로 모두에게 비난받았던 김영삼정도가 있다고 할 것이다. 비참하게 죽거나 쫒겨나거나 투옥되지 않는 대통령이 없는 것이다.  



남북분단상황이며 친일파 청산문제며 한국 사회 내부의 혼란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나라에서 누적된 갈등들을 조명하고 그 해소를 고민하는 일은 과거에는 문자 매체의 일이었다. 그때는 그런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갈등을 조명하고 그 해소를 고민한다는 것은 각각의 사회적 갈등에 대해 적절한 이름을 만들고 그것의 성격을 정의해서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무엇인지는 그런 단어를 도입하고 그걸 설명하고 그걸 오랜 기간 사용하는 가운데 결정되어진다. 외국의 단어를 번역했기 때문에 외국의 영향도 계속 있겠지만 결국은 민주주의라는 말이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가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이며 그런 어휘가 정착되고 나면 우리는 그 단어를 써서 소통을 하고 사회적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근대적 이상의 언어적 추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어라는 도구로 낡은 권위를 해체하고 시대에 맞는, 아니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멀티 미디어 매체의 발달은 이러한 문자 매체의 권위가 높게 존재하는 가운데 이뤄진 것이다. 적어도 한국처럼 역사적 단절이 없었던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일이 이렇게 흘러 갈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의 상황이 마치 최근까지도 유선전화기도 보급되지 못했었다는 곳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후진적인 지역에서는 묘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유선전화기를 가설하는 것이 무선전화기를 개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본이 드는 일이므로 아예 처음부터 무선전화기를 쓰는 것이 보편화된다. 즉 전화기란 본래 유선전화가 나오고 무선전화기 중에서 폴더폰이 나오고 나중에는 무선 인터넷도 되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는 식으로 보급된다는 생각이 옳지 않은 것이다. 


조선에서는 비록 유교문화가 많이 발달했지만 세계에 어두웠기 때문에 그 나라는 미국이며 일본이며 유럽의 문화를 흡수할 관점과 어휘를 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망했다. 이후에도 일제시대건 해방이후건 한반도에는 사회적 변화들이 밀려왔는데 그걸 언어적으로 관념화할 능력은 우리에게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한국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가지 사고들이 융합되지 못한 채 충돌하면서 조선시대적 사고에서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생각들이 충돌하는 난장판이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숙제가 너무 많다. 우리는 조선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이 남긴 글들도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을 하지 못해서 우리 자신의 뿌리하고도 단절되어 있다. 


대학수준의 학문을 논하는 곳에 가면 한국은 한문과 외래어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차라리 그냥 외국어로 공부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낄정도의 난장판이다. 번역이란 책의 재창조라고 말해 질 정도의 작업인데 한국어가 이렇게 뒤죽박죽이어서는 어떤 특정한 번역가가 노력한다고 금새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가 한국어를 재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누군가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걸 다 따라 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칸트가 초월적이라고 말했는지 선험적이라고 말했는지를 가지고 전공자들이 싸우는 판이다. 


언어가 뒤죽박죽이라는 것은 이성적 판단이 안된다는 뜻이다. 결국 추상적 사고를 요하는 곳에 가면 한국인의 사고는 망가지기 쉬운 것이다. 우리는 정치 티비 토론에 나와서 헛소리를 떠드는 사회적 저명인사들을 통해 이것을 잘 보고 있다. 대개 그것은 토론이라기 보다는 국어시간에 가깝다. 인간이란 국가란 혹은 계약이란 정의란 민주주의란 단어들이 뭘 말하는가를 논하는 시간 말이다. 어느 나라에나 의견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은 그 상식의 차이가 너무 크다. 한국에는 온전하게 영향력있는 사상가가 없다. 기성 학계나 문단은 대중과 분리되어 있고 대중과 보다 가까운 사람들은 시스템에 대한 영향력이 별로 없다. 


혹자는 세상을 보는 올바른 관념적 틀이나 사상은 객관적으로 이미 외국에 다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수용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으로 부터 배우고 그들의 것을 참조는 해야하겠으며 그들은 그들의 관점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주장할 테지만 한국의 갈등은 결국 외국의 갈등과 다르다. 특히 이미 안정적인 사회를 이룩한 서구나 일본과는 다르다. 한국의 철학자는 어떤 의미에서 미국이나 유럽의 철학자보다 더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은 더 어렵고 성취되어쳐 있는 기초는 별로 없다. 


그런데 멀티 미디어 매체는 처한 상황이 문자 매체와는 다르다. 그것은 상당 부분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매체다. 외로운 섬마을의 생활을 한국어로 포착했을 때 그것을 설사 번역한다고 해도 그것이 외국인에게도 호소력이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이란 사진기가 아니다. 글이란 관념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성이다. 한국의 작가는 부족한 재료에 허덕인다. 하지만 다큐를 찍거나 섬마을에 대한 영화를 찍어서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이해되도록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물론 여기에서도 적절한 사상과 관점이 필요하고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있을 때 좋은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품이 그렇듯 우리는 관념화 이전의 상태에서도 작품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것은 관념적 혼란속에서  고통받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답답하고 말로 안되던 것이 멀티 미디어로는 된다는 느낌이랄까. 


문자 매체와 멀티 미디어 매체의 차이는 앞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권위때문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보급이래 문자를 포함하는 언어 매체에서 그 권위는 조금 약화되기는 했지만 독점적이었다. 유명 신문들을 생각해 보라. 한국에 있는 등단 작가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출판과 글의 발표는 제한적이었다. 대중강연을 하면서 살아가는 지식인들이 한국에도 몇몇은 있다. 그들은 대학교 같은 곳에서 칸칸히 칸막이를 설치하고 살아가는 교수들을 가르키며 말한다. 저들 중에서 대학 바깥에서 대중과 호흡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요즘 순수 문학은 인기가 없다. 대학의 인문학과는 가면 갈 수록 인기를 잃어간다. 그런데도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철학자는 많은 것같다.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대중이 환호하는 것이 가장 좋은 컨텐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권위주의의 벽뒤에서 문자 매체를 독점하려고 하는 행위가 과연 문학과 한국어의 발달을 가져올지도 알 수 없다. 정말 교수들은 대중보다 현명한가? 세상에 바보같아 보이는 전문가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들은 대중과 호흡하며 자양분을 흡수하고 거기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멀티 미디어 매체는 대개 상업적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매체였다. 게다가 요즘은 외국 시장까지 생각하면서 만들기 때문에 국내의 대중을 넘어서 세계인 모두에게 통할 보편성을 찾아야 한다. 물론 여기에도 권위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공중파 3사가 한국 영상 컨텐츠의 방송을 독점하던 시절이 그랬다. 하지만 케이블의 보급과 종편 방송의 출현과 함께 독과점은 깨어졌고 이제 다양한 영상 드라마들이 만들어 지고 있다. 요즘 공중파 방송의 드라마가 종종 그 방송국의 규모에 걸맞지 않게 낮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는 현실은 그들이 대중과 얼마나 유리되어져 있었으며 시대를 외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책읽기를 싫어한다는 한국인이지만 영상매체에 대한 관심은 매우 뜨겁다. 인구가 5천만인 나라에서 천만 관객이 본 영화가 자꾸 출현할 정도다. 2015년 기준으로 연평균 영화 관람횟수는 한국이 4.3회, 미국이 4.1회 일본이 1.3회였다. 한국은 일본 사람보다 몇배나 영화를 많이 보고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인 미국인들보다도 영화를 많이 본다.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는 한국인들이 영상 매체에 가지는 이런 뜨거운 관심 속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전하여 이제는 세계에서도 경쟁력을 가지게 된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보여주는 사상내지 철학이란게 도대체 뭘까? 뭐가 꼬일데로 꼬인 사회적 갈등을 해소해서 우리를 하나로 융합해 줄 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은 그 자체가 긴 연구와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간단히 그 두드러진 면을 내 주관적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나는 내가 한때 한국의 드라마를 비평하면서 투덜거렸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아주 흔한 말인데 이런 말이었다. 


한국 드라마는 무슨 줄거리이던 결국 사랑이야기 뿐이라서 메디컬 드라마건 법정 드라마건 주인공들의 연애 이야기가 되고 만다.


나는 한국의 영상 매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애정이 아닌가 한다. 바로 내가 한국 드라마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 신데렐라 이야기고 연애 이야기라고 불평했던 그 부분이 요즘 보니 한국 드라마의 장점이다. 종종 그렇다. 단점이 장점이고 장점이 단점이 된다. 다만 내가 애정이라고 말했을 때 거기서 애정이 어느 정도까지 승화되는가가 문제다. 두 남녀가 만나서 몸매 좋다거나 얼굴이 예쁘다고 해서 혹은 돈 잘버는 남자라거나 부자집 자식이라고 해서 멋지다며 빠져서는 연애를 해나가는 식이라면 그런 연애담은 추하기만 하다. 또한 반드시 여기서 말하는 애정이라는 것이 남녀간의 애정만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정일 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간의 정일 수도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만났을 때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가지 철학을 이야기하며 사업과 인생을 이야기 해 본들 인간과 인간이 인연으로 만나서 서로 정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 결국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한국 드라마는 종종 그 정때문에 모든 것을 거는 이야기가 되곤 한다. 가장 흔한 것은 남녀의 사랑이겠지만 대장금 같은 것이 그렇듯이 자주 나오는 주제는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장금이는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아 부모들이 죽은 것이 가슴아파서 어머니가 남기고 간 유언대로 꼭 살겠다고 하면서 피눈물나는 삶을 산다. 적어도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장금이에게 가슴 뭉클하게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일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부산행도 그렇다. 부산행은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좀비영화는 서양의 좀비영화하고는 많이 다르다. 부산행은 주인공인 공유가 타인들을 무시하고 살다가 점점 더 만나는 사람들에게 애착을 느끼고 감동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희생하는 좀비로 변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영화를 보고 나면 이것은 역시 한국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좀비나 특수효과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과 정을 주고 받는다는 그 부분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정은 무모하고 경계가 없다. 이유가 뭐건 정이 생기면 그 정때문에 결국은 너와 나의 경계가 없어진다. 인생도 목숨도 그 정에 던진다. 손님을 태워줘야 한다면서 딸과의 약속도 뒤로하고 광주로 돌아가는 택시운전사는 무슨 운동가도 아닌데 정을 잊을 수가 없다. 한국 영화에는 종종 그런 장면이 나온다. 무슨 대단한 도덕군자도 아닌데 때로 어떤 문제에 끼어들어서는 목숨도 건다. 잠깐 본 사람에게 등을 돌릴 수가 없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한다. "쪽팔려서". 부끄러워서는 지식인의 답이다. 쪽팔린다는 말은 정으로 움직이는 평범하고 흠있는 인간의 말이다. 


미국은 스스로 홀로 서서 자기의 길을 개척하는 영웅을 훌룡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일본은 남의 은혜를 소중히 하고 빚은 꼭 갚는 사람이 되는 것이 훌룡한 사람인 느낌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정에 살고 정에 죽는 것이 멋진 사람이다. 적어도 드라마나 영화속에서는 그렇다. 그 수많은 철학이며 사상에 대해서, 어려운 단어들 앞에서 그 모든 말의 잔치들 앞에서 한국 영화는 종종 말한다. 결국 인간의 정이 답이 아니냐고. 우리 쪽팔리게는 살지말자고. 


나는 영화가 아닌 미국과 일본과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 더 이야기할 수 있고, 우리는 각각의 나라들이 사회적 갈등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떤 조직을 만들어 내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정이라는 이 접근이 단순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글은 여기에서 정리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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