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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사상은 뭐가 문제인가.

by 격암(강국진) 2018. 8. 16.

우리는 여러가지 형태의 구원들을 믿는다. 그 믿음은 다음의 형태를 띄고 있다.


내가 XXX이기를 유지하면 나는 언젠가 구원될 것이다. 


여기서 XXX는 어떤 구원의 사상에서 말하는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상태 즉 의무를 다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구원이란 지금의 잠정적인 상태 즉 언젠가는 끝날 상태에서 바람직한 상태로의 절대적이고 비가역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이런 믿음의 자명한 예들은 내가 좋은 신도이기를 지속하면 천국에 간다던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고 하는 종류의 종교적 믿음들이지만 이런 구원의 사상은 생각해 보면 비종교적인 분야에도 아주 흔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좋은 시민이기를 유지하면 연금을 타서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시민은 여러가지 의무를 가진다. 제일 큰 것이 납세와 병역의 의무겠지만 직장을 유지하고 저축을 하고 가족을 돌보는 일같은 것도 통상적으로 제대로 된 시민이라면 해야할 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믿음에 따르면 그런 일을 계속하다보면 당신은 드디어 일로부터 해방된 연금수령자가 되거나 편안히 지낼 수 있는 은퇴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 훌룡한 아이이기를 유지하면 제대로된 어른이 된다고도 믿는다. 우리는 훌룡한 말단 직원이기를 유지하면  언젠가는 진급을 하여 더 높은 직위를 가진 관리직 직원이 될거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훌룡한 학생이기를 유지하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훌룡한 부모이기를 유지하면 성공적으로 육아를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때로 훌룡한 연인이기를 유지하면 결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은 이러한 종류의 믿음을 사상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고 나는 그것을 사상이라고 부름으로써 모두 의심쩍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시험을 잘보게 된다는 것도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시험 공부를 하지 말라거나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좋은 성적을 얻는 것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원의 사상들은 대개 피하기 힘든 공통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는 이런 사상을 실천하는 가운데 어떤 무지의 벽을 세우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구원을 원하는 신자는 어느새 구원이 왜 좋은가를 묻지 않게 되고 어른이 되고자 하는 아이는 어느새 왜 어른이 좋은가를 묻지 않게 된다. 우리는 처음에는 왜 부자가 되고 싶었는지, 왜 큰 아파트를 가지고 싶었는지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부자가 되려고 하거나 시험에 합격하려는 노력을 길게 하는 중에 우리는 우리가 애초에 왜 그것을 원했는가를 잊게 되기 쉽다. 그것은 그냥 당연히 좋은 것이 된다. 구원에 도달할 때까지의 노력의 시간은 통상 아주 길기 때문이다. 구원이 실제로 오기나 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이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구원의 신자들은 어떤 의무들을 다하는 바람직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것들은 대개 매우 복잡하고 종종 불명확하다. 좋은 신도가 뭔지, 좋은 시민이 뭔지, 좋은 학생이 뭔지, 좋은 직원이 뭔지가 언제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 우리가 그 의무를 다하려고 할 때는 일일이 따지기 어려운 관행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인사를 잘하고 옷을 단정하게 입고 커피를 잘타는 것이 좋은 직원의 의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때로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때 선배는 부모는 사회는 교회는 말한다. 그건 원래 이런 거라고. 질문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개인적으로 우리의 의무 하나 하나가 옳은 것인지 어떻게 구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설사 관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인지를 모두 따지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종종 관행과 시스템이 너무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적당한 곳에 다시 한번 무지의 벽을 세운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의무를 다할 것이며 왜 그런 의무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너무 꼬치꼬치 묻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사실 구원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공통점 중의하나는 바로 의무를 다하되 질문하지 않는 것을 우리의 의무중의 하나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사는 판사답게 교수는 교수답게 청소부는 청소부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행동하라고 조언을 듣고 우리는 왜 그건 이러저러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실질적으로 금기시하게 된다. 우리는 사실 구원으로 가기 위해서 너무 바빠서 질문을 던질 여유가 없다.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한가하게 두질 않는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수험생은 나는 왜 대학에 가는가를 너무 자주 고민해서는 안되고 그럴 여유도 없다. 직원이 회사에서 시키는 자기 일은 안하고 회사의 비리만 캐고 있다가는 회사에서 퇴직당하게 될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슬슬 하나의 작은 세계에 갇히기 시작한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일상에 파묻히기 쉽다. 따라서 군중속에서 우리는 그저 남들이 하는대로 하면서 어느새 왜를 묻지 않게 되고 어떤 주제에 대해 질문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나 공포를 느끼게 된다. 권력자에게 질문하지 않는 기자는 무슨 책에 나오는 규칙을 보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기자를 계속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고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될 뿐이다. 


이런 세계는 답답하고 지루하다. 우리를 멍청하게 만든다. 의무는 많고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그 세계를 뛰쳐나오지 않는다. 구원때문이다. 사회적 억압과 구원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구원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 억압을 참아 낸다. 궁금하고 답답해도 구원을 위해서 참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시민이나 신자나 학생이 된다는 것은 대개 어떤 게임을 하는 것과 같은데 우리는 거기에서 언제나 공평한 결과를 얻게 되지 만은 않는다. 게임의 규칙이 일관성이 있는지 나아가 그 규칙들이 합리적인가 자체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 게임을 계속하는가? 그것은 그 게임을 계속 하면 언젠가는 구원이라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 신앙 게임에서 중간에 빠져 버린다면 우리는 그동안 했던 노력에 대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의 사상은, 구원의 패러다임이고 그것은 현실 타파를 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즉 우리는 현실 사회가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즉각적으로 해결하거나 불공정함과 즉각적으로 싸우기 보다는 언젠가는 올 구원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우리는 현실이 지금 당장 개선되거나 조금씩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의 잠정적 상태에서 구원이 오는 다음 상태로 단번에 개선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거꾸로 다가올 구원을 위해서 현실의 개선을 포기하고 시스템을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군대에 간 남자는 다소간에 불공정한 행위가 있어도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보다는 그저 병역이 끝나기를 계급이 올라가기를 기다린다. 현실이 나빠도 어차피 제대하고 나면 잊어버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말단직원으로 사는 것이 때로 억울하고 구질구질한 일이라도 말단직원은 언젠가는 그들도 진급하여 그런 말단생활을 끝낼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후배는 언젠가 선배가 되고 대학원생은 언젠가 교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 성추행범이 우글우글해도 그런 성추행범들이 나를 건드릴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구원은 저 앞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템과 싸우고 그것을 뒤집으려는 충동은 억제되고 오히려 여자가 여자를 피해자가 피해자를 억압하기도 한다.  바로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분해도 오히려 범죄자를 옹호한다. 내가 범죄의 대상이 되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다. 내가 상류층이 되면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벗어나는데 그걸 위해서 이 지옥를 옹호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정도면 구원의 사상이 만들어 내는 세상의 문은 상당히 닫히게 된다. 패러다임이론에서 말하는 정상과학처럼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의 정상적 상태를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두개의 기둥인 의무와 구원의 개념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의 사상은 대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속죄라는 개념이다. 이 속죄라는 개념은 구원의 사상에서 말하는 의무를 행하는데 있어서 일종의 상거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구원의 사상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바람직한 상태를 유지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대개의 경우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의무를 어길 때 구원이 불가능해진다고 하면 구원의 사상은 힘을 잃는다. 모든 신자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게 될 것이고 따라서 구원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구원의 사상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속죄의 개념이다. 이에따르면 당신은 비록 올바른 존재이기를 멈췄지만 그 죄는 씻어낼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다시 한번 구원을 향한 길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이론적으로는 우리는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된다. 의무를 무시해도 된다. 다만 언젠가 정해진 방식대로 그것을 갚으면 된다. 마치 카드로 아무리 많은 빚을 져도 지불일자까지 그걸 갚으면 문제가 안생기듯이 말이다. 그래서 속죄의 개념은 구원의 사상을 상당히 기괴한 것으로 만드는데 가장 신을 두려워해야 할 것같은 자가 자신이야 말로 가장 우수한 신자라고 믿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끝없이 죄를 짓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속죄를 한다. 따라서 이 속죄는 의무와 미래에대한 희망과 함께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의무를 다하려고 하고, 구원되는 미래를 꿈꾸며 현실을 참는다 그리고 계속 속죄해서 빚을 갚아나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속죄의 개념은 생각해 볼 수록 기괴한 것이다. 사실 한번 행해진 행위는 대개 되돌릴 수 없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그 사람을 되살려내야 속죄하는 것이 된다면 속죄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속죄란 반드시 행한 일을 거꾸로 되돌리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뭔가 다른 것으로 그것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실수나 악행을 어떤 다른 행위로 보상하려고 하면 우리는 어떤 행위가 얼마나 나쁜 행위인가를 논하는 가치측정을 행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 그 보상을 누구에게 행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연히 그 보상은 피해자에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착각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관행적으로 우리는 속죄의 과정에서 죄는 다른 사람에게 짓고 속죄와 보상은 시스템에 한다. 이론적으로 그런 보상이 결국은 시스템을 통해서 피해자에게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일전에 영화 밀양은 이것을 잘 보여주었다. 자식을 죽인 유괴범은 죄를 피해자에게 짓고 속죄는 신에게 한다. 그래서 죽은 아이의 엄마가 유괴범을 만났을 때 유괴범은 자신은 이미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피해를 입은 죽은 아이의 엄마는 분개한다. 왜 죄는 나에게 짓고 속죄는 엉뚱한 곳에 하는 것인가? 


일이 이렇게 되는 근원적 이유도 바로 구원의 사상의 핵심이 구원이며 그 구원을 주는 것은 나와 같이 그 구원의 사상에 참여하고 있는 동료가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사상속에서 속죄란 구원을 받을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구원을 제공할 시스템에 속죄를 한다. 다른 구원의 신도들에게 죄를 지으면 그에 대한 벌금을 구원을 줄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무엇이 속죄인가? 많은 종교단체는 헌금을 걷고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은 더많이 속죄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왜냐면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은 훌룡하다고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고행을 행하면 속죄받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고통이나 돈의 지출이 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속죄가 될까?


한국 법원은 돈많은 부자들의 재판에서 사회적 기여가 큰 것을 고려하면서 양형을 하고는 한다. 그런데 설사 선행과 기부를 통해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죄는 피해자에게 짓고 속죄는 사회에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게다가 속죄를 돈이나 사회적 영향력으로 환산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대개 버릇없는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그들이 공부만 잘하면 다른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이것도 일종의 속죄다. 회사의 직원도 그렇다. 무능한 직원은 동료나 부하직원들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무능을 속죄하기 위해 노조 파괴 같은 불법적 행위나 사내 정치에 몰두할 지 모른다. 즉 피해는 다른 직원에게 입히고 보상은 회사나 상사에게 한다. 왜냐면 진급이라는 구원을 주는 것은 회사의 평가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구원의 신자는 일상적 의무를 계속하면서 구원의 세계에 갇힌다. 그 감옥의 벽이 바로 질문하지 않는다는 무지의 벽이다. 일단 신자가 그 세계에 갇히면 그 신자의 윤리적 신념도 뻔한 혼란속에 빠진다. 종교에서 신은 전지전능하다. 따라서 신자가 죄를 지을 때 신에게 속죄하는 것은 그나마 논리적으로라도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구원의 사상은 엉뚱한 것들을 신처럼 만든다.


입시생에게 가장 좋은 속죄는 좋은 점수를 받거나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좋은 학생의 신분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 입시생이 부모나 이웃이나 친구들이나 사회에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진정한 속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 세계의 구원인 대학입학이라는 것이 신처럼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건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된다. 하지만 입시생활은 좋은 학생으로 속죄하면 다른 죄를 속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회사직원도, 부자들도, 검찰 조직의 일원인 검사들도, 어떤 정당의 일원인 정치인들도 모두 속죄를 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모두 속죄를 하며 산다. 그리고 그 속죄의 행위는 우리의 윤리적 양심을 눈멀게 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심해지면 우리는 작은 세계에 갇혀서 그 세계의 구원을 신처럼 여기며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태연하게 말하게 된다.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해서 처벌받게 한 사람도 자신이 사회에게 속죄함으로써 사실은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이 죄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속죄에 있다. 속죄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0개의 선을 행하기 위해서라면 1개의 악을 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결과적으로 산수를 하면 속죄를 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구원을 바라는 욕심이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그 세계에 갇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작은 세계에 갇히면 사탕하나가 전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사탕하나를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사탕이 구원인 세계에 갇힌 사람에게는 사탕의 가치가 그만큼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건 그 사람이 탐욕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즉 인식의 문제다. 마약을 한 사람이 세상이 무지개빛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욕망때문이 아니라 마약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구원의 사상의 가장 핵심적이고 단순한 모습을 보아왔다. 우리는 그것을 1차적 구원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 세계속의 구원사상은 이런 1차적 구원 사상을 여러 층위로 쌓아 올린 것이다. 요즘 초등학생은 중학교를 걱정하고 중학생은 고등학교를 걱정한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은 대학에만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식의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이번에는 취업 경쟁이라는 아주 비슷한 싸움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발견하고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이번에는 사내 경쟁이라는 비슷한 싸움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사내경쟁도 1차적이 아니다. 직급은 층층이 존재하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칸칸의 시기에 매몰된다. 다음 칸으로 나아가는 것을 구원으로 여기는 신앙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한다. 전체를 보지 못하도록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억압당한다. 왜냐면 그것은 훌룡한 신자의 자격을 깨는 금기이기 때문이다. 착한 학생은 결코 필요하지 않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착한 직원은 결코 필요하지 않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인생의 다음칸을 미리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파괴할 것이라고 세뇌당했기 때문이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우리는 서둘러 지금 우리에게 구원인 것이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그래서 경쟁에 무한히 집중하도록 스스로를 세뇌한다. 즉 크게 보면 층층의 구조를 한 구원의 사상에 포섭되어 그 세계안에 갇힌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구원의 사상을 비판했다. 하지만 구원은 재미있고 유용한 개념이다. 우리가 어떤 복잡한 일을 하려고 해보면 그냥 막연히 해서는 일을 하기가 어렵다. 만약 당신에게 해야할 집안일이 아주 많다면 손에 잡히는대로 해서는 능률이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일을 나누고 작은 성취가 있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상도 준다. 예를 들어 집안청소를 할 때 청소기를 돌리는 일을 모두 했다면 잠시 쉬면서 맛있는 쥬스라도 한잔 할 수 있다. 아니면 할일 목록을 죽 적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 목록의 한칸을 지울 수 있다. 즉 크고 작은 보상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대학에 합격하고 취직을 하고 진급을 하는 경험은 아주 즐거운 것으로 사실 그런 것이 없다면 인생은 훨씬 심심한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도구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잘 살려고 할일의 목록을 만들지 할일의 목록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너무나 유한하다. 바보같은 일인줄 알지만 질투와 경쟁에 빠지고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저런 구원의 약속에 홀랑 빠지는 일이 생긴다. 


절대로 일상에 빠지지 않는 삶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불가능하다. 우리는 마치 영화를 볼 때처럼 그 세계에 빠져든다. 내 일이 아닌데도 어느새 엉엉 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아예 세상에 있지도 않은 슈퍼 히어로나 좀비의 행동때문에 흥분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핵심은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모든 영화를 보지 않기로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영화는 좀 피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영화 자체를 다 포기하면 사는게 재미가 없다. 핵심은 지금 당신은 꿈속에 있으며, 영화속에 있다는 것을 때때로 깨달을 힘을 가지는 것이다. 영화에 빠진 당신의 옆에서 누군가가 딸랑하고 종을 울리면 영화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인셉션같은 영화에서 꿈에서 빠져나오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극단적 흑백론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질문이 옳다 그르다라는 둘 중의 하나로 답이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틀리지 않은 것은 옳은 것은 아니다. 법적인 무죄가 100% 순결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뭐뭐가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본질주의는 우리를 정신적인 감옥에 빠지게 하고 때로 진짜 감옥에 가게 만들기도 한다. 


둘째는 너무 착하고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착한 아이는 유년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착한 학생은 학교에 갇히게 된다. 이 세계에는 어떤 사기가 있다는 위화감은 사실이다. 이 게임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은 사실이다. 일상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거기에 지나치게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건강한 긴장을 유지하는 정도에서 멈춰야 하며 적어도 이따금은 고개를 들고 하늘도 주변도 봐야 한다. 칭찬에 너무 빠져들지 말아야 하고 지금 있는 이 세계에서 좋은 평판을 얻는 것에 너무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우리는 어떤 세계에 갇힐 수 있다. 지금 우리 옆에서는 깨어나라고 종이 딸랑거리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못듣고 있을 수도 있다. 그 때 우리는 작고 시시해 보이는 것, 권위가 있어보이지 않는 것에도 주목할 수 있는 태도와 행운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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