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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정의에 대하여

이미지 세대의 합리성과 정의

by 격암(강국진) 2018. 7. 11.

18.7.11

최근 나는 트와이스의 댄스 더 나이트 어웨이라는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참으로 화면이 자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색감이 엄청 화려하고 풍경은 꿈처럼 아름다우며 그 안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떠드는 트와이스의 멤버들은 모두 다 매력적이다. 이렇게 말하면 중년남자의 주책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안의 세상이 천국같아 보인다. 이건 그렇게 보이라고 최선을 다 해서 만든 영상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트와이스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그것은 거대하고 화려한 파티이며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지 않을까? 이쪽에서는 트와이스의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고 저쪽에서는 어벤져스를 찍고 있는 곳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기 보다는 주관적이고 지역적인 느낌인 이미지들의 조각처럼 과도하리만큼 강렬하고 문자적 이성은 매우 허약하게 존재 하는 세계다. 이미지들은 글과는 달리 어떤 일관성없이도 나열될 수 있다. 나는 그 세계의 합리성이나 정의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이미지 기반 세계의 합리성과 문자 기반 세계의 합리성은 서로 같을 수가 없다. 전자가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이며 망중심적이라면 후자는 보다 시공간적으로 하나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절대적이고 비인간적, 아니 초인간적이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인간이 어떤 미디어를 쓰는가에 따라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도 심지어 사고 방식도 달라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속의 문자에 익숙한 사람은 세상을 문자로 보고 연극에 익숙한 사람은 세상을 연극으로 보며 기계에 익숙한 사람은 세상을 하나의 기계로 보고 음악에 익숙한 사람은 세상을 하나의 음악으로 보는 것이다.  

일이백년전의 사람들은 시인같은 언어의 달인일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산에 가면 그 멋진 경치를 보면서 어떤 단어들로 이걸 표현하고 개념화하며 마침내 기억할까를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산의 체험이란 기록되고 전달될 수 없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기억속에서 흐려졌을 것이며 멀리있는 사람에게 표현할 수도 없으니까 점차로 산에 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몇일이 지나면 그저 흐릿한 인상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는 세상일에 대한 판단도 흐릿할 것이다. 그래서 문자시대에 지배계층은 쓰고 읽기를 독점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스마트 폰을 든 현대인들은 이제 그것이 보거나 들을 수 있는거라면 어떤 언어로 그것을 기록해야 할까를 고민 하지 않는다. 그냥 녹음을 하거나 사진으로 찍어 저장하고 전송한다. 스마트폰은 인간의 확장이다. 하드디스크는 우리의 기억을 대신해 주고 디지털 이미지는 우리의 표현기관을 대신해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진찍는 기술이다. 그나마도 점점 더 기계가 많은 것을 해준다. 덕분에 현대인은 언어로 개념화하는 과정을 적어도 전보다 훨씬 덜 거친다. 당연히 우리의 기억도 이미지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현대과학기술은 과거의 데이터를 문자를 쓰지 않고 쉽게 불러오는 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체험을 할 수 있다. 과거의 산이나 지구반대편의 산을 내 눈앞에 소환할 수 있고 내가 그것에서 뭘 느끼는 가를 다시 체험할 수있다. 

이것은 과거와 다른 것이다. 19세기라면 돈과 여유시간이 있는 상류층인데다가 글과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야 세상과 소통할 기본적 자격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소통할 방법, 사람을 불러 모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이 있고 스마트폰이 있다. 여행가서 찍은 사진이나 맛있게 음식을 먹는 동영상만 올려도 상당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글쓰는 기자가 아니라도 세월호나 촛불집회의 현장사진을 찍어올리거나 배포할 수 있고 정치가나 연예인을 비난하거나 희화하는 합성사진을 만들고 배포할 수 있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우리의 뜻을 글로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선택해서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인가 하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반문자적이라는 것은 결국 반이성적이고 반계몽주의적이기 마련이고 이런 의미에서 이미지 소통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직관과 느낌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자들과 닮아 있다. 하지만 유럽의 19세기와 지금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현대인들은 낭만적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자의 영역을 상당히 넘어가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네트웍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오늘날은 모든 사람들이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같아 질 수 있는 시대, 누구나 대단한 시인이나 화가나 다큐 감독같이 될 수 있는 시대다. 

 

인간의 집단적 이성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진화하고 있다. 음성이나 문자의 소통으로 만들어 지던 것에서 데이터로 소통해서 만들어지는 이성으로 말이다. 그런 변화의 가운에서 사람들은 전에 비해 더더욱 이미지나 느낌에 집착하고 그것에 민감해져 갈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는 이미지가 없이 문자만 있으면 이해도 공감도 되지 못하고 지루해 지게 된다. 말만으로는 판단이 안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정치가들도 고루한 이야기를 늘어 놓기 이전에 예능 스타처럼 재미있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는 쪽이 대중적 지지를 얻기 쉽기 때문이다. 

전에는 문맹이 무력했지만 요즘은 직관적 감각이 없는 것이 무력하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만으로도 문자 이상의 힘을 발휘할 때가 많고 문자만으로는 무력할 때도 많다. 긴 글을 쓰는 사람보다 단어 하나, 사진 하나를 잘 던지는 사람들이 훨씬 더 큰 사회적 목소리를 얻게 되는 일을 보는 것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미지를 지배하는 사람들, 문자보다 기초적인 데이터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이미지는 말 그대로 그림이나 동영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복잡한 상대에 대한 직관적 느낌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혹은 부정확한 것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옳은 태도는 아니다. 과학보다 예술이 부정확한 정보를 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서로 보완하는 정보를 준다고 해야 한다. 분석적 사고는 우리가 주어진 상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그런 사고는 금방 한계에 부딪히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타자가 때린 공이 어디로 날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물리학적으로 답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일이 효율적일 것인가. 게르트 기가렌처는 생각이 직관에 묻다라는 책을 통해 직관과 경험적 방법을 따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개 복잡한 현실의 모든 것과 우리의 한계를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이미지를 따른 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의식적으로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현명한 태도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복잡한 현실에 대처하는 경험적 방법일 수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자적인 인간이 북한의 지도자를 본다면 그나 그녀는 그 북한 지도자에 대해 우리가 뭘 알고 있는가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미지 세대는 보다 직접적으로 우리가 그를 보고 어떤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가 하는 느낌에 보다 무게를 둔다. 이것은 부실한 판단을 하는 비논리적 행동일 수도 있지만 뒤집어 말하면 다른 사람이 제공한 지식이나 관념보다는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에 더 무게를 두는 방식이다. 과연 천만명이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합친 것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까 아니면 천만명이 각자의 관점으로 느낀 느낌을 제공하고 그것을 합친 것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까? 그 답은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 언제나 논리적 이성이 옳다면 민주국가에서 선거를 하는 의미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대학교수들의 투표가 더 좋은 답이지 않을까? 

사실 이데올로기에 중독된 사람이 잘 보여주듯이 분석적 사고에 집착하는 사람이 오히려 시야가 좁아져서 급진주의자가 되고 마는 경우도 많다. 그들은 문제의 한쪽 측면에만 집착해서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종종 더 속기가 쉽다. 물리학의 전문가는 종종 야구를 못하고 경제학 교수는 종종 주식투자를 못한다. 인공지능분야는 분석적 접근을 오래 전에 버렸다. 그들은 대신에 기계학습이라고 부르는 경험적 방식을 택한다. 다시 말해 근원적 이론없이 새로운 데이터를 통해 지금의 전략과 관점을 조금씩 개량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예는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미지가 인간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광고다. 광고에는 종종 어떤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 나오고 음성이나 문자가 나온다. 그런데 이럴 때 음성이나 문자는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어떤 상품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광고효과의 거의 전부다. 음성이나 문자의 내용을 신경써서 분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착하고 성실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김연아가 나와서 이게 믿을 만하다는 데 내용을 뭘 보겠는가는 식이다. 김연아가 알아서 생각해 보고 하는 말이겠지. 

 



요즘은 기업 자체에 대한 신뢰도 경영자에 대한 이미지에 크게 의존한다. 스티브 잡스나 엔론 머스크를 생각해 보라.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티브 잡스가 만들었는데 알아서 잘 만들었겠지 하는 식이 아니었던가? 제프 베조스의 아마존은 계속 적자고 엔론 머스크의 많은 사업들도 그렇다. 그래도 그들은 세계적인 기업가고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논리의 힘보다 이미지의 힘이다.

물론 모두가 이미지로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분석적 사고도 중요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날로 복잡해 지는 가운데 이미지의 역할은 오히려 날로 커지고 있는 것같다. 은행이나 핸드폰 회사와 계약할 때 계약서를 읽고 분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제품을 살 때 이제는 점점 더 회사의 이미지나 그걸 추천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만 보고 사게 되지 않는가?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너무 빨리 바뀌고 요즘은 여러 제품을 다 써보는 것같이 가능한 경우를 다 시도해 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한 시대다. 우리는 점점 이미지 만으로 판단하는데 익숙해 지게된다. 자기를 믿고 자신의 직관을 믿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런 가운데 문자적 합리성과 이성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미지의 힘이 멘토나 지도자의 선택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1960년에 케네디와 경쟁한 것은 닉슨이었다. 당시에는 미국 가정의 88%에 티비가 보급되어 있는 가운데 케네디와 닉슨은 사상 최초의 티비 토론회를 가졌었다. 그리고 물론 그 결과는 케네디의 승리였는데 나중의 분석에 따르면 라디오 시청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닉슨을 더 많이 찍었다고 한다. 화면 속의 케네디는 닉슨보다 불과 4살 어렸지만 훨씬 잘생기고 자신감넘치는 모습을 보여줘서 표를 얻었던 것이다.

요즘은 지식인들도 소통에 있어서 이미지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작가도 반드시 잘생겨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좀 비범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안좋은 낯빛에 자신감없는 목소리를 가졌거나 지루하고 딱딱한 이미지를 가졌다면 그런 사람의 메세지는 퍼지기 힘들 것이다. 남자라면 커피 CF 모델같으면 좋을 것이고 여자라면 걸그룹 멤버같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디어에 얼굴을 내밀지 말고 신비주의로 남아야 한다. 특히 드라마 작가처럼 대본을 PD에게 줘서 드라마가 만들어 지는 경우가 아니라 직접 책을 쓰고 팔아서 대중과 직면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이제 두가지 결론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을까 싶다. 먼저 낡은 세대의 일원으로서 한마디 말하자면 그래도 좋은가 싶다. 독서와 글쓰기는 여전히 합리적 판단의 기초이며 분석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거 아닐까? 그것을 전부 고리타분한 과거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언어가 파괴되고 트윗같은 짧은 글이 아니면 독해가 안되는 세대는 마치 한글세대와 한문세대가 소통못하듯 나같은 낡은 세대와 소통불가의 단절을 겪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전 세대의 경험을 통째로 잃어버리게 된다. 분석적 사고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중요할 것이다. 

요즘 일베나 워마드등의 사이트들에서 반 사회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언어 파괴다. 말을 게으르고 애매하게 하며 단어의 뜻을 확장하고 비틀어서 거의 만능의 유행어를 만든다. 그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해 깊게 연구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말을 가끔 보면 마치 망치로 손을 치면 손이 아픈지 안아픈지를 모르는 사람같다. 상대방이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어떤 것을 느끼는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비교적 유능한 쪽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이미지를 뒤집어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운동가이나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뒤집어 쓰거나 학교폭력의 희생자의 이미지를 포함한 약자의 이미지 혹은 반대로 위험한 범죄자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다. 사실은 그것과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믿음에 철저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다만 특정한 상황에서만 그런 이미지를 뒤집어 쓰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들이 그들을 간섭하거나 제재하기 어렵게 한다. 그들은 이미지의 힘을 알고 있다. 

이것이 현대사회가 아닐까? 세상에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있었지만 과거에는 그들이 의미있는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조직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요즘같은 이미지 시대에는 그게 된다. 진정한 이미지 세대의 특징은 분석적 사고를 대체하는 감수성이다. 즉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느낌을 가지고 풍요로운 사고를 한다.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면은 상대적으로 떨어질지 몰라도 통찰력있는 직관을 통해 전체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여전히 말을 하지만 말의 한계를 인식하고 말을 뛰어 넘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사람들은 기성체제에 대해 반항하면서 분석적 사고는 떨어지고 거기에 감수성까지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고 나면 남는 것은 윤리적 파탄과 조잡한 이야기의 맹신뿐이다. 그래도 현대 기술은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마치 과학을 마술로 선전하면서 대중을 속이는 것이 가능했던 과거의 과도기와 비슷한 과도기를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교통법체계를 어기는 사람들이 열중 절반이 되어야 교통이 엉망이 되는게 아니다. 정말로 열중 하나가 교통법을 무시하면 교통법은 엉망이 된다. 사람들이 질서를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일베나 워마드 같은 사이트들의 사회적 비용은 그들이 소수라도 그렇게 작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지키고 법치를 지켜야 한다. 기본적 인권과 국가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에 엄격해 져야 한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의 독서와 글쓰기 교육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한다. 

이것을 전제로 말하면 그래도 우리는 문자 시대로 계몽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지 시대의 그림자들을 보고 철저한 문자교육을 통해 분석적 사고의 시대로 완전히 돌아가자는 식의 발상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 법과 조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는 통찰력이다. 빠른 조직과 행동력이다.  

앞으로도 여전히 분석적 사고는 소중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전체, 세계 전체를 보면, 더 거대하고 더 복잡한 시스템으로 확장될 수록 신뢰의 망을 구축하고 그 망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미지 시대의 방법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고 강력한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쪽이 더 큰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승자는 엄밀한 논리로 긴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감수성있는 사람들이거나 그런 사람들의 네트웍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이런 네트윅의 성장과 보존을 가로 막는 일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며 사회적 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지나치게 따지고 지나치게 일을 복잡하게만 만든다. 

진정한 이미지 시대는 특정한 평론가가 길고 복잡한 평론을 써서 어떤 것을 평하는 것보다 네트웍으로 연결된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만들어 내는 데이터가 상품을 평가하고 물건을 생산하게 만드는 데이터의 시대다. 소위 말하는 입소문의 힘이 중앙의 분석을 무력하게 만드는 시대다. 만약 영화에 대해서 평론가 평점보다 네티즌 댓글을 더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시대로의 전환은 분석적 사고에서 확률의 시대로의 전환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 이미지, 데이터에서 뽑아낸 확률같은 것은 어떤 동일한 것을 가르키는 다른 표현들이다. 기계적 논리에서는 옳다 그르다가 분명하게 조직이 만들어 진다. 확률에서는 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있을 뿐 100%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파편적인 사실로 전체를 파악하려고 하고 모든 문제를 같은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쪽이 오히려 더 많이 틀린다. 팩트 하나 하나를 확실하게 체크해서 진실을 쌓아올려 가는 논법은 통하지 않는다. 왜냐면 누구도 어떤 조직도 100% 무오류가 아니며 팩트체크를 하겠다고 나서는 법률이나 언론사도 편견없는 중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건 어디에도 없다. 어떤 사태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우선은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최고고 그렇지 못해도 나와 비슷한 사람의 반응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 이론가들의 반응은 개념화 사상화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의 반응과는 종종 크게 다르기 때문에 지식인도 언론인도 나름의 문제가 있다. 

매크로 프로그램이나 포털의 영향력 그리고 가짜 뉴스로 여론을 바꾸려는 행위가 이런 시대의 가장 큰 악이다. 그들은 모두 데이터를 오염시키고 있다. 통신비에서 폭리를 취하거나 온라인 상행위를 가로 막는 관행은 악이다. 그들은 데이터의 발생을 제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올바른 이미지의 형성을 어렵게 하고 나아가 사회적 합리성을 파괴한다. 

분석적 사고의 시대에는 세상에 대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악이다. 자기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악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진실을 쌓아올려서 거대한 이론을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품을 모아 거대한 기계같은 시스템을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미지 시대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악이다. 우리는 아는 것은 안다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한다. 10% 확신하는 것을 90% 확실하다고 해서는 안된다. 급진주의적 맹신자는 이미지 시대의 최대의 범죄자다. 그들은 놀랍지 않은 것을 놀라운 것으로 말해서 우리의 확률계산을 엉망으로 만든다. 

이미지의 시대는 아직도 소위 4차산업혁명이라고 말해지는 것을 포함한다. 인공지능이나 블록체인 같은 기술들이 앞으로 사람과 사람들을 더 강력하게 연결되게 만들 것이다. 더 많은 데이터가 생산될 것이다. 그런 미래가 정말로 오면 우리는 그 기술들의 구체적 세부사항과 관련하여 합리성과 사회적 정의에 대해 토론해야 할 것이 아주 많이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윤리같은 것이 한 예다. 

지금 같은 과도기에는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대의 미아가 되는 시민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한편으로 양지로 이끌어 내는 대신에 한편으로 엄격하게 다뤄져야 한다. 사회적 관용과 다양성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그들은 사회적 불안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도구가 되거나 자신들의 힘에 취해 큰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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