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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정의에 대하여

법치와 정의

by 격암(강국진) 2021. 7. 5.

2020.8.17

우리는 대개 소시민들이다. 독재정권의 권력자라면 법같은 것은 무시하거나 내 맘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소시민들은 교통법규에서 세금 내는 법에 이르기 까지 자잘한 법들과 만났을 때 대부분의 경우 그게 법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사회 안의 일개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느새 힘은 법이 가진 것이고 법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 생각에 익숙해 진다.

 

사실 법이 중요하기는 하다. 법은 인간이 가진 아마도 가장 위대한 도구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역사시간에 우리는 함무라비법전같은 오래된 법전에 대해서 배운다. 인간이 쓰기를 개발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법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인간 사회는 단순히 독재자의 변덕스런 마음과 기억에 의존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에 대한 변하지 않는 약속인 법이 존재하는 사회가 될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법은 정의를 구현하지 않는다. 정의를 구현하고 집행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며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법도 여전히 인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법은 오히려 정의를 죽이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법으로만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강력한 무기를 가지면 안전한 세상이 온다는 생각과도 같다. 집안에 총이 있으면 그 집이 꼭 안전해 지는가? 총이 있다고 해도 그걸 잘 써야 한다. 잘못쓰면 그 총구가 가족을 향할 수도 있고, 총이 있기 때문에 악한이 그걸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 총이 있기 때문에 그 집이 위험해 질 수 있다. 

 

법은 제한된 시공간과 상식을 전제한다는 원천적 한계를 가진다. 만약 인간이 인간을 고층빌딩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렸다면 설사 그 인간이 죽지 않았다고 해도 살인미수일 것이다. 하지만 옥상에서 새를 날려 보낸 것이 살인미수는 아니다.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 예는 당연하지 않은 법의 어떤 면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법을 정하면서 그 대상은 인간이라고 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법을 새에게 적용하면 말이 안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날로 다원화되고 있고 복잡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이제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단순히 인간이 사는 균질한 사회라기 보다는 실질적으로는 새도 살고 외계인도 살고 곤충도 사는 곳이 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다. 그게 법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살인자는 아주 오랜간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으므로 쉽게 그래도 사람을 죽이면 안되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과연 어느 쪽이 더 큰 죄라는 것이 언제나 분명한 것일까? 사람이 옥상에서 돌을 던져서 행인을 죽이면 살인이다. 그런데 자동차 회사에서 차를 불량으로 만들어 수십명이 죽으면 이건 살인인가 아닌가. 사랑제일교회를 이끄는 전광훈처럼 과학과 방역당국의 지침을 어기고 국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은 살인자인가 아닌가. 

 

나는 여기서 법과 상식을 바꾸려는 것은 아니다. 법이란 바꿀 수 있는 것이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서 수정해 온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러니 왕따도 살인보다 더 큰 죄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법에 대한 존중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된다. 다만 법에 너무 익숙해지고, 법에 너무 기대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법으로 따져서 처벌 받지 않았으니 나는 책임이 없고 법으로 따져서 유죄니까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에 지나치게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사고 방식은 금방 윤리적 파탄으로 간다. 즉 법으로 처벌받지 않을 길만 있다면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 행동이 윤리적으로 떳떳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내가 책임질일이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억울하면 고소해라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사고 방식이 이것이다. 

 

유죄가 뭐고 무죄가 뭔가. 법은 아닌 것같지만 결국 하나의 게임을 전제로 한다. 즉 유한한 경계안에서의 일만 다루는 것이다. 사회적 현실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그 경계가 어디에 있건 세상에는 언제나 억울한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심신미약이니 정신병이니 해서 저질러진 범죄는 나의 행위가 아니고 어떤 외부적 요소가 나에게 강요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걸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 그것도 억울한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이걸 다 들어주면 이 세상에 유죄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하나의 원인 뒤에는 또다른 원인이 있다. 당신이 속도위반을 한 것은 누군가가 당신을 놀라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당신을 놀라게 한 그 사람은 아침에 해고당해서 분노에 차있었을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문제는 그 사람을 해고한 회사에 있었을 수 있다. 그 회사는 또 다른 이유가 물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좋은 일, 자랑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자기에서 생각을 멈춘다. 즉 내가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쁜 일, 책임져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유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한 거라고 말한다. 

 

이번에 광복절 광화문 집회에 대해서 어떤 판사가 그걸 허락해 줬냐고 비판하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코로나가 번지고 있는 가운데, 방역에 대해 허튼 소리를 하는 보수단체가 집회신청을 하는데 그걸 허락해서 수천명이 광화문에 모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법원은 애초에 백명정도의 사람들이 모일거라는 약속을 믿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시국에 집회를 허락해주는 규칙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 법이 아니다. 그 보수단체는 정상수위를 넘어간 정신병자들인데도 판사는 그들이 약속과 질서를 지키는 사람으로 대우해 준다는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제정신이라면 그들이 방역지침따위는 무시할거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데 말이다. 

 

위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금지라는 식으로 가면 이 세상에 가능한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훌룡하고 상식있는 시민들은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허락을 해줘도 상식있게 행동해서 그 위험을 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세상은 돌아가는 것이다. 그게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게 법치다. 법치라는게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건 미리 다 금지시켜야 한다는 게 될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난 촛불집회때 그것이 폭력집회가 될거라고 생각했는가.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들은 훌룡한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하지만 보수단체 집회에는 까쓰통이 등장하는 일도 있다. 노골적으로 코로나 음모론같은 것을 퍼뜨려서 과학자들과 질본을 우습게 만든다. 그런 사람들이 백명이 모일거라고 하니까, 집회를 해도 잘 할거라고 하니까 믿어줬다고? 

 

이 세상은 "정부가 2단계 사회적 거리두기를 발표하면 몇명이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는 할 수 없다"는 따위의 규칙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보수단체들이 보여주듯이 그런 규칙 있어도 그들은 안지킨다. 그리고 현실의 엄중함에 비춰서 규칙을 강하게 만들면 규칙을 잘 지키는 시민들만 피해본다. 실은 그들은 훨씬 더 합리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런 격리나 금지가 필요없는데도 그 규칙때문에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몰카범이 하나 나타났으니 모든 남자들은 자기 핸드폰 사진을 검사받아야 한다는 규칙을 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한명의 몰카범은 아마도 법망을 피해갈거고 대부분의 죄없는 남자들은 사생활침해를 받아야 한다. 죽일놈은 몰카범인데 벌은 일반인들이 받는다. 

 

이 세상을 돌리는 것은 법이전에 상식이다. 그리고 상식은 소통속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그런데 이 땅에는 소통이 안되는 집단들이 있다. 전광훈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현 정부가 병에 걸리지도 않은 사람을 잡아가두려고 코로나 양성을 선언한다던가, 북한이 그들에게 바이오테러를 가한거라는 주장을 한다. 그들은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믿으며 병원에서 탈출해서 방역당국과 추격전을 도심에서 벌인다. 법원은 이런 사람들을 지난 박근혜 촛불집회에 나온 민주시민들과 같은 사람들로 대접한다. 아니 전광훈을 보면 이들이 더 잘 대접받는 것같다. 애초에 그가 왜 풀려나야 하는가. 민주시민은 물대포에 맞아 죽는데 말이다. 애초에 이런 인간의 말이 왜 중요한 의견으로 언론을 타야 하는가. 누가 이런 괴물을 키웠는가. 

 

현정부들어서 자주 대두되는 문제가 바로 이 인간내지 시민이라는 테두리 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다. 식상한 진보주의자나 민주주의자는 인간평등이나 소수자 존중정신 같은 것에 지나치게 중독되어 있다. 물론 박근혜의 심복인 최순실 같은 여자가 민주주의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최순실만 민주적 권리를 누리고, 전광훈만 민주적 권리를 누리면 역차별이다. 민주정부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이 역차별 문제에 짜증이 난다. 세월호 사고에서 자식들이 죽었는데 국가는 피해자 부모들을 사찰했다. 그런데 전광훈은 좋은 세상에 산다. 

 

너무 쉽게 이게 정상적 사회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현실에는 역차별이 있고 그로 인해 생기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하는데도 그게 어쩔  없는 ,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분노는 증가하게 된다. 결국은 현정부의 무능으로 여겨질 것이다. 법이나 규칙의 개정만 만지작 거리지 말고 문제의 본질을 보고 실용적으로 대처해야  것이다. 만악의 근원중의 하나는 사법개혁이 지지부진한데 있다. 법을 바꿔서 뭐하겠는가. 그걸 실행하는 사람들중에 미친 사람이 많다면

 

%이 글은 2020.8.17일에 올린 글입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사진을 빼고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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