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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에서 옳고 그름만 중요한 것일까?

by 격암(강국진) 2018. 9. 22.

요즘 미투 운동도 있었고 몰카 문제도 보도가 많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것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현실에 맞춰서 유연한 태도를 가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자칫하면 성추행좀 당해도 참아라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 나는 범죄자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유연하고 침착한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피해자만 만들고 대책없는 싸움만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간의 성추행 문제가 생기는 기본은 결국 남자와 여자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 여러가지 상황이 생긴다. 남자와 여자가 야근을 같이 하게도 되고 일때문에 밥을 같이 먹게도 된다. 좁은 공간에 같이 들어갈 일도 생기고 물론 실제로 연애도 한다. 심지어 불륜도 생긴다. 


성추행의 문제가 전부 그 문제는 아니겠지만 성추행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의 하나는 공간의 변화다. 우리가 해수욕장에 있을 때와 법정이나 교실에 있을 때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기대한다. 수영을 하러 온 사람들이 남자 해변 여자 해변 가를 수 없으니 노출이 심한 수영복 입은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게 되어 있는 곳이 해변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상 노출의 정도로 보면 속옷만 입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한다. 왜냐면 우리는 대부분 이미 해수욕장이라는 공간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해수욕장이나 수영장에서 어떤 남자가 팬티만 입고 자기 앞을 지나간다고 펄펄 뛰면서 화를 내는 여자는 별로 없다.  하지만 아마 수영장이나 해수욕장 문화가 없는 시대의 여자를 타임머쉰을 태워서 그런 공간에 던져넣으면 그 여자는 바바리맨을 봤을 때와 똑같이 반응할 것이며 경찰을 부르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남자도 그렇다. 밤에 내 숙소로 찾아온 여자가 속옷만 입고 있다고 하면 나는 이 여자가 나와 자고 싶어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남자의 숙소라는 공간에 나타난 여자가 속옷만 입고 있더라라는 상황을 해석하는 유력한 한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해수욕장에서 수영복 입고 지나가는 여자들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성적인 유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드물다.  그것은 그곳이 해수욕장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 극단적인 예도 있는데 그것은 배우가 연기를 하는 촬영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배우자가 있거나 애인이 따로 있는 남자나 여자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적인 접촉을 하거나 다정한 말을 나누는 것을 많이 본다. 그래도 충격을 받지 않으며 그들의 파트너들도 기분은 별로 좋지 않겠지만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때로는 내 친구가 내 남편과 베드신을 찍는다는 이상한 상황도 이해한다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문제는 그럼 직장이라는 공간이라던가 대중 교통이라는 공간이라던가 학교라는 공간등 여러 공간이 또 존재하는데 그런 공간은 어떤 공간인가 하는 것이다. 내 수업을 듣는 여학생이나 내 지시를 받는 여자 대학원생은 나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기 때문에 그러는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하고 범죄를 저지른다. 


이런 생각은 그러니까 우리가 각각의 공간에 있어서 어떤 규칙이 적용되는 지를 분명히 하고 모두가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라고 결론을 내리기 쉽게 한다. 그리고 그런 것도 분명히 필요하다. 우리는 각각의 공간이 가지는 특성을 그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고 규칙을 잘 정해둬야 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같지만 남자와 여자가 단 둘이 식사하고 일하는 것을 피하자는 규칙도 있을 수 있다. 그런다고 반드시 성추행이 생긴다거나 연애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규칙의 존재가 모두에게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를 계속 기억하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빨간불일 때마다 차를 멈추는 것은 반드시 모든 상황에서 다른 차가 있어서가 아니라 빨간불이면 멈춘다는 규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한번 무시하면 자꾸 무시하게 된다. 그래서 한밤중에 차없는 길에서도 우리는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결론도 되지 못한다. 인간은 그렇게까지 똑똑하지 않다. 착각은 일어난다. 남자만 착각하는게 아니다. 모두가 착각한다. 현대 사회는 빨리 변하고 각각의 공간이 가지는 성격도 빨리 변한다. 남자만의 공간이었던 군대의 공간에 여자가 들어간다던가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남자들만이 만들던 직장문화속에 여성상사가 등장하던가 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조심해도 착각은 일어난다. 공간들이 변하고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 지는 속력이 각각의 공간에서 규칙을 정하는 속력보다 더 빠를 수 있다. 각각의 공간은 비지니스나 학업등 각자의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에 남녀의 문제로 규칙을 정하는 것이 거추장스러워지면 아예 그냥 여자는 받지 말자던가 남자는 받지 말자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자직원만 뽑았더니 회사의 수익률이 올라간다고 하면 남자들이 성차별이라고 비난해도 그렇게 하려는 욕구를 제어하기 힘들 것이다.  


공간에 대한 착각에는 안쪽과 바깥면이 있다. 바깥면이란 규칙을 지켰는가 안지켰는가에 대한 것을 말하고 안쪽은 만약 그 규칙을 깨면 그게 어떤 일인가에 대한 것이다. 길가는 여자의 치마속을 어떤 방법으로든 들여다 보고 그렇게 해서 그녀의 팬티를 봤다면 그것은 성추행이다. 하지만 해수욕장에서 수영복을 입은 여자를 봤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규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규칙이 깨지면 어떻게 될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길가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돌풍이 불어서 그녀의 치마가 위로 확 올라갔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팬티를 노출하게 되었고 마침 그녀의 뒤를 걷던 한 남자는 그것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당황한 그녀는 치마를 내리고 뒤를 돌아봤는데 그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올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남자를 성추행으로 고발했다고 한다. 


그 남자는 길거리라는 공간에서 다른 여성의 속옷을 봤다. 규칙을 깬 것같지만 고의가 아니었는데 그래도 엄지손가락을 올린다던가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성추행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그 여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게 성추행이 맞다고 생각한다. 해수욕장에서 마찬가지로 행동해도 성추행일테니까 그렇다. 


그런데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부분은 성추행이냐 아니냐의 판결이 아니라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의 문제다. 성추행이란 통상 아주 심각한 범죄로 여겨진다. 얼마전에는 여경이 자는데 그녀의 신체 일부분을 만졌다가 비명을 지르는 여경에게 놀라서 도망간 경찰이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성추행을 시도했던 것을 잘한 거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살을 감행할 정도로 성범죄는 심각하게 여겨진다. 과연 여자 엉덩이를 만지는 성추행이 음주운전으로 행인을 치어서 죽이는 것만큼이나 나쁜 범죄일까? 현실을 보면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바람때문에 내 속옷을 보고 그 상황을 즐긴 남자에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거나 인상을 써주거나 욕을 하는 정도로 넘어가면 안될까? 심지어는 그 남자와 함께 웃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웃기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걸 성범죄라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이게 성추행이냐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경찰까지 부르는 상황으로 만들어야 할까? 그런 엄숙주의가 오히려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을까?


내 생각에는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서 생길 수 밖에 없는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숙하게 대처하는 경향이 있다. 성의식이 너무 폐쇄적이다. 그때문에 오히려 성범죄가 만연하고 남자와 여자의 공존이 문제가 생긴다. 착각하고 혼동하는 일이 생기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짜로 중요한데 성범죄에 대한 지나친 엄숙주의가 그것을 오히려 막는다. 그러니까 성추행을 하는 상사가 있다고 해도 그 상사에게 이러면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기가 오히려 어렵다. 어떤 식으로건 말을 꺼내면 그 다음에는 너 죽기 아니면 나 죽기의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을 안하면 말을 안했다고 해서 동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의 오해는 더 깊어진다.


남자건 여자건 착각과 실수는 일어나기 마련이며 그것에 대해서 관대한 입장은 필요하다. 이것은 당연히 성추행범들을 옹호해주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식으로든 서로간에 동의없는 육체적 접촉을 하면 사형인 나라가 있다고 하자. 변명은 없다. 그런 나라에서 남자와 여자가 같은 버스를 탈 수 있을까? 같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을까? 그럼 그런 나라에서는 성범죄가 없을까? 스치면 사형인데 스친 김에 강간하겠다는 사람이 없을 것같은가? 어차피 사형인데 고발을 막기 위해서 살인도 불사하는 사람이 없을 것같은가? 


결국 이런 가상의 나라에서는 여자가 보호받는 게 아니라 철저히 억압된다. 길거리에 여자가 돌아다니는 것은 기본적으로 여자의 철없는 행위다. 왜냐면 그 여자는 무수한 길위의 남자를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직장에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 같이 일하는 남자들이 위험하지 않은가. 결국 가끔 정말 재수없이 정말 악의 없이 길가다가 여자와 부딪히고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바보같은 남자들만 끌려가서 사형을 당한다. 반면에 연쇄강간범들은 잘산다. 그들은 악당이라서 혼자만 죽지않겠다고 협박도 하고 증거도 조작하고 재판정에 가서 거짓말도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인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좋아서 그랬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여담이지만 이게 경제분야에서의 한국의 현실이다. 빵하나 훔친 놈도 유죄고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도 유죄지만 빵하나 훔친 사람은 법은 법이라면서 엄격히 처벌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인간들은 대개 온갖 방법으로 처벌을 피한다. 정의를 이룩하려면 우리시대의 핵심적 모순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큰 범죄인지를 생각하고 처벌해야 하는데 세상은 자꾸 사소한 정의에만 집중한다. 3천원 횡령한 버스운전사는 파면이고 3조 해먹은 사람은 떵떵거리고 잘 산다. 


남녀문제도 그래야 할까? 그런 식으로 좋은 세상 올까? 남자와 여자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지금의 우리의 윤리기준으로는 기분나쁘고 상상하기 싫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윤리기준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많이 바뀌어 왔다. 예전에는 아내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간다고 하면 남자가 미쳤냐고 할 시절도 있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가지는 권리는 무엇인가를 따지기 전에 내 아내의 노출된 다리를 다른 남자들이 본다는 것을 남편들이 참을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촌스런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영장에 가면 우리는 그 환경에 적응할 도리밖에 없다. 수영장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현대사회는 여러가지 환경이 점점 그 비슷하게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규칙을 정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해야겠지만 남자에게 손목을 잡히면 정조를 잃은 것이니 은장도로 자결해야 하며 그 남자도 죽여야 한다는 식의 윤리의식으로 이세상을 살 수는 없다. 성윤리를 붕괴시키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 전에 인간도 좀 보자는 것이다. 인간은 착각도 하고 실수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게 더 쉽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다. 뭐가 성범죄인가같은 질문을 던지고 공권력의 개입을 외치기 전에 서로 지적하고 같이 잘 살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좋은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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