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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교훈

by 격암(강국진) 2019. 1. 29.

방송을 보다 보면 나는 요즘 역사전공자가 인기가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나 유명한 강사인 설민석 혹은 유명 트위터러인 전우용은 모두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아니라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유시민이 그렇고 유홍준이 그렇다. 


그런데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우리에게 뭘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뭘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일단 사실들을 준다. 역사가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과거에 대한 사실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글은 1443년에 창제되었다같은 사실들 말이다. 



그런데 서로 연결되지 못한 사실만 있다면 그것들이 넘쳐나도록 있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역사는 이야기도 준다. 역사가는 하나 하나의 사실들을 이어서 하나의 혹은 다수의 이야기를 만든다. 우리는 종종 이 이야기들을 그냥 역사라고도 부르는데 이 글에서 나는 그것을 학문으로서의 역사와 구분하여 역사이야기라고 부르겠다. 그런데 이 역사이야기들은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역사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포퍼가 마르크스사상을 비판한 이래 역사적 사실들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라고 널리 알려졌다. 


일단 정의 자체가 불명확하다. 우리가 역사에서 말하는 국가라던가 시장이라던가 종교라던가 노동이라고 하는 말들은 다 애매하게 정의 된 것이거나 현재의 정의를 과거로 혹은 서양의 정의를 온 세계로 확장한 것이다. 또한 현대과학은 뉴튼시대이래 세상을 측정가능한 양으로 묘사하는데 집중했기에 검증가능성이 생겨난 것이다. 정치 경제를 수치적으로 묘사하여 이론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건 아직도 진정한 과학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 아마도 영원히 그럴 가능성이 크다. 빅데이터같은 것이 새로운 돌파구를 준다고 해도 그건 과학이론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에는 역사의 발전법칙같은 것을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이 꽤 있다. 하지만 그건 과학이 아니고 가설이며 다시 말해서 과학적 검증을 통과한 이론이 아니다. 제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말이다. 사회과학이론과 과학이론은 둘 다 이론이라는 말을 쓰지만 후자가 검증되어 법칙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자는 기본적으로 믿음과 가치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가설같은 것이다. 후자와 전자는 과학과 신화가 다른 것처럼, 과학과 소설이 다른 것처럼 전혀 다르다. 그리고 사회과학이론과 역사이야기는 같은 부류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의 강의를 보다 보면 그는 여러번 말한다. 자신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미래는 예측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여러가지 미래중에서 우리가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미래는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며 하라리는 인문학자가 비관적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가 반드시 비관적인 것으로 결정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 인문학자로서의 임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술의 긍정적인 면은 기업가들이 열심히 광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역사의 역할이란 예언이 아니라 어떤 것이 가능한 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양심있는 역사가들의 경고와 고백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역사이야기에 집중할 뿐 역사가의 경고에는 큰 관심을 보내지 않는다. 과학이론과 역사이야기를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하나의 역사이야기가 이미 존재하면 그것과 다른 역사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첫번째 이야기가 틀린 것으로 판정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사실들 중에 틀린 사실 하나가 있으면 그것으로 전체 이야기가 다 부정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배중률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자체가 그들이 역사이야기와 과학이론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역사 이야기는 엄격히 따지자면 소설같은 문학으로 진실의 작은 일면만을 보여줄 수 있는 허구다. 그걸 진리나 과학이론 같은 것으로 지나치게 맹신해서는 안된다. 


역사가들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풍조는 이데올로기들의 맹신자를 만든다. 역사이야기를 과학법칙으로 믿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이야기란 제 아무리 그럴듯해도 결국은 어마어마한 사실들로 넘쳐나는 수천년의 시간에 선 몇개 그어놓고 모든 걸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인간의 유한한 행위의 결과다. 우리는 단 한명의 인간에 대한 역사이야기도 결코 완전하게 쓰지 못한다. 그러면서 쉽게 천년의 역사를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성이라던가 생명의 신비를 모른다고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이상기체속의 원자처럼 취급하며 과거와 세상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군중은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딱 한두발자국만 더 가면 나는 우리가 믿는 것의 거의 대부분을 무의미한 것, 근거가 없는 것으로 말하게 되며 따라서 민족이나 국가라는 테두리도 매우 무가치한 것으로 말하게 된다. 말하자면 역사이야기를 소설가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 형식상 무신론자가 기독교나 불교같은 종교를 말하며 그것은 과학적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로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서 종교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역사이야기에 대한 이 모든 비판 후에 이야기야 말로 중요한 것이며 우리는 이야기의 숭고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그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 만든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한 후에는 그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이 글을 마치고 싶은 것이다. 사실 형이상학 즉 믿음이 없이는 어떤 학문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믿음과 사실의 균형위에서만 합리적일 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몰려가는 것은 쉬운 길이고 명쾌해 보이는 길이지만 결국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역사의 본질은 긍정이다. 조선사란 말하자면 조선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고 인류사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다. 하나의 이야기는 그 주인공의 관점에서 본 사실들로, 그 주인공을 둘러싼 사실들로써지는 것이다. 일본사람이 쓴 일본사는 일본이 조선에게 한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조선은 발전의 가망이 없었으며 스스로를 해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사실들을 가지고 논할 수도 있지만 그 믿음이 궁극적으로 사실들에 기반하여 증명되게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믿음은 마치 상대방을 죽이면서 너는 지금 네가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다그치는 것과 같은 모순된 행위이며 기독교 신자가 기독교의 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불교신자에게 사실을 잘 따져서 왜 불교가 틀렸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겠다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이미 출발점에서 자신의 가설을 사실로 여기면서 남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회적 문제의 대부분은 지금 내가 말한 문제와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신화의 단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학의 수준에 있다고 과신한다. 그러나 인간문명이란 사실은 매우 소수의 분야에 있어서만 과학의 수준에 있다. 다시 말해 검증가능하고 객관성을 논할 수있다. 그러므로 설사 과학자라고 해도 우리는 상당한 경우 믿음에 근거하여 세상을 살 수 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믿음, 가족에 대한 믿음, 지역사회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이 그 예들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제시해 준다. 그것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아름답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에게 너무 쉽게 과학과 법칙의 수준에서 사물을 믿지 말라고 가르쳐 준다. 안타깝지만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길게 훈련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의 합리성에 대해서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득중 하나는 바로 이런 것을 피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극단론적인 이야기들에 잘 흔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과학은여전히 겉돌고 있다. 그것은 뼈속깊이 스며서 삶의 방식이 되기보다는 그저 돈버는 수단이나 재미있는 놀이거리정도로 여겨지는 일이 많다. 그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에 너무 잘 속고 스스로를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의 소중함을 지나치게 쉽게 망각한다. 이래서는 21세기에 여전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같은 논쟁을 반복하거나 우리의 관점을 잊고 남의 이야기의 노예가 되는 일만 생긴다. 


어쩌면 인간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뿐일 수 있다. 본능에 따라서 사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그게 필요없지만 우리가 통상 말하는 위대한 지성체이고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이야기의 힘에 기대어 세상을 산다. 위대한 이야기는 반드시 역사가가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비전가가 씨를 뿌리고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아서 완성해 가는 것이다. 역사가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역사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이 하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나라와 문명은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또 하나다. 그들은 기록하고 후술할 뿐이다. 위대한 미래는 역시 여전히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의 힘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그 통찰력에 있는 것이지 사소한 사실들의 정확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과학으로 접근하지 말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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