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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가는 한국의 지성

by 격암(강국진) 2019. 1. 31.

최근들어서 나는 한국의 상태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것은 경제문제나 외교문제같은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지성 그 자체에 대해서다. 모든 사람들이 프로축구선수가 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농부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한 사회에는 지식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나 조직이 존재해야 한다. 그들은 언론이고 또한 학계이며 사법부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일을 한다. 



지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통상 개인적인 수준의 지성을 떠올리지만 사회적인 수준에서 말할 때 지성이란 단순히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의 지적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판단보다 못한 판단을 하는 집단은 쉽게 볼 수 있다. 사회나 집단이 지성적 판단을 하려면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절차가 작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법정에서 뭔가가 결정되면 그 결정이 합리적인 것으로 믿을 수 있어야 사회적인 소통을 할 때 최소한의 기준이 정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기준없이 논쟁하게 되고 그래서는 이쪽은 한국어를 하는데 저쪽은 독일어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서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금 그 모든 것들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거나 이미 추락했다. 대학교수는 지성의 상징같은 존재지만 요즘에는 대학교수를 그다지 존경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사회적인 역할이 별로 지성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그들의 존재감이 거의 실종되었다는 느낌이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무게감있게 기준을 정해줄 지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한국의 서점만 가도 알 수 있다. 외국번역서나 소설 아니면 재테크 책이나 자기 개발서가 넘쳐나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무게감있는 한국의 지성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고전을 가르치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희박한 것같다. 나라전체가 대학입시에 매달리지만 정작 서점에 가면 우리나라 대학의 존재감은 별로 없다. 그 많은 교수와 그 많은 지식은 다 뭘하고 있는 것일까?


기자는 이제 주로 기레기라고 불린다. 괜찮은 기자들도 아직 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더이상 기자가 지적인 엘리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은 이제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돈받고 여론을 조작해 주는 용역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기자들에게서도 별로 사상과 지성과 자존심을 느낄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정말 양심적으로 기사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이제 양심있는 기자는 진작에 기자하기를 그만 뒀는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혼탁한 시대에 저항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사법부의 권위도 추락했다. 양승태나 우병우같은 사람들이 저지른 일들이 보여주는 것은 법원도 결코 공평하지 않고 담합을 한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변호하고 고발하면서 나타나게 된 것은 그 대단해 보이던 판사며 검사며 변호사들이 그다지 대단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연일 성추행이며 폭행이며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 공감할 수 없는 재판이 쏟아지는 것을 들어야 한다. 30년쯤 전에는 그런 자료들이 돌아다니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무슨 판사가 이번에 이런 판결을 내렸다더라, 무슨 판사가 이런 영장을 기각했다더라라고 인터넷을 통해 전국민이 쉽게 알게 된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사회적 지성의 대표적 기둥들이 몰락하자 사회적 가치도 흐려졌다. 남은 것은 오직 내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 수 있는가만 남은 것같고, 그저 더 큰 쾌락이 인생의 답인 것같다. 먹고 마시고 성적 흥분이나 사치의 흥분을 전달하는 컨텐츠가 넘쳐난다. 그러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불안만 더 커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사회가 기준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를 아무도 믿지 않게 되면 다시 요정이며 도깨비며 부엌신이 세상을 채우게 된다. 가짜 뉴스가 오늘날 큰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반드시 그런 뉴스가 잘 퍼질 수 있는 네트웍이 발달해서가 아니다. 그 이상으로 지적인 중앙의 권위가 무너진데 이유가 있다. 중앙의 권위라고 하면 왠지 권위주의적인 것같지만 한 나라에 교통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없듯이 지적인 권위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끝없이 음모론에 시달려야 하고 진실이 음모론 취급을 받아야 한다. 


최근들어 인터넷 커뮤니티가 날로 혼탁해지고 시들어가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야 말로 인터넷이 모두 일베같은 사이트가 되는 느낌이랄까. 커뮤니티 게시판에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시사게시판에서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그 이유의 표면에는 가짜뉴스나 소위 작전세력이 있겠지만 그 바닥으로 가면 결국 한국 사회의 집단 지성이 몰락했다는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성의 기준이 무너지면 지적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소통이 진흙탕싸움이 되고 옥석의 구분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일어나는 전세계적 현상인지 아니면 재벌이나 수구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의 지성을 지속적으로 훼손해 왔기 때문에 벌어지는 한국적인 현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주류교체가 만들어 내고 있는 혼란일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모두가 사실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지금 한국은 조금씩 조금씩 고통지수가 올라가고 있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가 퍼지는 것을 계속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이익집단이나 비공개적 커뮤니티속으로 숨을 수 있다. 회사나 법인이나 공동체 내부로 숨으면 그 안에서는 훨씬 더 지성적인 소통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로 그런 작은 단위에서는 중앙의 질서가 뭔가의 이유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폐쇄적 집단은 부패하기 쉽고 누구도 사회적 합리성에 대해 무관심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지성을 찾고 있다. 최근 유시민같은 사람의 인기가 올라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생각과 판단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야 한다지만 뒤집어 말하면 모든 생각을 스스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회적인 소통과 협력이 있어야 개인의 지성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구심점은 있어야 할지 모르지만 물론 이것은 한 사람이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지성적 집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는 그것이 보이질 않는다. 그것이 큰 걱정이다. 지성의 몰락이란 결국 사회의 몰락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 지면 심각해 지지 단기간에 해결될 것같아 보이지 않아 걱정이다. 모든 것이 다 잘되기를 바라지만 이런 혼란이 다시 암흑의 시대를 부르는 일이 있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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