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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는 왜 허구 일까?

by 격암(강국진) 2019. 2. 10.

사실에 대한 영어표현인 팩트가 중요하다는 표현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이 말은 당연하게 들린다. 왜냐면 팩트가 중요하다는 말의 부정은 팩트는 혹은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표현이 되는 것같기 때문이다. 사실이 안 중요하다면 거짓말을 해도 되고 근거없는 판타지를 펼쳐도 된다는 말이 되므로 사실이 중요하다라는 말은 과연 옳은 말같다. 하지만 사실 팩트란 말 자체가 허구이며 서구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팩트가 중요하다는 말을 주문처럼 지나치게 외우는 사람은 선입견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이러한 특이한 관점의 광신자인 셈이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팩트란 어떤 것에 대해 유한한 길이를 가진 정확한 진술을 말한다. 그런데 유한한 길이를 가졌다는 것은 그것이 주어진 주제의 일부분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에 이 세상이나 이 사회에 대한 팩트라면 그것은 이 세상이나 이 사회에 대한 어떤 일부분만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이 바로 환원주의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다. 우리가 팩트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하나의 가정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은 팩트들의 합으로 이뤄져 있다


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아주 오랜 기간이 걸릴지라도 하나하나의 팩트들을 합쳐서 이 세계를 재구성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집은 벽돌로 이뤄져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 다른 좋은 예들인 원자론과 사회계약설도 이런 형태로 이뤄져 있다. 원자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물질들은 원자의 합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하며 홉즈가 리바이어던에서 처음 주장한 사회계약설에서도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이라는 존재들의 합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사실 유한한 인간이 말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유한하며 따라서 어떤 것이든 전체에 대한 일부분일 수 밖에 없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팩트가 중요하다같은 사실을 말할 때에는 특히 더 유한한 경향이 있다. 왜냐면 팩트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가치명제라고 부르는 것을 제외하며 참거짓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어떤 진술이 길어지면 참거짓을 논하기 어렵고 좋다 나쁘다 같은 개인적 취향이 들어가는 가치명제를 포함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한줄의 문장을 팩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한권의 전기책을 통째로 팩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 책에 사실과는 다른 것이 들어갔거나 주관적 판단에 해당하는 가치 명제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때문이다. 따라서 팩트를 강조하는 사람은 사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을 최대한 잘게가 아니면 적어도 상당히 잘게 나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 하나 참거짓을 논하기 어렵고 분석적 논의가 애매해 지며 따라서 객관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을 잘라낸 그 팩트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일종의 고립계를 상상하여 그 팩트라는 작은 부분은 이 세상의 나머지 부분이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지금 다른 모든 부분을 잊어버리고 그 작은 부분만을 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성질을 논할 수 있고 따라서 참거짓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현대문명이 가진 힘의 대부분이 환원주의적 분석에서 나온다거나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이 종종 세상에 대해 대단히 좋은 설명을 준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것들이 한계를 가지는 이유들은 여러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이 세계는 작은 팩트들의 합으로 이뤄져 있다는 출발점자체가 한계가 있다. 우리가 주관적인 것들을 배제했다는 것은 제외하고라도 그 작은 팩트들 하나 하나가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없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한계가 있는 가정이다. 


한가지 좋은 예는 바로 앞에서 말한 사회계약설일 것이다. 개인은 정말 사회가 존재하기 전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개인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사실 명백히 허구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사회가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다는 그 개인이 우리가 막연히 상식으로 말하는 사회의 기본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방식은 환경과 경험의 산물이다. 전쟁만 평생해 온 사람과 평화로운 마을에서만 살아온 사람의 행동은 당연히 서로 다르다. 


우리가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개인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면 그 극한에서 우리는 시체를 만나거나 짐승처럼 이성이 없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인간의 이성이란 타고나는 것 이상으로 말과 문자라는 사회적 소통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단 하나의 단어도 모르는 인간이 계약이란 것을 현대인이 보기에 합리적인 방식으로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사회가 계약에서 탄생하는가? 오히려 사회가 그 개인이라는 것을 만들어 온 것이 아닌가?


또한 애초에 우리가 뭔가를 부분으로 나누고 분석하는 것에는 본래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의도란 뭔가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인간의 몸을 본다고 해보자. 우리는 인간의 몸이 머리와 팔다리 가슴같은 여러가지 몸의 일부분들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몸을 그렇게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연스럽다같은 말은 속임수다. 몸은 무한대의 방법으로 나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눈의 절반과 코의 3분의 1정도를 합쳐서 쿤이라고 이름지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주어진 대상을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나누는 것은 그렇게 부분으로 나눴을 때 그런 분류가 좋은 이해력과 설명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코가 코인 이유는 애초에 그 부분이 그렇게 다른 부분과 나뉘어 설명되어졌을 때 몸의 이해가 쉬워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냈기 때문이며 따라서 코가 코인 이유는 애초에 코가 코가 아닌 부분과 비교되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걸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하곤 하지만 과학연구를 하면서 논문을 써 본 사람은 이 말이 가지는 미심쩍은 의미에 잘 속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사실 자신의 연구대상에 대한 수없이 많은 모델을 세워본다. 그런 모델들 중에서 생산성이 없는 모델은 분석이 안되고 따라서 이렇다할 결론을 내어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모델은 버려지는 것이고 그런 모델을 분석한 일은 발표되거나 출판되어지지 않으며 대부분 그저 우리 머리속에서 지나간 생각으로 사라질 뿐이다. 


반면에 그 분석이 성공적인 모델은 출판을 하게 되는데 과학자는 그런 경우 처음에 이런 식으로 그 모델을 세우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모델을 고려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경우 과학자들은 자신이 그 모델에 혹은 그런 분석적 방식에 도달하기 전에 소모한 수없이 많은 시간을 무시해 버리고 그걸 그저 자연스럽다라는 말로 얼머부린다는 것이다. 그 소위 자연스러운 모델의 선택이후 넘쳐나는 결과들을 보고 독자는 그 과학자가 천재라고 생각하기 쉬우며 실제로 그나 그녀는 천재일 수도 있지만 실은 대부분의 경우는 그나 그녀는 실패한 많은 모델을 언급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길고 긴 진화의 과정을 모두 무시하고 지구에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건 사기다.   


따라서 실은 부분은 전체에 대한 관련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그런 분석의 관점을 고안해 내는 동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코만 보고 있다고 해도 코는 애초에 그 출발부터 몸의 다른 부분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분은 정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다시 한번 팩트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특정한 팩트를 고려하고 그것의 참거짓을 따지고 있을 때 우리는 팩트만으로 보자면서 위선적 태도를 취하지만 사실 팩트는 그 팩트 자체로 고립되어 존재할 때가 없다. 어떤 팩트가 정말로 다른 사실들과 연관성이 없다면 그런 팩트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무한히 많은 수의 팩트들을 일일이 고려할 수 없고 고려해도 아무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노인이 길가는 젊은 여성의 미니스커트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저 여자의 치마는 무릎위로 한뼘은 되는 높이에 있군."


이 노인의 말은 팩트의 한 예다. 우리는 과연 과학적으로 그 사실의 참거짓을 논할 수 있을 것같다. 무릎위로 손을 댄다면 치마의 길이가 정말 무릅보다 한뼘은 높게 있는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런 경우 노인이 굳이 그 여성의 헤어스타일이나 키를 이야기하지 않고 치마 길이를 이야기하는 이유를 짐작한다. 아니 애초에 그 노인이 거리를 지나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치마가 유독 짧았던 그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를 짐작한다. 


우리가 특정한 팩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 팩트의 참거짓에 따라서 어떤 의미가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정말로 우리가 미리 아무런 의미에 대한 관심없이 무작위로 팩트를 뽑아서 참거짓을 논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어떤 의미를 가진 결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원숭이가 맘대로 타자를 치게하고 소설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어떤 부분을 부분으로 이름지을 때부터 그리고 하필이면 다른 팩트들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팩트에 주목할 때부터 해석을 가지고 있었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무한히 객관적이고 우주의 다른 부분과는 무관하게 참거짓을 논할 수 있는 팩트는 허구다. 세계가 팩트의 합이라는 것은 소설이나 역사가 단어나 알파벳의 단순한 합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허구거나 무의미한 말이다. 


분석적인 사고는 인간이 발견한 매우 쓸모 있고 강력한 도구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옳은 것도 언제나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이 분석적 사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오늘날 절박한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종종 세상의 구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그들은 앞에서 말한 그 자연스러운 분석이라는 말속에 빠져서 눈이 멀어버린다. 단계 단계의 논리적 구조만 보다 보면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탈출구가 없는 명백함을 가진 것같다. 


분석적 사고에 중독된 사람들은 종종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분석적 사고를 써서 진짜로 어떤 결과물을 내놓으려고 노력했던 과학자들은 오히려 괜찮다. 그들은 그걸 어떤 결과를 내기 위한 도구로 쓰면서 분석적 사고를 실용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게 된다. 반면에 분석적 사고를 형식적으로 배운 사람들 혹은 그것을 그 한계에 이르도록 밀어부쳐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의 맹신도가 되기 쉽다. 그리고 이런 경우 더 엄밀하게 사고하려는 노력은 종종 우리의 사고를 오히려 엉망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분석적 사고 혹은 개인주의적 사고의 대안도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우선적으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객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성이란 궁극적인 한계에서는 마치 우리 마을에서는 한국어를 쓰니까 온 우주에서 한국어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허구다. 우리가 같거나 비슷한 상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러워 보이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모델을 공유하게 된다. 이런 팩트들을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 유한한 경계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팩트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양인들은 이미 문맥의 중요성을 세옹지마의 이야기로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왔다. 즉 누군가가 다리를 부러뜨렸다거나 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다른 사실들과 어떻게 관계지어지는가에 따라 같은 사실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어서 어떤 일은 다시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론 여기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함께 다루는 진정한 절대적인 문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 


분석적 사고에 빠진 사람들이 종종 저지르는 또 하나의 실수는 소중한 자신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다. 왜냐면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감정은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존재하는 데이터를 무시하고 따지고 보면 별 근거도 없는 관점을 객관적이라고 혹은 자연스럽다고 여기며 그에 맞춰서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쉽다. 


우리는 종종 선입견을 가지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마치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처럼 들리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건 그것도 결국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선입견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선입견을 피하고 객관적이 되자는 말은 때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를 엄청나게 바보로 만든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나쁘지만 사소한 범죄이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주 나쁜 일이라 크게 벌해야 한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나쁜 일입니까 아닙니까하는 질문에 빠지거나 범죄라는 단어에 빠져서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데 바빠지고는 한다. 그 일이 너무 바빠서 살인범을 처벌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누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는 자기 내면의 소리는 최대한 억누르고 부질없는 말과 법의 미로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린다. 분석적 사고, 객관적 사고가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데이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한계가 있는 유한한 데이터라고 해도 데이터를 버리고 근거없는 말을 쫒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합리성이나 이성이란 말이 고립되어 존재할 수 있는 개인의 소유물이기 보다는 상식처럼 사회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부질없이 절대적인 정의나 나 혼자만의 정의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이성이 사회라는 게임의 부산물이라면 우리는 사회적 영향력를 배제하고 시비를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는 우리가 어떤 데이터를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걸 기반으로 우리가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고민할 것이다. 


분석적 사고가 맹신되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외부의 영향을 부담스러워하며 자신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주변으로부터 떨어지는 일을 좋게 생각한다. 진정 자기로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고립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늘상 타인들과 섞여있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남들을 따라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들을 자명한 것으로 여길 것이며 이것이 실은 분석적 사고라는 한가지 관점의 영향아래서만 자명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망의 시대를 살고 있고 데이터 혹은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분석적 사고가 만들어 낸 이성은 그 한계를 들어내고 있고 우리는 이성이나 인간이 뭔지를 재정의해야 하는 시대를 앞두고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하는 일은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다. 팩트가 중요하다같은 낡은 구호에 지나치게 빠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물론 지당한 말일 때가 많지만 가장 바보같은 말일 때도 많다. 그것은 서구적 사고방식의 권위에 짓눌린 소리일 때도 많다. 그것은 절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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