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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행동의 이유

by 격암(강국진) 2019. 1. 13.

얼마전에 세계를 차를 몰고 여행하시는 분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블로그를 하다보니 가끔 있는 일인데 제 블로그를 찾는 분이라면서 연락해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이 전주에 오실 일이 있다고 해서 차 한잔 한 것이죠. 그런 일이 있을 때 언제나 그런 것처럼 우리는 찻집에 들어가서 실컷 잡담을 했습니다. 그 때 나왔던 주제 중의 하나가 감정이랄까 열정같은 것이었죠. 저는 이러니 저러니 많이 따지고 배우고 생각해야 하지만 결국은 끝에가면 자기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막 찍는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쯤 가면 그렇게 많이 따질 필요 없다는 겁니다. 즉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저는 이런 말도 했던 것같습니다. 사람은 결국 절실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하지 않게 된다고. 절실한 마음이라는 것도 결국 감정이니 저는 감정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던 셈입니다. 



오늘은 아내와 티비를 보다가 방구석제1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변호인과 재심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듣게 된 노무현의 이야기에 다시 한번 눈물 흘리는 저를 보면서 저는 역시 감정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노무현에게 빚을 진 것같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봤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그렇게 느낍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저는 감사해야 마땅합니다만 노무현 같은 분이 이땅에 계셨기에 저는 한국에게 빚을 졌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으며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 변화인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말입니다만 사실 한 개인인 제가 수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모두 개인적으로 알게 되지는 않습니다. 촛불혁명이나 87년 6월민주화운동같은 민중을 느끼게 되는 사건도 있습니다만 그것에 못지않게 국민과 나라를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했었던 개개의 인간들을 통하는 것입니다. 김구가 그렇고 전태일이 그러하며 김대중도 노무현도 그렇습니다. 굴곡많은 삶을 살았던  그 분들의 삶을 보고 들으면서 때로는 안타까워하지만 때로는 우리 사회 전체에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분들은 우리는 문재인 보유국이다라는 말을 한다고 하지요. 저도 문재인 지지자입니다. 저도 그 비슷하게 느낍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분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은 대단한 나라다. 이렇게 느낍니다.   


이런 감정은 물론 애국주의적 감정이며 여기에만 빠지는 것은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 저는 다시 한번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하고 움직여온 가장 중요한 감정중의 하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판단들은 상당수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것입니다. 돈이라던가 취업이라던가 아이들 교육이라던가 우리 가정의 화목이라던가 하는 개인적인 이유가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되는 일이 많지요. 예를 들어 책을 쓴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으로 돈과 명예를 얻고자 하는 야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으며 생활인으로써 그것은 잘못된 것이 절대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만 채워진 일상은 우리를 초라하고 작게만 만듭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때로 우리는 개인과 작은 가족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감정을 느낍니다. 그것은 생명 일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인류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바로 한국같은 국가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요. 그런 감정이 우리를 한 개인 그리고 한 가족의 일원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이 블로그는 무슨 계몽사업을 하고자 시작한 것이 아니고 저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나간 나를 지키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글쓰기의 큰 부분을 노무현이 차지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얼마 후 저는 저도 뭘 쓰는지 모르면서 이름도 없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제가 쓰던 글과는 매우 다른 글이었죠. 그게 이 블로그에도 올려져 있는 연작에세이라는 글들입니다. 


그걸 쓰고 저는 사실 저자신에게 약간 놀랐습니다. 쓰고자 하지 않았지만 이전에는 그렇게 긴 호흡으로 뭔가를 쓴 적이 없었고 뭘 쓰는지 모르면서도 글이 그렇게 계속 써졌던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느꼈죠. 글이란 감정없이는 써지지 않는 다는 것을. 그간 잊고 있었습니다만 그 연작에세이의 첫번째 시작 부분을 다시 확인해 보니 저는 사실과 가치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사실과 가치의 구분을 논하면서 혼탁한 시대를 통과할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글을 앞에서도 말한 어느 정도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썼었습니다. 즉 뭘 얻고자 하는 의미에서라기 보다는 써줘야 할 부채처럼 여기며 썼다는 것이죠. 


감정으로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부채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만 정리하고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스스로 나 개인에게 있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런 저런 지위나 돈이나 지식나 새로운 경험도 있으면 즐길 것이지만 그것들이 없어도 뭐 딱히 아쉽지도 절박하지도 않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왜 뭔가를 할까요? 저는 그것이 부채의식이 되기 쉽다고 여깁니다. 


아내에게 또 아이에게 뭔가를 해주면 내가 뭔가를 지금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될텐데 하는 생각은 이런 사람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별로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줬어야 할 것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 바로 부채의식이 있을 때 미안하고 안타까워 움직이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연작에세이를 쓸 때도 저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짧은 책 한권이 될 정도의 분량입니다만 이 글을 써서 내가 뭔가를 더 가지게 될거라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원고료는 이미 받아서 다 써버렸으니 써줘야 하는 원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이라까요.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은 한국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과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저는 그간 제가 배운 것을 써서 돌려줘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감정이라고 해도 여러가지 감정이 있겠죠. 그런데 가장 기분 좋은 감정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과 아주 비슷한 감정이 부채의식입니다. 그건 뭔가 이미 엄청 받은 듯한 느낌. 그래서 뭔가 많이 갚아줘야 할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속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나 자신에 대한 걱정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진짜 기분좋게 뭔가를 할 수 있는 것같습니다. 때로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이 그런 감정을 자꾸 일깨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게는 노무현이 그렇습니다. 노무현의 기억은 그것을 더듬을 때마다 마치 그가 우리에게 우리가 진 빚을 잊은 건 아니겠지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감정, 부채의식, 사랑. 결국 끝은 아주 흔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았군요. 그렇습니다. 결국은 사랑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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