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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령기자와 탈권위주의

by 격암(강국진) 2019. 1. 11.

대통령의 기자회견때 질문을 한 경기방송의 김예령기자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그가 한 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비난과 옹호가 나오고 있는데 대개 그 핵심은 기자는 뭐든지 질문을 할 수는 있지만 두리뭉실하게 요점도 불명확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으로 정리되는 것같다. 뉴스공장에서 진행자 김어준은 기자는 도발적인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김예령기자는 대통령이 이미 다 답을 한 사안을 다 무시하고 애매모호하게 무슨 자신감이냐 근거를 대라라고 말함으로써 그냥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고 평했다. 



나는 여기에는 고의적으로 혹은 착각때문에 반복되어지는 오류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탈권위라는 것이 예절의 실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교통법규가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없으며 그런 나라는 자동차가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라 자동차 지옥이 되고 만다. 따라서 하나의 교통법규는 오직 다른 교통법규로 대체될 수 있을 뿐 규제철폐라고 해서 교통법규가 없는 나라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탈권위를 아예 예절의 부재로 보는 것은 고의적으로는 범하는 오류가 아니라면 착각이다. 대통령에 대한 예절도 하나의 예절에서 다른 예절로 바뀌는 것일 뿐 예절이 존재하지 않고 규칙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이것을 굳이 지적하는 것은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들과 그 지지자들은 이 오류를 자꾸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명박이나 박근혜 혹은 전두환이나 박정희 시대에는 과도하리 만큼 권위를 강조하고 고개를 숙이다가 노무현이나 문재인 정부같은 탈권위주의 민주 정권이 들어서면 대통령을 아예 대통령 취급을 하지를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 들어가도 일어서지를 않고 노무현에게 학번이 뭐냐고 묻는 검사도 있었다. 그들의 비아냥은 한마디로 줄이면 이렇다. 


"탈권위라며? 대통령은 나와 동급아냐?"


이것은 오류다.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통령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했더니 이제는 대통령을 하인이나 친구취급하듯이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그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봉건주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즉 세상은 왕이 아니면 신하나 백성이나 천민이라고 생각하니까 왕이 아니라면 그러면 친구나 하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봉건제도는 그냥 붕괴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화제도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냐면 여전히 봉건제도를 믿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었다는데 자기 눈으로만 세상을 보니까 예의가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예절이 뭐고 그 핵심은 뭘까. 나는 그 핵심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다고 생각한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소통이 없었다. 그저 상명하복이 있을 뿐이니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릴 위치인가만 파악하면 대화란 사실 명령을 의미했다. 민주정부 시대의 핵심은 소통이다. 소통은 명령과는 다른 예절을 요구한다. 


대통령의 시간과 말은 소중한 것이다. 대통령은 아주 많은 사회적 투자를 통해서 탄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은 한국 시민들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너도 나도 탈권위라는 이름으로 다 질문을 던지면 그건 대통령의 직무를 방해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을 태극기부대에 나오는 노인들이나 극우 성향의 패널로 이뤄진 곳에 데려가서 온갖 흙탕물 질문을 계속 듣게 한다면 어떨까? 어떤 대답을 대통령이 하건 그런 질문들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대통령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대통령은 누구의 질문에건 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다수의 사람들의 의사를 오히려 짓밟는 것이 아닐까?


사실 수준이 전혀 다른 것이지만 나는 온라인 게시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종종 본다. 싸우자고 덤비듯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언뜻 보면 토론을 하자고 하는 건전한 행동을 하는 것같지만 그들은 토론은 소통이고 대화지 결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은 싸움을 하자고 덤비며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성실함을 버리고 공격만을 위한 말을 한다. 그런 대화내지 토론은 그야말로 알파벳도 안외우고 아무 말이나 던지면서 상대방에게 나에게 영어가 뭔지를 가르치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애초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설사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왜 아무 고심도 없는 사람의 정신을 애써 수고롭게 고쳐줘야 하고 그것이 비효율적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토론에 패배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 


탈권위 시대의 예의의 핵심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그 사람을 나보다 높은 사람으로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충분히 열린 자세를 가지고 충분한 성실성을 가지고 소통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실성이란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상대방에 대한 성실한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일관성을 유지하고 논점을 분명히 하고 수긍할 것은 수긍하면서 대화를 해야지 상대방의 말은 듣지도 않으며 내말만 하는 것은 성실한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애초에 명령만 듣는 권위주의 시대와는 다른 것이다. 명령을 내릴 때 한쪽은 그야 말로 내말만 하고 다른 쪽은 받아적기만 한다. 그런건 소통이 아니다. 


이런 점은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권위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이것만큼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명령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불복종으로 여기고 자신이 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무 생각없이 명령만 기다린다. 그들은 탈권위주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를 못한다. 김예령 기자의 용감한 질문과 여러 시민들의 분노는 이런 오류가 흔하게 목격되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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