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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책을 읽지 않을까?

by 격암(강국진) 2019. 1. 11.

통계마다 차이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한국인의 독서량이 OECD 국가중 최하위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이런 비교나 통계가 아니더라도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고 있을 뿐 스스로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한국시민들의 지적 열정이 부족함을 한탄하고는 하는데 이것이 정말 옳은 해석일까? 한국인은 왜 책을 읽지 않을까?


물론 내가 말한 면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이유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출판산업의문제도 있을 것이고 멀티미디어의 확장도 큰 이유일 것이다. 나는 그 부분들을 애써 부인하거나 반복하는데 에너지를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가지는 지적해 두고 싶다. 멀티미디어의 발전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 거라면 동영상을 보는 것이 책을 대체하는 것이니 큰 문제가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겠다. 이점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동영상은 책을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은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중요한 공부의 수단으로 남을 것이다. 


그 이유는 책은 자기의 호흡으로 읽을 수 있고 동영상은 정보의 전달이 지나치게 빠르기 때문이다. 나는 독서를 작가와의 대화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만큼 독서는 지식을 내 것으로 해가면서 천천히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장마다 단락마다 읽는 속력을 내가 원하는 만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이 단순히 조각조각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쌓아 나가는 지적 구조물의 일부로 흡수될 여유가 있다. 반면에 동영상은 호흡이 너무 빠르고 대개 우리가 자기 호흡대로 속도조절해가면서 보기 어렵다. 때문에 사전지식이 아주 많은 경우가 아니라면 피상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멀티미디어는 쉽고 빠르고 편하게 깊은 인상을 주지만 그런 배움은 쉽게 무의식으로 사라져 다시 잘 꺼내지지가 않는다. 종종 공부라기 보다는 세뇌가 된다. 의식을 가지고 정보를 소화를 하기에는 멀티미디어는 대개 지나치게 정보의 밀도가 높다. 그래서 나는 독서와 글쓰기는 미래에도 가장 중요한 공부의 수단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일대일 대화정도일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가보자. 나는 저조한 독서량을 논하는데 있어서 흔히 간과되는 중요한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 싶다. 한국인은 책을 읽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실을 보다 자연스럽게 아니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 가장 자연스런 해석이란 이것이다.


한국인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것은 책이 재미가 없고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종종 금기시 되는 일이 많다. 그것은 한편으로 출판업계가 싫어하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 책은 좋은 것이며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메세지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들은 책을 더 팔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책은 재미있고 좋은 것이라는 메세지를 반복하면서 책을 안읽는 요즘 사람들이 문제라는 투를 유지한다. 


하지만 실은 책이 재미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해석은 가장 자연스럽고 그럴듯하다. 햄버거가 팔리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이 햄버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 전에 사실은 그 햄버거가 맛이 없어서 그렇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하지 않은가? 왜 한국인의 독서량이 작은 이유를 한국인의 의지박약이나 지적열정의 부재때문이라고 여기는가. 내가 아는 한국대중은 사실 엄청나게 지적 열정이 높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제품 그러니까 책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사실 내가 문제를 삼는 것은 일반적인 책이 아니다. 바로 한국어로 인쇄된 책을 말한다. 한국인은 한국어로 인쇄된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 책들이 재미가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더 나쁜 것은 그런 일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책이란 본래 그런 것이고 돈주고 살만한 책이란 그런 책이어야 한다는 선입견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책에도 권위주의가 있어서 뭔가 딱딱하고 팩트가 넘쳐나는 책이어야 책다운 책이고 어떤 상을 받은 유명인이 쓴 책이어야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책이 재미있거나 쉬우면 왠지 이래서는 안될 것같고 돈주고 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도서대여점 같은 작가의 권리를 무지막지하게 처분해 버리는 사업이 버젓이 통용되었던 것은 한국정도 뿐이다. 수많은 작가들의 글은 유익하고 재미있다고 느껴도 공짜여야 하거나 100원가치도 안된다고 여겨지곤 한다. 


현실이 이렇게 된 그 이유는 상당부분이 한국어의 무능과 한국 지식인의 무능때문이다. 한국어로 인쇄된 책을 누가 번역하고 누가 창작하는가. 그것은 한국의 지식인이다. 그 한국의 지식인이 무능하니까 책이 재미가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과 미디어는 그것을 한국대중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어로 인쇄된 책 (아래에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한 한국어로 인쇄된 책을 그냥 책이라고 말하겠다)은 두 종류다. 하나는 번역된 책이고 또 하나는 처음부터 한국어로 창작된 책이다. 번역된 책의 문제는 아마 책좀 읽어 본 사람들은 다 느낄 것이다. 번역가를 싸구려 노동자로 취급하는 문화에서 번역가를 키우지 않는 문제도 있지만 애초에 한국어라는 언어 자체가 가지는 한계도 매우 크다. 


우리는 대개 한국어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데 그것은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그런 면도 있는 것같다.한국어는 너무 뛰어난 언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어에 문제가 있을 이유는 넘친다. 언어는 어느 한 순간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끝없이 확장되고 변형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어는 조선시대까지 유학적 세계에 갇혀 있다가 일본에 강점당하고 서구 문물을 단기간에 받아들였다. 애초에 서구 문물을 번역하는 작업을 한 것은 대개 일본이었고 우리는 일본 사람이 번역한 말을 그냥 우리식으로 읽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economy 가 経済가 되고 그걸 우리가 경제로 읽는 식이다. 


서구의 개념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그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그나마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거나 마찬가지니까 여기에 문제가 없을 수가 없다. 게다가 조선은 한자문화권이었다. 해방이후에도 한국의 신문은 한자투성이었고 최근들어 한글전용이 퍼지면서 経済가 경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한자의 음독인 것을 발음만 쓰면 그 의미는 더 애매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날 이때까지 진정한 한국어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해서 지금도 외국어를 처음으로 번역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어려운 한자로 복잡한 말을 만들어 낸다. 물리학용어를 예로 들자면 동역학이라던가 관성이라던가 질량이라던가 하는 것인데 이것들 모두가 한자어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해방이후보다 아주 많이 바뀌지 않았다. 


이 모양이니 사실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책은 상당수가 문제가 많다. 재미는 떨어지고 그 의미는 암호처럼 애매모호해 진다. 나도 책을 번역해 본 적이 있다. 그 책은 주석의 분량이 본문의 분량만큼이나 많아서 반반씩 나눠서 번역을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책 전체를 내가 혼자서 번역하는 것보다 어려웠으며 번역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이 번역한 사람이 미리 번역해 놓은 본문 내용과 주석의 내용을 맞추면서 만족스럽게 번역하는 과정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같은 표현을 본문에서 이렇게 번역했는데 주석에서는 다르게 번역하면 혼란이 더 생기니까 그렇다. 그 결과 그 책은 분명 영어 독자가 읽는 것보다 재미가 떨어지게 되었다. 


한국어는 지금도 발전하고 있고 발전해야 하는 언어다. 한국사회의 모든 활동이 어찌보면 번역작업이고 언어활동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녀평등이 뭔지, 자유가 뭔지, 결혼이 뭐고 정의가 뭔지, 합리가 뭐고 과학이 뭐고 부유함이 뭔지를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특히 주체적 철학없이는 한국인의 정신은 혼탁함으로 채워질 수 밖에 없고 한국사회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분란도 이런 언어적 혼란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은 티비방송에서 정치인들이 토론할 때 보면 극명히 보여진다. 


고대 중국 사람이 쓴 책이 공자나 맹자다. 한문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시간 차이가 있어서 그런 책은 해설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인이 책을 읽는 것은 마치 해설없이 공자나 맹자를 읽고 있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책이 재미가 없고 어렵기만 하며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쓴 책은 어떨까? 그것은 번역의 문제가 없지 않은가. 여기에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그 중에서 부인할 수 없는 문제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무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무슨 상을 받은 작가나 무슨 대학의 교수가 쓴 책을 사면서 거기서 좋은 내용을 기대한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좋은 책을 쓰고 있을까? 지식측면에서는 그럴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도 아주 많은 진지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면은 아주 많다. 



나는 한국 문화의 큰 발전은 인터넷 문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많은 지식인들이 인터넷을 폄하하지만 인터넷 통신시대 이래 터져나온 인터넷 문학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문화적 역량은 지금에 훨씬 못미쳤을 것이다.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최초의 한국영화중 하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인터넷 소설에 기초해서 만들어 진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전지현을 스타로 만든 엽기적인 그녀도 인터넷 소설이었고 원빈과 신하균이 출연했던 우리형도 인터넷 소설이었다. 이런 예는 찾아보면 끝도 없다. 지금도 많은 영화가 웹튠에 근거한다. 즉 인터넷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스토리가 영화가 되고 있다. 


한국은 대중의 지적인 열정과 감성적 표현을 오히려 지식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식인들의 정점을 차지하는 교수나 순수문학파 출신들은 대개 주체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외국의 것에 억눌려서 자기를 잃고 있다. 외국인들의 문학을 흉내내거나 외국인의 지식을 그냥 외우는데 가장 몰두한 나머지 그들 지식인들은 오히려 종종 한국의 대중보다 더 많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한국 문학하면 대개 등장하는 것은 시대에 휩쓸려 운명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이었다. 나는 20년쯤 전에 아이들에게 읽힐 순수 한국 창작 동화책을 찾다가 그때도 한국동화는 모두 수동적 주인공들만 넘친다는 것을 절감한 적이 있다. 서구의 작품들은 주어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주인공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한국의 작품들은 어떤 비극적 상황때문에 우울하게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식이었다. 나는 한국 작품에서 빨강머리앤이나 말괄량이 삐삐같은 캐릭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초록물고기 이전의 한국 영화들을 봐도 주로 시대에 밀려다니면서 미친 짓을 하는 캐릭터가 거의 전부였다. 한국문화의 부흥은 대장금의 장금이나 도깨비의 지은탁처럼 자신의 운명과 싸워나가는 캐릭터가 나타나면서 본격화 된다. 


한국인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이제 한국 대중 탓을 그만했으면 한다. 사실 한국 대중은 매우 문화적이며 지적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저력이 한계가 있는 면이 있었고 특히 한국의 문화계를 꽉 잡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이 수동적이고 무능했다. 그들의 수동성과 무능에는 분명 변명할 거리가 있다. 우리는 모두 망국의 후예들이 아닌가. 열악한 상황에서 왜 외국의 지성들만큼 하지 못하냐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권위주의에 기대어 과거의 권위를 지키려고 할 때 재미있고 유익한 책은 나오지를 않는다. 쓰고 도움도 안되는 약을 만들면서 그걸 안먹는 사람을 탓하고 억지로 먹이려고 해봐야 약이란 원래 이런 거라는 선입견만 만들 뿐이다. 쉽고 자기가 있는 글이 세상에 흔해 질 때면 한국인들은 어느 나라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책을 읽을 사람들이다. 


최근에 가장 큰 인기를 얻은 책중의 하나는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이다.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며 이 책에 대한 언론사 기자들의 평만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이런 책에 별로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이 인기있는 것은 좋은 일이며 왜 이런 책이 인기가 있으며 역할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없다면 한국의 인문학은 권위주의의 탑 뒤에서 사그러 들 것이다. 주제에 대한 자신의 주체적 해석이 있는 사람은 이야기가 명쾌하고 쉬운 법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위험한 경우도 많지만 대개 도움이 된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는 마치 거대한 기계의 부품만 공급하는 것같다. 도무지 이런 단어와 문장으로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이 안오니까 결국에는 그 사람에게 지적인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체적 해석이 없는 지식인이란 그 자신이 노예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니체나 지젝의 노예가 자신의 글로 타인을 자기의 노예로 만드는 식이다. 


한국 사람이 책읽는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 대중의 태도문제로 문제를 바라봐서는 안된다. 재미있고 유익한 책은 팔리고 읽힌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런 책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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