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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만 잘보는 인간이 요즘 세상에 무슨 쓸모가 있나.

by 격암(강국진) 2019. 1. 7.

요즘 몇일 신재민씨가 언론을 시끄럽게 했다. 그런 논쟁에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한가지 이야기는 주목하게 되었는데 신재민씨가 믿을 만한 사람인가 하는 이야기에서 그는 행정고시를 통과한 사람인데 보통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9급공무원 시험도 어렵다는데 그럴 것같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이런 논리가 오늘날 말이 되는 것일까? 



한국은 오랜간 시험봐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문화를 지켜왔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대학입시며 고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책을 봐서 시험을 통과하고 그걸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다는 개념에 익숙하다. 그리고 그 어렵다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문화가 있다. 


이런 학벌존중 문화, 시험 존중문화는 21세기에 와서 양극화되고 있다. 한쪽을 보면 시험의 중요성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 커진 것같다. 30년전쯤에는 고시라는 말을 아무 곳에나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많은 취직시험이 다 고시라고 말한다. 그만큼 전보다 많은 시험이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30년전에는 9급공무원 시험보는 것을 주변에 크게 말하고 다니거나 그 시험에 붙었다고 크게 축하받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요즘에는 9급공무원 시험도 엄청 어렵다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그보다 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더욱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한쪽편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정해진 범위를 책보고 공부해서 시험잘보는 사람이 대단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다. 예를 들어 영어 실력을 토플이나 토익점수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대학입시에서 학교성적이나 수능성적이 가지는 변별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진짜 실력있고 재능있는 사람에게 좋은 점수는 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양극화되어서 한쪽에서는 시험을 잘보게 하는 온갖 노하우를 팔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저런 지식이나 요령이 현실사회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회의론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요즘 시끄러운 사법농단사건도 이것의 한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통상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쳐서 통과한 사람들은 인재들이며 따라서 그들이 제대로 된 재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에서 들리는 이야기들을 보면 과연 그럴까 싶다. 현실은 10년앞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변해가는데 종이위에 써있는 것만 줄줄이 열심히 외워서 시험통과한 사람들이 현실을 더 잘 알까? 그래서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극악범들이 감형을 받는다던가 아동이나 여성대상의 범죄가 상식에 맞지 않는 벌을 받는다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이 법정에서 통한다던가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책만 외우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권위에 약해서 독립적인 판단을 할 수 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들이 아닐까?


시험은 더 중요해 진 것일까 아니면 시험 무용론이 옳을까? 사실 어떤 시험을 운영하고 실시하는 주체는 대개 보수적고 시대에 뒤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시험 그 자체의 권위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왜 그런 것으로 사람을 평가해야 하는가를 계속 다시 묻기보다는 이전에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인재이니 지금도 같은 것을 물어 보는 것이 옳다는 식이다.  당신이 만약 축구로 유명해 졌다면 축구를 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게 되기 쉽다. 그러니까 서울대 나온 사람은 고등학교 성적을 가지고 사람을 보는 것이고 사법고시로 출세한 사람은 사법고시를 통과했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사람을 보게 되기 쉬운 것이다. 


문제는 이 보수성이다. 오늘날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그런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은 창의성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정받은 사람들일 수 있다. 시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심하면 그렇게 된다. 예를 들어 수학문제를 잘푸는 사람은 못푸는 사람보다 수학에서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험에서의 경쟁이 어느 정도를 넘게 되면 학생들은 그 수학시험에 나오는 문제만 풀고, 그 수학시험에서 점수를 받는 것만 중요하므로 창의적으로 문제를 푸는게 아니라 기계적으로 빨리 푸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경쟁이 점점 더 심해지면 아인쉬타인 같은 인재는 한 문제틀리고 2등급이 되고 전혀 재능따위 없는 암기 기계, 문제풀기 기계가 1등이 되는 일이 벌어지는데 창의력 높은 사람은 다 아는 것을 반복하는 일을 더 많이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30년 40년전만 해도 대학입시는 훨씬 단거리 달리기 같았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중학교 이후에나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하는 공부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자기 주도형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유치원때부터 애를 질질 끌어서 공부를 시킨다. 이렇게 해서 중학교 들어가는 입시, 고등학교 들어가는 입시까지 과열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이러고 보니 아이들은 더욱 더 자아를 발전시킬 시간이 없다. 뭔가를 마음편히 해본 적이 있어야 취미가 있을게 아닌가. 창의력있고 개혁적인 성격을 가진 아이가 이런 시스템을 견디어낼까? 모두를 길들인 개처럼 만드는 게 교육의 목표는 아닐진데 억압적인 입시교육의 기간이 끝도 없다. 대학입시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는 공무원시험을 포함하는 취업시험으로 이어진다. 


이걸 다 합치면 한국의 대학입시야 말로 뉴튼이나 아인쉬타인은 탈락시키고 부자집 아이들, 순종적인 암기기계나 통과시키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한다는 말은 단순히 저소득층의 아이들이 입시 경쟁에서 이기기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오히려 시험을 통과하기 더 어려워 졌다는 뜻이다. 


누적된 모순은 언젠가 한번에 터지게 되고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런 변화는 파괴적일 수 있고 너무 많은 사람의 삶을 로또같은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지금의 커져가는 양극화속에서 모두 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고민해도 문제가 해결될 길이 딱히 없는 분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민하면 답이 있는 분야들도 있다. 개혁을 늦추면 모순은 더 쌓이기만 한다. 쓸데 없는 시험들, 쓸데없는 자격증들은 하나 둘씩 없애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치뤄야 하는 희생은 더 커질 것이다. 쓸데없이 시험들만 잘보는 사람들은 정말 요즘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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