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5
오늘은 블랙스완과 안티 프래질의 작가 나심 탈렙이 쓴 스킨인더게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책은 인세르토(불확실성) 시리즈라고 부르는 다섯권의 책의 마지막 책입니다. 스킨인더게임은 영어에 있는 put skin in the game 이라는 표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표현의 뜻은 '상당액을 투자하거나 금융지원을 약속함으로써 회사나 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다'라는 것입니다.
나심을 세계적 유명인으로 만든 것은 블랙스완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나심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고 너무 쉽게 믿으며 이런 믿음은 오늘날처럼 비선형적인 반응이 가능한 시대에는 거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이 나왔던 것이 2007년이었는데 2008년에 세계 경제위기가 왔습니다. 블랙스완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나심 탈렙은 적어도 한동안 록스타같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나심은 이번 책 스킨인더게임에서 선택에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인데 이런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선택에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히 나쁜 일지만 그래도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요? 그것을 불확실성 시리즈의 문맥에서 말해 보자면 선택에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비현실적인 인식을 가지게 하고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순이 누적되거나 비선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게 되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댓가를 치루게 된다는 것이죠.
책임이 따르지 않는 선택은 왜 불합리해 지는가.
그럼 이제 이 책의 핵심적 질문으로 한발 들어가 봅시다. 그럼 왜 책임이 따르지 않는 선택은 불합리해 지는걸까요? 선택에 책임이 따르지 않을 때 우리는 진실로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자오락을 하면 적들을 쏴죽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적들의 공격에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게임을 할 때 우리는 죽이는 것도 죽임을 당하는 것도 모두 가상현실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감도 안 느끼고 두려움도 느끼지 않은 채 게임을 합니다. 죽으면 다시 하면 되니까요.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가 만약 현실을 게임과 혼동하면 우리는 죽기에 딱 좋은 무모하고 불합리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때로 종종 보상이 크고 그래서 그런 일은 용감해 보이고 심지어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나심도 위험을 언제나 피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위험이라는 것이 죽을 가능성까지 포함하는데 마치 죽으면 처음부터 게임을 다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위험한 도박을 계속하게 되면 비극과 죽음은 가능성이 아니라 필연이 됩니다. 그런 도박을 여러번 반복하면 그런 일이 결국 생기기 때문입니다. 빨간불에 길을 건너서 죽을 확률이 아주 작을지라도 계속 신호등을 무시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그렇게 살면 결국 언젠가는 확실하게 치명적인 사고를 겪기 때문입니다.
나심이 이 책의 제목을 스킨 인더 게임이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정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할 때에는 우리의 사고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는 비로소 합리적이 되고 진심이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감과 현실성을 망각합니다. 스스로는 군대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이 쉽게 전쟁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진짜 전쟁이 나면 도망가거나 안전한 후방에서 자기 안전만 챙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겁쟁이라고 부르고, 극단적인 적의를 표출하기는 쉽습니다. 나심은 로마시대에는 일이 이렇지 않았고 로마황제의 상당수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해에 서너명이나 황제가 바뀐 일도 있었을 정도로 로마시대의 황제는 전쟁터에서 맨 앞에 서서 싸웠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대통령과 정치가들은 맨 후방에 있지요. 자신들은 누구보다 안전할거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쟁을 시작할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들 중에는 너무 쉽게 전쟁을 입에 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경제 시스템이 망가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선택을 한 사람은 그 경제위기속에서 오히려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일도 많습니다. 그들이 정책을 주장하고 선택할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재산을 거기에 걸지 않습니다. 국가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탕진하고도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이보다 더 나쁜 일도 있습니다. 나심은 간섭주의자라는 사람들을 이 책에서 자주 비판합니다. 그 간섭주의자들은 바다건너 안전한 곳에서 다른 나라의 일에 대해 쉽게 간섭을 주장하고 책상위의 논리를 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일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어떤 행동을 주장합니다.
사실 남의 사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피상적이 되기 쉽습니다. 한국에 민주화시위가 여전히 많았던 1990년대에 저는 외국인친구에게 한국이 안전하냐고 묻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CNN같은 방송에서 최류탄이 자욱한 한국의 거리만 봤기 때문에 한국을 거의 내전중인 나라처럼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잘 살고 있는 저로서는 한국을 방문하면 총맞아 죽을 것처럼 생각하는 그 친구가 황당했죠.
우리는 자기일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남의 일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때로 남의 일에 대해 단정적인 주장을 하고 간섭을 합니다. 그러다가 그런 개입이 잘못되어 대학살이 일어나고 난민사태가 벌어져도 가정이 파괴되고 청년의 미래가 파괴되도 물론 그 피해를 간섭주의자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박이나 게임하는 것처럼 남의 운명에 재미로 간섭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남의 운명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매우 질이 나쁩니다.
그럼 우리는 왜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는가.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지않는 것이 이렇게 나쁜 일인데도 우리의 문화와 철학들은 우리를 계속 현실로부터 떨어뜨립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짜 지식인들과 가짜 과학자들과 위선적 정치가들이 검증된 과학이 아니고 어설픈 유사과학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주고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사회를 움직여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의 근본적 원인이거나 적어도 그것을 악화하는 원인은 우리의 과학적 사고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과학시대의 절정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이 시대만큼 과학이라는 말이 남용되기 쉬운 때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과학적 논리를 잘 살펴보면 앞에서 말한 현실과 직면하지 못하는 문제가 새삼 가슴에 와닿습니다. 과학적 사고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 관찰이라는 것은 주어진 상황의 안에 관찰자를 집어넣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사실, 그 대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바깥에서 발견하려고 하고 그렇게 얻어진 지식을 하나의 거대한 논리적 구조속에서 쌓아 올리려고 합니다. 물리학자가 날아가는 돌을 관찰할 때 그 돌에 가해지는 관찰자의 영향을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생물학자도 사회과학자도 객관적 관찰을 하는 것이 합리적 이해로 가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쁜 것은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가지는 논리적 구조에 대한 맹신에 빠지고 가정에 불과한 것에 대해서 지나친 확신을 가진다는 겁니다. 과학은 법칙과 이유를 찾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법칙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법칙과 이유가 보이기 마련입니다. 비록 그것이 착시에 불과한 것이라도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가진 것은 논리적인 구멍이 있는 여러 조각의 데이터 뭉치일 뿐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진짜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우리는 쉬운 설명들에 너무 쉽게 빠져들고 그걸 확신하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너무 쉽게 과학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칼 포퍼가 유사과학이라고 비판했던 공산주의이고 나심 탈렙이 싫어하는 경제학입니다.
현대 사회도 과학적 논리의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분권화, 지방화된 세상을 유지하는 대신에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시스템안에서 회사원들도 학자들도 작은 부속품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행동과 책임은 한 없이 거리가 멀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느낄 수가 없어지게 됩니다. 진짜 사회로 나가는 시간은 점점 뒤로 가서 학생들은 실패와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학교라는 가상공간안에서 이론화된 지식을 더 오래 배웁니다. 대학교에 있는 학자들은 현실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속에서 논문을 양산하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현실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의 행동과 믿음은 종종 분열됩니다. 남들에게는 한국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주식을 사고, 남들에게는 이제 유학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식은 유학을 보내는 사람이 세상에 넘쳐납니다. 부자가 되면 하나님에게 감사하면서 손해를 보면 정부를 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감수성이 말라 있습니다.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의 편협한 믿음속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망국론과 책임지지 않는 지식인
두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저는 이 책에 대한 소감 쓰기를 끝마치고 싶습니다. 하나는 제가 좋아해서 자주 언급하는 책인 정인보의 양명학연론에 대한 것입니다. 일제시대인 1933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정인보는 조선이 망한 이유는 유교의 한갈래인 양명학이 아니라 다른 갈래인 주자학에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양명학과 주자학의 가장 큰 차이는 격물치지라는 말의 해석에서 나옵니다. 주자학에서는 이 격물을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이해로 보았고 양명학에서는 격물이란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양명학은 인간은 양지를 갖추고 있어서 자기의 마음을 살피면 거기에 앎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앎은 그러니까 공자님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고민한다면 우리가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은 자연스레 우리 자신의 마음이 되겠지요.
반면에 주자학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앎에 도달하게 한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고민할 때 우리는 우리의 바깥을 보게 됩니다. 공자님 말씀을 다시 보게되고 보편이론을 살피게 되는 것이죠.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법도와 예절을 따지게 됩니다.
정인보는 객관적 이해를 추구하려면 차라리 서양처럼 세상의 이치를 탐구했으면 실용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자학에 몰두하여 인간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윤리란 객관적으로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니까 부모님에게 잘해드리는 것이 효이지 진심은 없는데 부모님에게는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닙니다. 마음에 대한 객관적 이론에 매달릴 때 우리는 이런 윤리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은 예전에 잊어버리고 보편과 의무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대한 생각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패륜아와 매국노가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안에 진심이 없을 때 이리 저리 그럴듯한 말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은 쉽기 때문입니다. 정인보는 말하자면 주자학이 매국노만 키웠다고 말하면서 그 실증으로 양명학을 공부했다는 최명길의 행동을 보라고 말합니다만 그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이유는 이것이 나심의 메세지에 깊이를 더해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정인보가 말하는 주자학의 문제는 서구 문명에도 있습니다. 서구 문명은 실용성에 더 집중하기는 했습니다만 사람들을 현실과 떨어지게 만들어서 책임지지 않는 행동을 만들어 내는 문제를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인보의 조선망국론은 나심에 이르러 인류문명의 위기문제로 지적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객관성에 빠져서 자기를 세상에서 빼놓고 판단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 바로 이 현대과학을 중심으로한 서구문명의 문제입니다. 진짜 과학은 오히려 괜찮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고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과학도 되지 못한 유사과학에 대한 확신이 넘쳐난다는 겁니다. 이 두 권의 책을 같이 생각할 때 서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같아서 여기에서 언급해 보았습니다.
이 책과 관련되어서 언급할 수 있는 두번째 이야기는 과학혁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조르다노 부르노는 1600년에 화형을 당합니다. 이 사건은 지금은 당연시 되는 과학적 사고도 한 때는 이단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비난을 받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이때는 과학혁명 이전의 시대였고 천년 이상을 이어져온 기독교는 많은 지식들을 신학적 기초위에서 집대성해 왔습니다. 그 모든 믿음들을 의심하고 우리가 직접 세상을 관찰하여 데이터를 모으고 세상에 존재한다는 법칙을 찾겠다는 시도는 그 시도가 상당한 결과를 생산하기 전까지는 매우 어리석고 무책임한 접근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당대에 큰 권위를 가졌던 종교를 위협할 수도 있는 사고방식이었으니까요.
브루노의 모습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많은 학자들과 기관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나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나심의 메세지는 다르게 말하면 한때 혁명이었던 과학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권위주의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과학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대학들도 권위주의적이 되었고 그들은 과학대신에 유사과학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이제 너무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데이터들이 감당할 수 없이 지금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뉴튼 물리학을 과학의 모범예로 가지고 있는 과학적 접근은 그 한계가 점점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한때 종교인들에 비해 혁명적이었던 대학의 교수들은 이제 나중에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논문을 양산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동떨어져서 데이터와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경제학자들을 매우 싫어하고 우리는 무지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얼마 안된다고 말하는 나심같은 사람은 그 옛날 과학혁명의 시대에 뛰어난 과학자들이 던졌을 것같은 질문을 다시 던집니다. 그것은 바로 합리적인게 뭐냐는 겁니다. 설혹 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말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질문은 가치가 있을 겁니다. 나심은 아마도 물리적으로 화형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그의 질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면서
오늘의 현실에 대해 나심은 시스템속에서 길들여진 개가 아니라 외로운 늑대만이 진짜 판단을 한다고 말하고 분권화와 지방화를 통해서 판단과 결과의 거리를 줄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상앞에 앉아서 자신의 이론을 만드는 것은 좋지만 그걸 먼저 적용해야 할 곳은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대상 그러니까 자신의 삶이나 자기 주변부터라는 겁니다.
우리는 근거없는 믿음, 근거없는 이론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처럼 보이지만 과학이 아니고 종종 그저 소수의 광신도가 타협없이 주변에 강요하기 때문에 사회속에 퍼진 금기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금기나 믿음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문화적 폭을 줄입니다. 나심은 그걸 사회의 에르고드 성질이 깨어지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우리가 마땅히 탐구해야 할 어떤 가능성이 무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으로 믿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타협이 없고 어리석어서 자신의 믿음을 주변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관용을 가져야 하지만 남에게 관용을 가지지 않는 행동에 까지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세계는 지나치리만큼 복잡하고 넓게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규칙이 뭔지, 누가 참여하는지도 잘 모르는 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축구를 하면서 농구를 하면 반칙이 됩니다. 교실을 춤추는 클럽과 혼동하면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어떤 책임이 따라오게 되는 지를 알 필요가 있고 그것이 분명해 지도록 게임의 법칙을 제대로 정의하고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혼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거대한 비극을 겪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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