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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한국주거의 사회사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9. 11. 27.

19.11.27

한국주거가 일제시대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해왔나를 다룬 책 한국주거의 사회사를 읽었습니다. 비교적 두꺼운 책이지만 흥미로운 사진과 자료들이 첨부되어 있었기에 재미있게 읽었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저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책의 결론부에서도 한국주거의 역사는 비극이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의 역사는 가난때문에 그저 좋건 나쁘건 그저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급에 매달리는 역사였고 둘째는 일본과 서구의 무차별적인 영향속에서 오랜 역사를 두고 적응하고 개발한 우리 전통의 주거 문화가 너무나도 많이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것이 남의 것보다 더 좋다던가 나쁘다던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어가 영어보다 더 좋다는 주장 없이도 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어가 영어에 의해 심각히 파괴되어 우리 말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잡동사니가 되었다고 해봅시다. 이런 언어의 정리없이는 우리는 큰 불편을 겪을 것입니다. 그걸 해낸다는 말은 우리 말이 영어가 된다는 말도 몇백년전의 조선말로 돌아간다는 뜻도 아닐 것입니다. 한국의 좋은 주거 문화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현학적인 목표도 국수적인 주장도 아닙니다. 싸고 관리하기 쉬우며 따라서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주거때문에 고통받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하수도같은 인프라를 갖춘 도시를 만드는 것처럼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절로 되는게 아닙니다. 

 

일전에 나는 우리 어머니가 사시는 집의 리모델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경험을 의미심장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80이 되신 어머니는 요즘에 수원에 있는 아파트에 사십니다. 그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한마디로 매우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문제는 물론 개인적 문제도 있습니다만 보편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사시던 세계와 요즘이 너무 다른 겁니다. 

 

많은 할머니들이 그렇듯 우리 어머니는 한국 요리를 잘하십니다. 외식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요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김치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아주 맛있게 담그십니다. 하지만 집은 다릅니다. 만약 우리가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한옥에 그냥 살고 있었다면 우리 어머니는 집에 대해서도 상당히 전문가일 것입니다. 왜냐면 이제까지도 집에서 사셨고 한국의 주거가 수백년전부터 연속성을 가지고 전해져 내려왔으니 어릴적부터 집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집을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연히 경험이 생기고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료를 어디서 어떤 가격으로 구해야 하는지, 믿을 만한 일꾼은 어떻게 알아보는가 하는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어머니의 김치가 그러하듯이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집이나 가구나 주거에 대한 지혜를 당연하다는 식으로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거문화가 혼란되고 단절된 한국에서는 전승되어 내려오는 주거문화에 대한 상식과 체험이 없다시피 합니다. 오십년 백년되도 쓸만한 집이 흔한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낡은 집들은 대개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일꾼들도 질서없이 맘대로 하니 세상에는 집한번 짓고 나면 죽을 고생을 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속터지는 일이 너무 많으니 대기업이 아니면 집도 못짓는 세상입니다. 소비자로서도 그렇습니다. 문하나 달려고 해도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게 무슨 무슨 회사에서 얼마얼마한다는 최신형 문이라는 것뿐입니다. 그게 정말 그 돈값어치를 하는지, 이 제품이 좋은지 저 제품이 좋은지 우리가 어떻게 알까요? 벽에 붙일 타일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고르지 못합니다. 자신의 선택에 자신감이 없으며 사실 이것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어떤 이에게나 심지어 전문가들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업자의 농간에 휘둘립니다. 이것이야 말로 주거문화의 부재입니다. 

 

이런 현실은 금전적으로도 부담되며 정서적으로도 불안합니다. 운동화를 공장에서 만든 것을 쓰는 것과는 틀립니다. 왜냐하면 집은 운동화처럼 가벼운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중에서 대개는 가장 비싼 물건입니다. 10만원짜리는 꼼꼼히 보고 사지만 5억짜리는 충동구매한다면 문제가 안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완성된 집을 보지도 않고 사는 후분양제가 보편인 나라입니다. 이 역시 우리가 집에 대해 가지는 취향이라는 것이 상당히 단순무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주거문화가 부재하니 한국인들은 대개 스스로 생활환경을 개선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남을 시키자니 결과도 마음에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비쌉니다. 따라서 우리 삶은 불안해 집니다.  현대 한국인은 종종 조선시대의 초가집을 폄하합니다. 전근대적인 주거는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물론 나쁜 점이 많지만 그때는 주변의 흔한 재료로 스스로 집을 지었고 한번 지은 집은 오래 썼습니다. 조선시대에 결혼하려고 하니 집이 없어서 안된다는 말이 있었을까요? 요즘은 집을 못구해서 결혼못한다는 사연이 아주 흔합니다. 아이도 키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누가 누구를 불쌍하게 여겨야 하는 걸까요. 

 

일제가 한반도에 그들의 집을 짓고 서양식의 집을 지을 때 이 땅의 엘리트들은 일본이나 서양을 추종했습니다. 그걸 발전이고 선진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아직 전통문화가 남아있었습니다. 대중들에게 싸고 좋은 집은 한옥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남아있는 북촌한옥마을 같은 것이 일제때 생겼습니다. 1930년대에는 건축가나 부자들이 아니라 집장사들이 한옥을 지어 팔았는데 이는 당시만 해도 양옥을 짓는 것보다 재료나 인건비에서 한옥을 짓는 것이 더 쌌기 때문입니다. 

 

해방후에 전쟁을 겪고 집부족은 더 심해졌습니다. 다시 1970년대에는 집장사들이 집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옥은 사라지고 양옥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 양옥이란 서양이나 일본식 집과는 달리 바닥난방을 할뿐만 아니라 그 구조가 한옥의 구조를 흉내내어 중앙에 거실을 가지고 주변에 방을 늘어놓은 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서양집도 아니고 집장사가 엉터리로 형식을 섞어만든 집인 셈입니다. 그들이 양옥을 만든 이유는 이 무렵에는 이미 재료도 인건비도 양옥을 짓는 것이 더쌌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한옥을 짓는 인적 물적 사회 기반이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이 와중에 이 나라의 엘리트들이나 정치가들은 여전히 우리 주거문화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서양풍 주택을 많이 짓기만 했고 아파트를 지어댔습니다. 투기 바람이 분 것도 이런 풍조를 가속화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의 주거문화의 단절은 거의 완벽한 것이 되었는데 일차로 한옥이 날아가고 이차로 양옥으로 지어진 집들도 헐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거대 아파트 단지가 세워졌습니다. 이제 집을 짓거나 개선하는 일은 개인의 손을 떠났습니다. 대기업이 공장물건 만들듯 만드는 집만이 제대로 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개인들이, 대중들이 주거로부터 소외된 것입니다. 2003년 목동의 하이페리온 69층 아파트가 서고 2004년 타워펠리스 III이 서자 이 땅에서는 주거용건물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습니다. 아파트는 계층별로 모여서 살게 하는 문제도 심화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집은 흔히 살기 위한 곳이라기 보다는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 투기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백년전에 서투르게 양옥을 짓고 남에게 서양생활을 자랑하던 이 땅의 엘리트들이 하던 짓이기도 했습니다. 음식으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 가정요리가 개인적 만족감이 아니라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것이요 투기를 위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문화적으로 빈곤하게 살겠습니까? 모두가 요리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대기업이 만든 서양풍도 아니고 한국풍도 아닌 어설픈 칠면조 구이같은 것을 맛도 못느끼면서 억지로 먹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지금 우리 주거문화의 현실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0세기가 끝날 무렵에야 변화는 보이기 시작합니다. 건축가 승효상은 1998년에 수졸당이라는 집으로 상을 받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방철언의 미제주도 그랬습니다. 그 수졸당을 보면 서양식 건축물안에 한옥의 정신을 담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실앞에 중정을 두고 방들은 서로 뚝뚝 떨어지게 짓는 구조가 그렇습니다. 일제가 처들어와 조선이 망한지 100년여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 것이 좋았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세상은 바뀌어 수졸당같은 집이 보편화되기란 어려운 여건이었습니다. 집은 어디까지나 마을과 도시의 일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졸당의 1층 평면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태어나자 마자 자신이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노예가 되는 세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파트 한 채 가격이 평생 노동으로 저축할 수 있는 금액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물값이 한잔에 10만원씩 하는 나라에 태어나면 그저 물을 마시기 위해 노예처럼 일해야 합니다. 그 물이 썩은 물이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주거문화의 빈곤도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집이 노동착취의 도구가 됩니다.  

 

주거문화는 많은 주변요인을 같이 바꿔야 바뀔 수 있습니다. 외국의 주거문화는 그 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데 오랜 세월을 보낸 결과입니다. 유전옆에서 기름 펑펑 쓰는 거 보고 기름한방울 없는 곳에서 자동차를 굴리려고 하는 것같은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외국의 제 아무리 훌룡한 건축가가 있다고 해도 그가 한국의 주거문화에 정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외국의 집이 그대로 우리나라의 주거문화에 답이 되기는 힘듭니다. 

 

다행히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주거문화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가장 뚜렸한 것은 리모델링이나 인테리어에 신경쓰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겁니다. 가구시장은 이케아가 한국에 진출한 이래 크게 바뀌어서 싸고 좋은 가구가 많이 생겼습니다. 이제 그저 비피할 곳을 구하는 것을 넘어서 좀 더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그 끝에서 우리는 집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가지게 되겠지요. 

 

제 생각에 우리나라의 단독주택은 엉터리입니다. 외국보다 엉터리라는 게 아닙니다. 한국의 단독주택은 한국적 삶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바닥난방이 대표적 예이지만 마당도 그렇습니다. 유럽풍 마당은 한국에서는 소용없습니다. 기후가 다르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유럽같다면서 집이 좋다고 말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나마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의 내부구조는 집장사들이 엉터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같이 살면 서로 불편합니다. 

 

이 문화적으로 부실한 단독주택때문에 아파트가 좋아보이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단독주택의 난방비가 비쌌다는 것이죠. 하지만 요즘은 나라도 전보다 부유해졌지만 단열이나 보일러시공이 좋아져서 단독주택도 난방비걱정안하고 살 수 있습니다. 집의 구조 자체도 다르게 지어야 겠지만 말입니다. 자동차가 과밀화되면 필연적으로 주차를 더 엄격히 단속해야 하고 유료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땅을 가진 단독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것입니다. 실제로 전기차 충전을 위해 아파트를 떠나 단독으로 이사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주거문화는 변할 것입니다. 

 

이런 걸 누군가 혼자서 해낼 수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혜를 모으면 살기 좋은 나라가 만들어 질 것입니다. 계속 고민하고 질문을 던져야 성과가 있을 문제입니다. 더이상 무계획하고 근본없는 집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은 그만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고 노예로 만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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