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30
1989년 소련의 위성국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공산당체제가 대중에 의해 일거에 무너지는 벨벳혁명이 일어난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대통령이 된 사람이 바츨라프 하벨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중에 체고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게 되는데 그는 이중 체코의 대통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바츨라프 하벨은 극작가였지만 이른바 반체제 인사로 살았다. 그는 록그룹의 음악을 탄압하는 당국에 항의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77헌장에 참여한 지식인이었으며 이 책이 소개하는 글, 힘없는 자들의 힘을 쓴 것은 1978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이 나온지 11년만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재는 무너진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힘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란 서구에서 반체제인사로 불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다만 반체제 인사라고 하면 정부에 대항해 싸우는 어떤 유명인사들을 말하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가 말하는 반체제 인사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의 유령이 동유럽을 떠돌고 있다. 서유럽에서는 이 유령을 가르켜 반체제라고 부른다.
대단한 존재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이 반체제 인사가 아니라 그들은 오히려 유령처럼 존재감이 희미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인지가 설명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말하면 그는 과연 그 반체제 인사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다.
어쨌건 그 스스로가 반체제 인사였고 반체제 인사가 곧 힘없는 사람들을 말한다니 11년후에 있을 벨벳 혁명은 아직 먼 미래였던 때였다. 그런 어두운 시대에 그는 그렇다면 이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힘을 가지는가, 혹은 어떻게 힘없는 사람들이 힘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는다.
그가 말하는 것의 핵심은 반체제 인사들은 본래 정치를 하려고 했던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시작이자 본질은 그저 진실된 삶을 살고자 하는 그들의 태도에 있었다. 그들은 단지 일상속에서 그들이 겪게 되는 가식적인 삶에 의혹을 던지고 나아가 그걸 참을 수 없어한 것이다. 그 가식이란 모르는 것을 안다고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며, 느끼지 않는 감정을 느끼는 척하고, 집단 이데올로기가 주는 의무를 마지 못해 하는 것을 말한다.
공산당 치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삶은 이런 연극같고 게임같은 것이었다. 당시에도 모두가 서로의 말과 행동이 실재와는 일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야채상은 그의 야채사이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전시하지만 사실 그는 그런 메세지에 무관심하다. 다만 그런 말을 하고 그런 말에 공감한다고 행동 하는 것이 지금 그 야채상이 살고 있는 세계의 게임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는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가식적인 게임을 하게하고 스스로를 배신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에 익숙해져서는 그저 삶이란 본래 이렇게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체념하게 만든다. 그는 힘없는 사람들의 진정한 힘이란 바로 이런 체념을 거부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태도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전쟁은 세균전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속박, 무지는 힘이라는 구호가 지배하는 사회를 그린다. 하벨은 그것이야 말로 바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여 진실하지 못하고 가식적인 삶을 사는 자기 사회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말과 현실이 반대다.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이란 단지 그렇게 모두가 진실에 둔감하고 스스로에게 거짓되게 사는 사회에서 진실된 삶을 살기로 결심한 개인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진실되지 못한 사회에서 그런 행동은 금새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 던지지 않던 질문을 던지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권력을 가진 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게 바로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이라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도드라지게된 속사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벨과 같은 사람들은 주류 정파에 반대하여 대안적 세력을 구축하고 정치적 파벌싸움을 하는 정치같은 것은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런 식의 정파적 접근을 매우 우려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논리는 아주 흔했다.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이번 선거를 이겨야 하고 그래서 그걸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제대로된 삶의 방식을 가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우리편이 승리하는것이 핵심이 된다. 사람들은 마치 이번 대선을 지고 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더이상 없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하기도 해서 선거가 시작되면 당장 이쪽으로 표를 몰아주자는 주장이 나오곤 했다. 하지만 사실 돌아보면 바로 그런 행동때문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설치고 사회적 비극은 더 연장된 것이다.
하벨은 조직화와 구조화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되도록 그것을 목적을 달성하면 해산하는 조직이 되도록 해야 하며 어디까지나 해방된 인간이 제대로된 체제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체제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대로된 정치나 사회가 인간을 해방한다는 이데올로기야 말로 바로 공산주의식 발상이며 따라서 그런 식으로 접근할 때 설혹 공산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왕을 다른 왕으로 교체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데올로기 독재에 의한 비극은 그대로가 될 것이다. 새로운 정부는 스스로를 선으로 선언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행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는 지난 세기에 반공이데올로기로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다. 공산주의가 나빴다면 결국 그에 반대하기 위한 독재도 꼭 같았다. 그것 역시 사람들을 진실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억압이었다.
이제 소련은 해체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도 더이상 공산국가가 아니다. 아니 몇몇 정신 못차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반공이라는 구호는 철지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하벨의 메세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확실히 공산주의나 반공주의같은 낡은 새 장은 부서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새 장에 산다. 사실 인간사회란 적어도 요즘같이 복잡한 시대에 이데올로기없이는 유지가능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벨도 인정하고 있다. 아무리 나쁜 교통법도 교통법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서 어쩌면 가식적인 행동과 우리 편을 옹호하는 태도는 현실적으로 완전히 피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러한 우리의 삶이 임시적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부하사원이라고 해도 회사를 벗어나면 그 사람과 나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 아파트 경비원이 나를 직장상사처럼 대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말 하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그런 임시적인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한 것이다. 지금의 체제가 무엇이 되건 그것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수단일 뿐이다.
관습화되고 강화된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린다. 일상적인 차별과 부패와 폭력를 본래 그런 거라면서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에 익숙해지면 어느새 우리는 우리가 가하고 있는 폭력을 아예 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 되는 것이다. 하벨이 말하는 가식적인 삶에 참을 수 없어하고 진실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일상속에서 진실을 보는 사람이다. 새장속의 눈먼 새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스스로를 진보적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로 주변을 억압하는 것이 지극히 심각한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와 남들에게 좋은 것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기회가 되는 대로 그런 억지를 행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그들이 법하나 통과시키면 당장 세상에 천국이 올 것같다. 실제로는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는 전부가 아니라면 대부분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 눈먼 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제 세월이 지났고 그래서 우리는 하벨의 메세지를 패러다임의 바깥쪽에서 볼 수가 있다. 하벨은 공산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국가의 내부에서 깨어있는 시민이 되자면서 글을 썼지만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가 이미 무너진 세상에서 그의 메세지를 다시 음미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새장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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