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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최성호의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20. 2. 22.

20.2.22

제목 참 길다. 똑같이 필로소픽에서 나온 굿바이 카뮈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과 주제와 내용이 상당히 깊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제목을 지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의 주제는 결국 인생의 의미찾기다. 그것이 허무한 일인가 아니면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일인가에 대해 까뮈와 네이글이 한 생각을 중심으로 저자는 의견을 펼친다. 나는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 그 주제를 이루는 질문으로 인해 언급하기로 했다. 이 저자나 까뮈나 네이글이 뭐하고 했는가 이전에 이런 질문에 대해 눈돌리지 않고 이따금 생각을 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따위 찾아봐야 찾아지지 않는 것으로 결론지어져 있다고 그 결론만 기억하고 질문던지기를 잊어버리면 안된다. 뭔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매순간 우리의 어느 한 부분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론이 같아도, 결론이 뻔해도 우리는 이따금 그 질문을 다시 던져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이 육체의 결론도 같고 뻔하지 않은가. 우리는 죽는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인간의 삶이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나나 너나 모두 죽으니 나의 인생과 너의 인생에는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이 책에 대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이전에 굿바이 카뮈를 읽으면서 해두었다. 그 글의 독후감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시 한번 얼마간 써볼 생각이다. 몇번이고 그려본 난초를 다시 그려보듯이 말이다. 

 

까뮈는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과 그것을 찾을 수 없게 하는 이 세상과의 충돌을 부조리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할까봐 불안해 한다. 그런데 그것을 도통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은 본래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의 핵심에는 이야기와 세계의 무한성에 있다. 어떤 것의 의미란 그것과 그 주변의 것이 가지는 관계에서 나온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최고우등생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이것은 영광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 동네가 성장장애를 가진 학생만 모인 곳이라면 어차피 그 아이도 성장장애를 가진 학생이라는 말이다. 구덩이 속의 작은 둔덕은 구덩이 안에서 보면 산처럼 보이지만 구덩이 바깥의 큰 세상에서 보면 어차피 구덩이인 것이다. 의미란게 이러니 우리 삶의 의미도 그렇다. 당신이 최고의 도박사로 도박꾼들 사이에서는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하자. 도박이란 것을 무의미하게 보는 사람들이 보면 당신이 당신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부심이란 무의미하다. 그것은 도박이란 구덩이속의 작은 영광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무한하게 펼쳐진다. 새옹지마라는 옛 이야기가 잘 보여주듯 우리가 우리의 시야를 넓혀감에 따라 의미는 자꾸 변한다. 우리가 A의 의미를 B에서 찾으면 B는 C라는 바탕을 그 뒤에 가지는 식이다. 이런 질문의 무한 퇴행이 명백히 계속된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삶은 부조리하다는 것을 즉 영어로 absurd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네이글은 이 부조리를 1차적 관점과 3차적 관점의 충돌로 표현한다. 1차적 관점이란 이 세상을 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3차적 관점이란 객관적인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의미를 쉽게 찾는다. 나의 관점은 결국 내 주변의 것을 당연시하게 되고 그래서 쉽게 나의 이야기가 완결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객관을 추구하여 남의 생각과 표현에도 신경쓰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다시 위에서 말한 무한퇴행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우리는 우리의 1차적 관점을 정당화할 수 없고 그 객관의 세계를 다 파악할 수도 없다.

 

저자는 까뮈의 시각과 네이글의 시각을 소개하면서 그 유사성과 차이점을 가르쳐 준다. 그것이 이 책의 중심적 내용이라고 할 수있다. 하지만 그 세부적 차이를 논하는 것은 관심있는 사람이 이 책을 보면서 직접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더불어 허무주의에 대한 저자의 해법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도 직접 확인해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이 책에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에 대해 몇마디 하면서 이 책에 대한 소감을 마치고 싶다. 첫번째는 철학자의 사고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다. 예를 들어 절대적 무한과 실질적 무한의 구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삶의 의미를 논하는 주제의 핵심을 이루는 이 무한퇴행의 문제는 이러저러해서 무한히 펼쳐진다는 식으로 설명된다. 내가 위에서 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무한히 펼쳐지는가 아닌가와 상관없는 문제가 실질적 삶의 현실이다. 

 

인생의 답이 쉬뢰딩거 방정식을 푸는 것이라고 해보자. 즉 인생에 확실한 답이 있는 것이다. 무한퇴행은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개미같은 존재라면 거기에 도달할 날이 올까? 이 책에서 논하지 않고 있는 주제는 인간의 유한성과 현대 사회의 기술적 문화적 발전같은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적어도 언뜻 읽으면 이것이 개미에게도 옳은 말이고, 3천년전에도 옳은 말이었을 것같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삶의 의미를 추구할 때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변화의 속력이 인간이 유전적으로 타고난 한계를 능가해 가는 현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이 언젠가는 신의 의도를 알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힘든 이유가 되어 종교가 현대인에게 위안이 되기 힘든 이유이다. 

 

불과 반세기나 한세기전만 해도 삶은 훨씬 단순했다. 인간은 본래 평생 한가지 직업을 가지는 일이 보통이었다. 예외도 있었지만 원해도 직업을 바꾸기가 어려웠고 사실 그건 종종 꼭 원하고 싶을 만큼 쉽지 않다. 젊어서 대기업에 입사해서 일할 수 없을 때까지 그 평생직장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퇴직후에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이제 쓸모없어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건 견딜만 했다. 요즘은 같은 직장에서 10년을 다니면 오래 다닌 사람이라는 말이 흔하다. 요즘은 세상이 훨씬 빨리 변한다. 그래서 젊은이도 중년의 사람들도 정체성혼란과 취업실패의 아픔을 더 많이 겪는다. 

 

이런 사람들도 인생의 의미를 다시 질문하고 허무주의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시대적 질문에 대해 절대적 무한과 실질적 무한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전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회의할 수 있다는 말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삶의 현장에서의 질문에 보다 치열하게 답하는 면에 좀 더 집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 책에 없는 두번째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허무주의로 인한 절망이건 회의론으로 인한 우리의 무지이건 이 책에서 충분하게 표현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를 잘 느끼게 해주는 것이야 말로 이런 책이 해야할 본질적 목표일 수 있다. 저자가 책에서 지적하기도 했던 것처럼 허무주의조차도 뭔가에 대한 확신이다. 인생의 답은 세 개의 박스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다 열어 봤는데도 답이 없더라 그러니 답은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식의 확신이 허무주의다. 회의론자는 그런 허무주의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는 겨우 박스 세개 열어보고 답이 없다고 좌절하는 구나 하지만 세상에는 끝없는 박스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적극적으로 한 수 보여줘야 한다. 눈 높이의 지평을 열어서 네가 열어보지 못한 박스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우리는 언제나 회의론자가 될 수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철학의 재구성을 촉구한 듀이는 시공을 초월하는 객관적인 법칙이나 진리를 찾으려는 것 자체가 서구 문화의 전통이라고 비판하면서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객관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으면 객관과 주관의 구분이 시작된다. 그러나 실은 그런 구분이 있다거나 그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 있다. 뉴튼의 고전역학이나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객관적 세계 그 자체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져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객관적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너무 커서 우리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자체가 사실은 오만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뭐가 객관인지도 모른다. 현실은 언제나 개미가 읽는 양자역학처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거기서 우리의 절망에 대한 확신은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또다른 예로 쉬뢰딩거를 생각해 보자. 그는 길을 찾아서라는 에세이에서 인간의 본질이 학습과 진화에 있다고 말한다. 왜냐면 우리가 막연히 육체와 동일시 하는 우리란 생각해 보면 사실은 물체라기보다는 의식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하지 않고 적응한 것으로부터는 그 의식이 사라진다. 대표적인 예가 호흡이고 장운동같은 것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그런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이 아니면 완전히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일어난다. 우리의 의식이 집중되는 것은 우리가 이전과는 다른 것에 적응할 때이다. 그래서 우리라는 인간의 본질은 학습과 진화인 것이다. 만약 인간이 기계처럼 같은 행동만 계속하게 된다면 우리의 의식은 점점 축소되고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 상태가 된다. 그럴 때의 우리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은 이미 사라진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쉬뢰딩거의 의견은 큰 의미가 있다. 우리가 지금의 우리의 사회적 위치나 소유물의 정도를 가지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답하려고 하면 우리는 자연히 세계라는 어떤 객관적 공간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탐구하는 식으로 우리의 의미를 찾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학습현상이고 진화현상이라는 의식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뭘 느끼는가에 더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초월하는 장소에서 존재한다. 그러니 세상을 다 가진 재벌3세같은 사람도 그 재산에 얽매여 그 돈더미위에서 의식없는 식물인간처럼 자유롭지 않고 무감각하게 산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이 금고같은 기계가 된 거라고 할 수도 있다. 반면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빈방에서 자신의 지식과 감정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사람은 진짜로 살아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이런 글을 적는다. 이 책을 읽는 첫번째 보람은 이것일 것이다. 이런 고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다시 또 난초를 그리듯이 이런 질문에 부딪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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