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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마크 릴라의 난파된 정신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9. 10. 9.

19.10.9

분별없는 열정과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를 쓴 마크 릴라의 신작 난파된 정신을 읽었습니다.  마크 릴라는 이 책은 역사적 진보에 대한 반동을 그 주제로 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그에 대한 체계적 논고라기 보다는 사례와 성찰을 제시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이 책은 애초에 하나의 주제를 두고 써내려간 책이 아닙니다. 마크 릴라가 주로 뉴욕 서평에 썼던 글들을 모아 재구성해서 하나의 주제에 대한 책인 것처럼 만든 책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글들을 처음 쓸 때는 반동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쓴 글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자는 2015년에 두 명의 프랑스 저자들에 대한 서평을 쓰다가 이들이 자신이 전에 읽었던 다른 사람들과 같은 패턴을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가 과거에 썼던 서평들을 재구성해서 이런 책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역사와 종교와 사회에 대해 자기 주장을 펼쳤구나 하는 사례들을 읽는 느낌으로 읽어야 할 책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 반동이란 무엇이며 이 책에서 그에 대해 뭘 배울 수가 있는가하는 관점으로만 읽기 보다는 그보다 열린 마음으로 이런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여기서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었을까 하고 스스로 책의 주제와 교훈을 찾아야 할 책이랄까요.

 

 

이 책의 구성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1부는 3명의 20세기 사상가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나서 2부는 흐름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개의 역사에 대한 서사들을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3부는 프랑스에서 있었던 무슬림 테러리스트 테러 사건과 그것과 관련된 두 권의 책들을 소개합니다. 말하자면 사람과 서사와 구체적 책들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니 뒤로 가면 갈 수록 좀 더 구체적이 되는 셈인데 책을 읽는 어려움도 뒤로 갈 수록 쉬워집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책이 앞뒤로 아주 긴밀하게 짜맞춰져 있는 것도 아니므로 원한다면 3부 2부 1부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좀 배신하는 행위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마크 릴라의 책을 3권 읽었습니다. 이제와 이 책과 함께 더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와 분별없는 열정을 뒤돌아 보면 마크 릴라는 같은 메세지를 반복적으로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사상적으로 너무 좁아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며 역사가 인과적으로 깨끗하게 일어난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죠. 그러면 대단한 사람도 파시스트를 지지하게 됩니다 (분별없는 열정). 정체성 정치에 매몰된 진보주의자가 나는 옳은데 왜 세상은 나를 안 알아주냐고 하지만 마크 릴라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눈이 너무 좁아서 당신들이 보고 싶은 것에서만 시시비비를 본다고 말하는 겁니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제가 이 책을 읽자마자 떠오른 이미지는 지역의 재개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지역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큰 재개발을 합니다. 한국사람에게 재개발이라고 하면 저층 건물을 밀어버리고 고층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이 익숙합니다만 하천과 길을 정비한다던가 있는 집들을 개보수하는 재생사업같은 재개발도 있지요. 이런 재개발을 하고 시간이 흘렀다고 합시다. 그 지역에는 다시 민원이 쌓입니다. 다시 여러 사람들이 이거 저거가 나쁘다고 불만이 점점 커집니다. 이럴 때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하는 겁니다. 이 지역의 문제는 애초에 지역공동체를 파괴한 아파트를 지은 것에서 모두 시작되었다라고.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번에는 이 지역의 문제는 모두 임대 아파트의 위치때문에 만들어 졌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런 주장에 따라 사람들은 편을 갈라 남탓을 하면서 싸우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설사 매우 그럴듯한 주장이라고 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진실의 한 조각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재개발도 그렇지만 세상일은 대개 매우 복잡합니다. 주유소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났을 때 불이 나게된 결정적 이유는 마지막에 주유하는 사람 근처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며 애초에 불장난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아니 애초에 주유소에서 불장난을 할 직원을 고용한 것이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직원이라면 불장난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으로라도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 틀림없다는 지적도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의 설명과 주장에 깊게 공감한 나머지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과거에 대한 착시에 빠지기 쉽습니다. 말하자면 불장난 그 자체에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다만 마지막에 주유하는 사람에게 너무 가까이 간 것만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는 예측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요즘 사람들은 대개 수긍합니다. 앞이 잘 안보이니까요. 그런데 역사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야기 혹은 이론은 종종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그때 이미 미래가 결정되었던 것처럼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재건축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상가들의 생각들도 그렇죠. 사상가들은 어떤 역사적 사건에 주목합니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문제는 소크라테스에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스트라우스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문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이나 마르크스는 아예 역사는 뉴튼의 물리학처럼 애초에 법칙에 따라 갈 길을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물건을 던질 때의 초기 조건이 그 물체의 궤적을 결정하듯이 이미 미래는 결정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저같이 과학자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한국에 앉아서 이 글들을 읽다보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역사에 대한 설명들에는 적어도 두가지가 대개 빠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는 기술의 발전입니다. 인쇄술의 발전이라던가, 석탄, 석유의 사용과 증기기관의 발전 혹은 폭약이나 전자통신기술의 발전이 다 빠지고 소크라테스가 혹은 사도 바울이 혹은 계몽주의 철학자가 이러저러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설명이 과연 옳을까요? 기술과 과학의 발전은 그냥 부수적이고 필연적이니까? 또 하나는 서구 이외의 지역이죠. 예를 들어 아랍이나 동아시아 지역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존재하고 그 문화적 영향력을 서구에 발휘해 왔는데 그런 흔적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쓰는 숫자가 아니고 로마의 숫자를 그냥 쓰고 있었더라면 유럽에서는 상거래가 발달할 수 없었을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큰 숫자를 다루는 산수가 발달하지 못하니까요. 역시 유럽 이외의 지역은 인류역사에서 그저 부수적으로 존재한 지역에 불과할까요? 인류역사는 아니 설혹 서구의 역사라고 해도 기독교와 유대교면 충분히 설명되는 걸까요? 

 

이런 생각을 하고 다시 과거의 철학자이며 논객들의 이야기를 보면 가끔은 내가 속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꼭 그 논객들이 속인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진실의 한 조각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인데 그게 너무나 그럴듯한 나머지 그게 전부로 보이고 다른 걸 잊어버리게 된 겁니다. 너무나 그 이야기에 심취하게 되면 누군가가 와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 사람을 바보나 악당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게 옳은데 이게 아니라고 하니까 자세히 듣지도 않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미 그 논리에 빠져서 그 관점속에서 이게 왜 틀렸는지 증명해봐라는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 책을 반동에 관한 책으로 말합니다. 그 반동 그러니까 제가 재개발이라고 말한 혁신은 주로 계몽주의, 다원주의, 자유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같은 것을 만들어 낸 보편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는 철학적 문화적 발전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반발하는 1부에서 소개하는 세 명의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태어났고 종교와 세계1차대전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겁니다. 유럽에서 1차세계대전은 낡은 시대의 종말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폐허속에서 유럽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이 폐허를 만들었는가, 무엇이 이 폐허의 탈출구인가를 열심히 찾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명의 철학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첫번째 사람인 프란츠 로렌츠바이크는 유대적 삶을 이상화하고 그 것을 소생시키는 일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두번째 사람인 에릭 뵈겔렌은 종교없이 세계를 창조한다는 계몽주의의 환상이 파시즘을 낳았다고 생각했지만 노년에 태도를 바꿉니다. 마지막 사람은 레오 스트라우스로 뵈겔렌과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문제에 집중합니다. 다만 뵈겔렌과 스트라우스는 세부사항에서 좀 다른데 뵈겔렌은 종교적 영지주의가 현대의 문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로 대표되는 사고의 전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1부는 종교에 대한 논의가 많고 3명의 평생에 걸친 저술과 사고를 빠르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이야기를 전면에 배치한 것은 일단 주제와 상관없이 3명의 삶을 나열하고 그 안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2부와 3부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느슨하게나마 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2부에서는 몇가지 이야기들 혹은 서사들이 소개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는 역사에 법칙을 등장시킴으로서 개인적 판단의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 판단으로 역사가 이뤄지는게 아니라 법칙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들이 만들어지자 이제 판단과 역사의 위치는 서로 바뀌어 집니다. 우리의 판단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칙으로 혹은 이야기로 설명되는 역사가 우리의 판단을 결정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우리가 구원의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기독교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에서 신에게 복종하고 복음을 퍼트리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만들기의 습관은 대개 두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 단순성입니다. 이야기가 아주 복합적이면 그걸 퍼뜨리기가 어렵겠지요. 그러니까 대개 역사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 에티엔 질송이 말한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가 마틴루터와 데카르트의 공격을 받아서 권위를 잃었던 일이 오늘날의 모든 변화를 결정했다는 식입니다. 

 

또 하나는 노스텔지어 즉 고향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행동을 강하게 구속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상실한 것이 아주 크다는 주장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황금시대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우리는 어느새 언젠가 과거의 황금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조화롭고 모두가 행복했으며 모든 것이 합리적이었다는 식의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그 황금시대에 머물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암시를 받는 겁니다. 이럴 때 이야기란 바로 그 황금시대에서 우리가 뭔가를 하나 잘못해서 나오게 되었다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그만큼 그런 형식의 이야기가 강력하기 때문일 겁니다. 강력한 만큼 그 이야기들은 역사적으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2부에서 부터 슬슬 이제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 좀 더 비판적이 됩니다. 그래서 한번은 이런 신화는 이렇게 쉽게 만들 수 있다면서 스스로 하나의 신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루터에서 월마트로). 이런 이야기에 매몰되면 파시즘이나 독재나 학살을 가볍게 보기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오저뚱에서 성바울로). 

 

책은 3부로 이어지면서 더욱 단순해 지고 비판적이 됩니다. 프랑스의 흥망에 대해 무슬림으로 이야기를 만든 두 명의 저자가 가지는 문제점은 이제까지 서술한 시선에서 보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후기에서 돈키호테는 슬픔에 젖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돈키호테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그냥 존재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어떤 하나의 실수같은 역사적 파국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스텔지어의 환상에 젖어 현실을 파악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인간은 이런 이야기들이 없이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건 마치 사진을 점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실들을 이어붙여서 구조를 가진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맥락없는 사실들만으로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계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실에 대한 축소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주류적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틀린 것으로 혹은 단순히 개혁과 변화에 반대하는 진보의 반대인 보수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크 릴라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반동주의자들은 종종 변화에 반대하고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진 보수주의자들에게 인기를 얻었지만 그들이 반드시 보수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들은 때로 정반대라서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진실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주류가 되지 못한 주장이라고 해도 반동주의자들의 이야기가 귀기울일 가치가 있는 이유는 이것일 것입니다. 

 

이 책은 하나의 주제에 통일적으로 접근하는 면이 약하고 전반적으로 1장은 좀 불친절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의 철학자의 삶을 몇십페이지로 소개하면 그렇게 되기 쉽죠. 그것은 제가 한국사람이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사실 서양사람에게 동학혁명의 최제우나 신라의 원효에 대한 설명을 이만큼 한다면 마찬가지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러가지 관점들을,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꼼꼼히 읽을 가치가 있는 글들이었습니다. 저는 과학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역사와 기술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만 종교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은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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