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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순간

by 격암(강국진) 2019. 8. 28.

많은 사람들은 소통을 기초적이고 단편적인 정보의 교환으로 생각하는 실수를 한다. 음식을 씹거나 두 발로 걷는 것처럼 소통의 능력을 자연스럽게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이 만나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어찌보면 기적같이 고마운 일이다. 팩트가 중요하다느니 팩트를 체크하겠다느니 하는 말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실은 사실만으로는 우리는 소통을 할 수없다. 그 사실의 의미를 주는 문맥과 이론이 없이는 사실들은 완전히 상상도 못하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이 세상에 여러 종교가 믿어지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누군가와 뭔가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것을 느낀다. 우리는 때로 소통이 안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확실한 증거이고 더 많은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단지 몇개인가의 증거나 지식으로 그 소통 불가의 상황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마 틀렸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자식간의 대화나 서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의 대화를 생각해 보라. 그게 될 것같은가? 팩트가 중요하다고? 당신은 순진하거나 문제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축구를 같이 하려면 그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축구의 게임법칙을 이해해야 한다. 똑같은 규칙속에서도 매번 할 때마다 다른 게임이 진행될 수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축구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경기는 계속된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소통을 하기위해서는 기본적인 이론, 기초적인 형이상학, 기본적인 상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사실을 누군가가 말했을 때 그것이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다. 


수학을 배운 사람은 수학교과서에서 많은 공식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의 대화는 종종 바로 그 공식들을 증명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수학에서는 공리라고 불리우는 기초적 믿음들을 관찰하고 경험한 사실들과 조합해서는 어떤 그림을 만들어 낸다. 그 그림은 이 세상과 서로에 대해 간결한 이해를 주는 그림이다. 그렇게 만들어 진 그림을 공유하는 순간이 바로 소통의 순간이다. 그것은 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옳은가를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친구들과의 소통을 매우 중요하게 느끼는 청소년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이 청소년이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30년전과는 매우 달라서 그 부모는 그 청소년의 삶과 경험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왜 어떤 게임을 자기 아들이 못한다고 하는 일이 그 아이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그 부모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아들이 "그러면 게임을 할 수 없단 말이야!"라고 말했을 때 그런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지만 그 사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과 언어를 부모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면 게임을 할 수 없다는 말이야!"라는 사실의 제시는 소통의 순간을 만들지 못하고 만다.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 소통은 기본적인 이론, 형이상학, 게임의 법칙들을 공유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형태로 또 층층히 여러가지 복잡도를 가지고 구축된다. 그에 따라 우리는 아주 복잡한 소통을 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고 아니면 아주 원천적인 대화는 가능하지만 조금만 이야기가 복잡해져도 서로가 완전히 다른 우주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구구단만 아는 사람은 구구단의 소통을 하고 미적분을 아는 사람은 미적분의 소통을 하며 복소함수론을 아는 사람은 복소함수론의 소통을 하게 된다. 


하지만 수학이론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많은 관념적 구조물들은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변화에 훨씬 더 약하고 그 기본공리가 뭔지가 아주 불명확하다. 수학이론은 누군가가 어떤 책에 그 증명들을 쭉 나열하는 것으로 잘 지켜지지만 인간이라던가, 평등이라던가, 소유권이라던가, 결혼따위의 여러 사회적 관념들은 수학공식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 건축에 관여하고 그걸 지켜내는데에도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설사 내가 우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묘사를 한 책을 쓴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어딘가의 학회지에 실려서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우정의 표준적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그 이후에도 우정의 의미는 종종 오해될 것이고 끝없이 도전받을 것이다. 설사 어떤 우정의 의미가 대다수 사람에게 믿어진다고 해도 그 우정의 의미는 수학공식처럼 그냥 존재하는게 아니라 끝없이 망가지고 다시 수선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문화다. 따라서 소통의 순간은 수도물이나 전기처럼 사회적 시설이 주는 혜택이다. 뛰어난 천재라도 주변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못할 수 있다. 소통의 실패는 당연히 그 천재의 책임만은 아니다. 


소통은 시간이 걸린다. 때로 아주 많이 걸린다. 현대인이 천년전의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해도 그 세상에 민주공화국을 세울 수 있을까? 아마 안될 것이다. 된다고 해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어쩌면 그 시간이 다시 천년이 걸려서 모처럼 현대인이 천년후로 가서 민주주의를 가르쳐 준 보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역감정을 가진 사람들, 인종적 차별을 하는 사람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생각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들어서 때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세상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늙어죽어 사라져서 바뀌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정도로 사람의 생각은 잘 안바뀐다. 


소통은 역사의 결과다. 백년이나 오백년전의 사람들은 이미 다 죽고 없는데 그게 현대인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회적 경험은 누적된다. 한국인은 해방이래 민주화운동과 그 성공을 통해서 다시 사회적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반세기 이상의 시간은 어떻게 보면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전태일의 외침에서도 들어나듯이 인간이라는 보편관념을 모두가 신뢰할 수 있도록 노력한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은 개돼지도 석탄이나 의자도 아니다. 그러니 그렇게 대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고 그리하여 그렇게 소통할 수 있게 되는게 그렇게 힘들다. 고문하지 말고, 사람목숨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고, 내 편한거 생각하는거야 자연스럽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인간이하로 사는 것에 가슴아파하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라고 설득하는게 그렇게 힘들다. 그 긴 시간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목격해야 했고, 밥을 못먹는 청소년, 생리대가 없다는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소통은 정말 기적이다. 


요즘은 한일분쟁때문에 일본인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인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많다. 일본의 문제는 일본이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일본의 경제적 군사적 성공때문에, 심지어 문화적 성공때문에 일본 문화의 야만성을 잊는다. 일본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만 해도 엘리트가 모든 걸 결정하는 권위주의 사회였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도 국민의 뜻을 정치가 반영한게 아니다. 오직 엘리트가 맘대로 세상을 바꿔서 성공한 것이다. 


이런 엘리트 주의의 문제는 남을 쫒아갈 때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정답은 저기 주어져 있으니 일사분란하게 서구 사회를 쫒아갈 때는 오히려 효율이 좋아보인다. 하지만 이제 선진국의 위치에 도달하면 문제가 된다. 그러면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일으켜서 핵폭탄을 맞게 된다. 크고 복잡한 나라를 아베같은 바보가 맘대로 주무르게 되는 것이다. 


일본문화의 야만성은 결국 민주주의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소통 문제를 일으킨다. 일본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서구 사회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사람들은 왜 한국이 화를 내는지 잘 이해를 못한다. 미국인은 전쟁에 이기고 일본에 들어가자 그렇게 죽자고 싸웠던 일본인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친절한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그런 일본인들은 천황숭배건 창씨개명이건 시키는대로 하지 그게 싫다고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천한 신분인데 말이다. 


소통의 문제는 인류가 그 초기부터 가져온 문제다. 어쩌면 모든 사회문제는 소통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할 때 말이 통하는 사람과 만나는 그 순간은 정말 기적의 순간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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