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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영화 조커를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9. 10. 6.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조커를 봤습니다. 조커는 배트맨 이야기의 주요한 악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토드 필립스감독은 그 조커를 이 영화에서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냅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엄마밑에서 자라나고 그 엄마를 돌보며 살아가는 남자가 있습니다. 이 남자는 스스로를 약을 먹어야 하는 병에 걸린 장애인으로 여깁니다. 이 남자는 본인도 통제할 수 없는 웃음을 자꾸 터뜨립니다. 사람들은 뭐가 우습냐고 이 남자에게 항의하고 그 남자가 스스로 그렇게 하듯이 그 남자를 기분 나쁜 장애자로 여깁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무시당하고 언어적 육체적 폭력에 시달리면서 살아갑니다. 


이 남자도 친구를 사귀고 애인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그런 정상적인 삶은 이 남자에게는 과분한 것입니다. 이 남자는 정부의 은혜에 의해서 무료 상담이나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결국은 정부가 끊어버리는 복지혜택이지만 말입니다. 이 남자의 삶은 자꾸 더 나빠집니다.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이 남자의 꿈은 온 세상의 농담거리가 됩니다. 그 모든 나쁨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엄마를 돌보면서 살아가는 착한 아들이라는 것이지만 이 남자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자 그것 역시 거짓된 삶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손으로 엄마를 죽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삶이 비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 삶은 코미디였어


이 영화에서 마블코믹스 같은 재미를 기대한 사람은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저에게 이 영화의 주제는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고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보였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 것은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는 어떤 사람이 사는 곳인가하는 이야기가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왕과 귀족들의 이야기를 본다고 해봅시다. 그 시대의 정상인들은 자연히 왕과 귀족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먹고 마시며 사교계에서 시간을 쓰는 사람을 정상인으로 보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은 그들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런 이야기에도 일반 백성이나 농민들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들은 사실 탁자나 소 돼지와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미녀와 야수같은 디즈니 이야기에 나오는 성에서 탁자나 찻잔이 된 수많은 보통사람같은 존재입니다. 탁자와 소 돼지는 의식과 감정을 가지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그래서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갈 것인가를 전혀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사실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사람들에 의해서 돌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야수가 마법이 풀려야 그에 따라 마법이 풀리는 사람들처럼 의존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야기에서 보통 사람들은 현대의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귀족계급에 의해서 착취당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실 그들은 장애인들입니다. 영웅이나 귀족없이 혼자서는 정상적인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귀한 핏줄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보여주는 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고귀한 귀족을 질시하기 보다는 부러워합니다. 마치 나도 슈퍼 히어로같은 힘을 타고났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는 식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란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이 보여주는 신들의 모습처럼 완벽합니다. 완벽하게 태어나지 못한 천민들의 삶은 정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기에는 장애가 있으며 따라서 먹다 남은 부스러기만 주어져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바쁘게 살아도 이 세상에 기여하는게 별로 없으니까요. 


그래서 언젠가 기사가 되어서 용을 잡고 멋진 공주를 구할거라는  꿈을 꾸는 대장장이의 아들은 두가지의 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실은 자기도 그렇게 대단한 피를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을 꿈꾸는 미래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정말 대장장이의 아들같은 사람으로 살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 낡은 옷 안에는 정상인이 들어있다는 것이며 자신은 언제가 장애인이 아니라 정상인의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은 대장장이의 아들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낭만적인 상상일랑 때려치우고 일이나 하는 미래입니다. 타고난 장애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대장장이 아들의 이 두가지 선택에는 대장장이의 아들은 대장장이의 아들인채로도 행복하고 낭만적으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은 거세되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대장장이의 아들인채로도 정상일 수 있다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봉건시대를  벗어난 우리는 민중의 위에서 착취만 하던 귀족을 비판하면서 평범한 일반인으로서도 행복을 추구하고 낭만을 추구하며 꿈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상을 배우며 자라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보통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주권은 일반 시민에게 있으며 이 세상은 몇명의 위대한 귀족이나 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시민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정상인이 될 수가 있다고,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라고 주장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배웠고 이런 이야기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앞에서 말한 왕과 귀족의 이야기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일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도 마찬가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귀족의 진짜 이름도 정상인입니다. 우리도 역시 과거의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누가 정상인인가 하는 질문의 답이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적당한 육체적 조건을 갖췄고 적당한 학업성적을 가지고 있으며 적당한 크기의 집에서 적당한 직장과 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또는 정상적으로 삶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정상적으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마치 귀족이나 재벌3세가 종종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이 열심히 산 결과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정상인들도 이 세상에서는 자기들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자신들의 삶은 그저 자기의 노력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 비슷합니다. 정상인들이라고 해서 서로 아주 똑같지는 않습니다만 정상인들의 세계에서 서로가 다르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세상이 가져야할 다양성이라고 불리는 차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 정상인의 세계에 모두가 포함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정상인의 범주 바깥에 존재하게 되면 다름은 이제 차이가 아니라 범죄나 장애로 인식됩니다.  비정상인들은 비극의 결과물이며 범죄자들이며 장애인들입니다. 그러 길래 공부좀 더 잘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길래 좀 더 정상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길래 좀 더 정상적인 인간관계와 재산을 가졌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이 비극적인 삶을 살아도 어쩔 수가 없는 비정상인의 세계를 살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확실히 누구나 다 정상인인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저 평범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하나의 자랑스런 성취입니다.  

 

진짜 비극의 뿌리는 어쩌면 기술일지 모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좁은 우물같은 세상에서 태어나 그 우물 세계를 전세계로 알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정상인으로 알고 살기 쉬울 것입니다. 그에게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 좁은 우물 안을 묘사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가난한 농부만 살고 있는 동네에서 농민은 정상인입니다. 그리고 왠만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상적인 농민으로 알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여 그 사람이 그 좁은 세상을 넘어서 더 큰 세상의 이야기에 휩쓸리게 될 때 갑자기 그 사람은 스스로가 비정상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며 적어도 정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발버둥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이제 귀족 남자나 여자를 사랑하게 된 가난한 농부같은 처지에 빠집니다. 그 세계의 정상인은 귀족이니 스스로를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쳐야 합니다.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서게된 농민은 비슷한 처지에 있습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가져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비정상이니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보통 사람들의 세상입니다만 세상은 너무나 크고 복잡합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은 빠르게 증가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증가하는 것이상으로 기술이 발달해서 우리는 수십조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정말 어디 신화에나 나올 정도로 대단한 외모를 가지거나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이야기듣습니다. 온갖 종류의 로또를 맞아서 행복하게 산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듣습니다. 


문제는 일단 이렇게 같이 살아갈 것을 강요당할 때 우리는 정상인의 개념을 공유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의 부자들은 돈이 너무나 많아도 청바지 같은 걸 입고 보통 사람흉내를 냅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자신이 박근혜나 무슨 공주처럼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정상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10대는 도시락이 없어서 굶고 생리대가 없어서 깔창을 쓴다는 데 누구는 한 대에 수억하는 슈퍼카를 장난처럼 쓰고 버리며 클럽에서 1억짜리 술세트를 시킨다는 모습이 나란히 보여지면 이 둘을 모두 정상인으로 포용하기가 힘이 듭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상인이 되기 힘듭니다. 누가 정상일까요? 월급이 백만원인 사람? 오백만원인 사람? 이천만원인 사람?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사람들은 애써 더 많은 사람들을 정상인으로 포용하려고 노력할지 모릅니다만 그 노력은 적어도 종종 실패합니다. 자기 삶을 살기에도, 다시 말해서 정상인으로 남아있으려고 하거나 정상인이 되려고 노력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자기 세계에 갇힌채로 그 세계의 바깥에 있는 사람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정상의 세계는 기술덕분에 자꾸 융합되지만 또한 인간의 능력의 한계때문에 자꾸 조각이 나서 여러조각으로 붕괴됩니다. 


이 반복되는 융합과 붕괴는 우리를 죄책감에 빠지게만 합니다. 정상인들이 하는 가장 흔한 일은 비정상인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차별을 해서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안하게 됩니다. 영화 조커에서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서류보관소에서 일하는 직원이 조커에게 나는 보통 사람인데 너는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고, 정부가 그런 도움을 주지 않냐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람은 두려워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정부같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뭔가 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밀어내려고 합니다. 재벌만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3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그 옆에있는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나와는 다르다고 밀어내려고 합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들은 정부가 어떻게든 해줄 사람들입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반에서 30명중에 29등 30등하는 친구들, 대학에 가지 못할 친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니 인서울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지잡대에 들어간 친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취직못한 친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미혼모가 된 그 친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정부가 어떻게든 해주겠죠. 이런 식입니다. 


정리하자면 현대문명이라는 것은 결함이 있어 보인다는 겁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비정상인으로 여겨집니다. 정상인들은 비정상인들에게 비참한 삶을 살 것을 강요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주제넘은 일로 여깁니다. 공주에게 청혼하는 가난한 꼽추는 취향의 차이로 거부당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이라고 처벌받습니다. 어딜 주제넘게 공주를 넘보냐는 겁니다. 


조커는 정상인의 세계에서 승리자의 웃음을 짓고 좋은 사람인척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저기 바깥에 나가 봤냐고 세상이 너무 무례하고 폭력적이라고. 이 메세지는 단지 우리가 보다 넓은 마음을 가져서 차별없는 세상에 살자고 하는 메세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그 자체로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해서 자꾸 깨어지는 정상인의 세상만 준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 어떻게든 좀 해보라고, 이 세상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문명비판적인 메세지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대적 과제라는 겁니다. 이대로는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의 꿈이 이뤄지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비정상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삶에 절망하고 모욕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조커에서 많은 시민들은 조커를 영웅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감독의 메세지는 아마도 후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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