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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그 방에 컵은 있었을까?

by 격암(강국진) 2020. 8. 9.

당신은 어떤 방의 문앞에 서있다. 이제 문을 열고 방을 한번 둘러봤다고 하자. 그리고 방문을 닫았다. 이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방에 컵이 있었습니까?

 

당신은 요행히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컵을 기억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 하지만 기억이 난다고 해도 물론 컵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봐야 하는지 몰라서 못봤을 컵은 있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사실 컵이 있었다는 기억도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인간의 기억이란 믿을 없다. 

 

인간의 기억이나 인식이 믿을 없어지는 대표적 이유는 우리의 질문과 관심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는 이것을 하나의 실험을 통해 멋지게 증명해 보였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고 불리기도 하는 실험에서 피실험자는 사람들이 공을 주고 받는 비디오를 본다. 그리고 피실험자는 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공을 몇번이나 패스하는지 세도록 주문받는다. 하지만 비디오가 끝난 그들이 받는 질문은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질문은 이렇다.

 

당신은 고릴라가 지나가는 것을 봤습니까?

 

만약 당신이 고릴라를 찾고 있었다면 그걸 놓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고릴라는 보인다. 하지만 다른 질문에 집중하던 피실험자의 절반은 실제로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답해야 질문이 뭔지를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당신이 하루 종일 요리 책이나 물리 책을 보고 공부를 한다면 아주 많은 지식을 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찾는 질문의 답이 아내에게 뭐라고 해야 화난 아내가 기분을 풀까라면 그런 종류의 지식이 산처럼 있어도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예는 그냥 웃고 지나갈 없는 문제를 제기한다. 당신이 거의 텅빈 작은 방에 있다고 하자. 어딘가에는 보물이 있다. 그럴 당신은 어디에 보물이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여기저기 시선을 던져보는 것으로도 보물을 찾을 있을 것이다. 

 

왜냐면 방이 작아서 생각없이 여기저기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얼마지나지 않아 방의 전체를 둘러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나서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 방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기억하는 당신은 보물이 어디에 있는가도 즉각 찾아낼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신이 미국처럼 거대한 땅덩어리에 있는데 보물을 찾아야 한다고 하자. 과연 생각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당신이 미국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게 될까? 그런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미국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나서 이제 내가 답해야 할 질문이 뭐냐는 식으로 접근하면 가망이 없다. 당신은 처음부터 자신이 찾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생각해 봐야 한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얼마나 큽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세계에 산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도 질문을 생각해 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의 크기란 반드시 물리적 크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보적인 크기라고 해야 정확하다. 오늘날에는 서울에서 10년을 살았어도 서울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 없다고 정도로 세상이 복잡하다. 당신이 대학을 다녔거나 물류회사에 다녀본 경험이 있다고 해도 당신은 대학과 물류분야의 아주 일부분만 안다고 해야 것이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주 어린 아이가 아니라면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 당신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하는 분야는 아주 곳일 가능성이 크다. 그곳들은 당신이 스스로가 찾는 것이 뭔지 모르면서 그저 어슬렁거려도 의미있는 이해를 있을 만큼 작은 곳들이 아니다. 

 

이때문에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는 말이 세상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사실은 무한하다. 그래서 언제나 역사는 현재의 질문과 관점하에서 과거를 보면서 사실을 수집한 결과가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역사는 써질 없다. 의식하고 있건 의식하지 않고 있건 당신이라는 주체가 정보를 선별해서 고르고 이야기를 만든다. 어떤 것은 중요한 사실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일들은 분명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어떤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역사를 쓰거나 이렇게 남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결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다. 우리는 자기 없이 그냥 과거를 관찰해서 역사를 얻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설사 자기의 질문이라는 것을 가진다고 해도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앞에서 사고실험을 다시 해보자. 당신은 이제 방문을 열기전에 당신이 봐야 하는 것이 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방문이 열리자마자 열심히 컵을 찾는다. 그리고 컵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방문이 닫히고 나서 당신은 말한다. 방에는 컵이 없었다고. 

 

훌룡하다. 하지만 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생각해 봤는가? 이 질문도 사실 생각보다는 복잡할 수 있다. 게다가 대개 우리의 질문은 컵은 있는가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복잡한 것이 보통이다. 얼마전에 나는 토론회의 동영상을 봤다. 세계의 유명인들이 모여서 슈퍼인공지능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를 토론하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그런 토론은 조금의 이성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한다면 슈퍼인공지능이 가능하다던가 가능하지 않다던가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는 슈퍼인공지능이 뭔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토론을 끝낸다. 우리는 답을 찾는데서 토론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질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서 토론을 끝내게 된다. 심지어 누군가가 슈퍼인공지능이라고 불릴만한 어떤 것을 실제로 만든다고 해도 토론은 끝나지 않는다. 슈퍼인공지능이란 본래 그런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토론이 끝나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해 바라 뿐이다. 우리가 뭔가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슈퍼인공지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고 한다면 슈퍼인공지능은 존재하는 것이 된다. 전구나 자동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뭔가가 존재할 있을까라고 질문던질 때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구체적일 없다. 언제나 진짜 세상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우리가 만들어낸 이름은 진짜 세상의 전부를 포착하지 못한다. 

 

슈퍼인공지능은 딱딱하고 기술적인 문제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는 성공할 있을까라는 질문은 어떤가? 미래를 향하고 있는 질문의 최종적 답도 찾아지지 않는다. 질문이 있어도 경험이 있어도 최종적인 답은 나온다. 당신이 과거를 바라보며 아파트 한 채를 샀거나 어떤 직위를 얻은 것을 성공이라고 부르자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성공했는지 안했는지를 분명히 말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를 바라보며 성공을 논할 때는 일이 이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원했던 성공을 달성해도 이게 성공인가라고 되묻게 것이다. 아파트 한채를 가졌다는 것의 의미가 그것 혼자 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어떤 댓가를 치뤘는가, 아파트를 어디에 것인가, 아파트는 지금 세상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 이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는 성공이 뭔지 분명히 안다고 남에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우리는 다만 성공이란 무엇인가를 조금 이해할 있게 뿐이다

 

우리는 의미있는 질문을 찾아야 한다. 혹은 우리는 어떤 질문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나를 잊은 사람에게 의미있는 질문이란 없다. 과학이 대단한 양의 지식을 생산하지만 관찰자를 잊은 상태에서 찾아낸 지식들이 가치중립적이 되는 것은 이때문이다. 객관적 지식을 강조하는 과학은 나를 잊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한히 객관성에 접근하는 지식이란 무한히 나와는 상관없는 지식이다. 즉 나에게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방에 컵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얼핏보면 어떤 외부적 대상에 대한 질문같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런 질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뭔가를 안다고 말할   나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판단했는가라는 질문이고 일단 질문이 그렇게 변하고 나면 지식과 무지는 위와 아래처럼 분리해서 혼자만 존재할 없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 진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지를 모르면서 아는지를 말할 없다. 우리는 뭔가를 확신하고 있기에 다른 뭔가를 안다고 말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뭔가들은 이상 질문하지 않는 장소를 가르키는 무지의 벽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의 일부이며 우리의 지식이기도 하고 우리의 무지이기도 하다. 

 

 

이제 다시 질문해 보자. 방문이 열리고 닫혔다. 당신은 어느 정도 방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것은 그림이 아니라 3차원 공간을 가진 방일 것이다. 하지만 놀이동산 같은 곳에 있는 환각을 주는 방은 방안에 거인이 있는 환상을 심지만 사실은 아닌 경우가 있다. 이것은 당신이 방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가정이 틀렸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또한 당신은 구부러진 선을 보지만 사실은 선은 직선일 있다. 이것도 당신이 당신의 눈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기에 생기는 일이다.

 

우리가 착시가 있고 현실이 있다고 믿는 이유는 어떤 현실을 100%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무지의 벽을 의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랑할만한 사람, 괜찮은 사람, 모자란 사람, 부끄러운 사람? 그런데 당신은 지금 당신이 어떤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그렇게 판단되어지고 그렇게 보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당신이 보고 있는 자랑스런 당신이나 부끄러운 당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미 많은 말을 한가지 질문에 대해서 들었다. 이제 당신은 아마도 한번 더 같은 질문을 던지면  글에서 말을 체험할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당신은 이제 방의 안과 바깥을 다시 생각해 볼지 모른다. 아마도 질문은 이 글에 나오는 내용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이미 다른 의미들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방에 컵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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