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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다시 읽기 (1권 5장)

by 격암(강국진) 2020. 6. 12.

오늘은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의 5장 자연과 관습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책에서 포퍼가 자주 강조하는 메세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역사는 우리의 책임이다 라는 말입니다. 책임이라는 말은 선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메세지가 말하는 것은 이성주의입니다. 즉 우리의 생각이 이 세계를 결정하고 역사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철학자나 정치가 같은 특정한 직업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민중 혹은 인류전체라고 봐야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 메세지는 인본주의적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책임이다라는 말 이렇게 들으면 참 당연한 것같습니다. 이성주의와 인본주의는 오늘날 당연한 원칙이니까요. 하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인데도 누군가가 나는 절대로 남을 차별하지 않을 것이고 편견에도 빠지지 않을 거라고 단언한다면 그건 오히려 그 사람이 어리석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의 책임이다라는 말나아가 이성주의와 인본주의는 그렇게 당연한 말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주변에는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이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교와 역사주의입니다. 종교에서는 신이 역사를 만든다고 말하고 역사주의에서는 역사의 법칙이 역사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포퍼는 여기에서 자연의 법칙과 규범적 범칙을 구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책의 주제는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자연의 법칙과 규점적 법칙을 구분해라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포퍼가 닫힌 사회로 말하는 부족 사회의 대표적 특징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족사회는 자연법칙과 규범적 법칙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열린 사회란 뒤집어 말하면 자연법칙과 규범적 법칙을 잘 구분하는 사회인 것이죠. 어찌보면 참 간단합니다. 

 

자연법칙이란 바뀌지 않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돌을 던지면 그 돌은 항상 땅에 떨어집니다. 이런게 자연법칙이죠. 자연법칙은 사실명제에 대한 것입니다. 바뀌지 않고 참과 거짓이 있습니다. 

 

반면에 규범적 법칙이란 인간이 만든 법칙입니다. 여자는 결혼하면 결혼한 남자의 성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 뭐 이런게 인간의 관습이고 규범적 법칙입니다. 규범적 법칙은 가치명제에 대한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게 더 바람직하다는 거죠. 규범적 법칙은 인간이 만들었기에 인간이 바꿀 수 있습니다. 바뀔 수 있는 것이니 참과 거짓이 없습니다.

닫힌 사회인 부족사회에서는 자연법칙과 규범적 법칙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이 만들었거나 신이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자연법칙도 바뀔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걸 종종 기적이라고 부르죠. 

 

 

닫힌 사회의 사람들처럼 관습이나 법률을 자연법칙처럼 바뀔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할 때 역사는 그 법칙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백성이 왕을 섬기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해봅시다. 사람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사람들이 그걸 그렇게 믿습니다. 이러면 봉건제도가 아무리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도 공화국으로 바뀌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무거운 쇠를 가볍게 만드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말입니다. 

 

포퍼는 자연법칙과 규범적 법칙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를 소박한 일원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을 비판적 이원론이라고 하죠. 그리고 소박한 일원론이 통하는 부족 사회를 닫힌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 반대인 비판적 이원론이 지배하는 사회를 우리는 열린 사회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법칙과 규범적 법칙을 구분한다는 것 그리고 역사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말은 쉬워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일찌기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보다 먼저 살았던 프로타고라스도 이 소박한 일원론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눈으로 보면 플라톤도 비판적 이원론과 소박한 일원론의 중간에 머뭅니다. 자연법칙이 아닌 걸 자연법칙으로 여겼던 겁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비판적 이원론이 어떤 것인가를 좀 더 말하기 전에 플라톤이 생각한 법칙들이라는 게 어떤 건지 조금 말해 봅시다.

 

플라톤은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회를 만들어서 서로 의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완전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완전한 이데아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국가의 기원을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찾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인간은 국가라는 집단을 만듬으로써 완전해 집니다. 

 

국가는 이렇게 완전한 인간영혼의 표현입니다. 국가는 수호자, 전사 그리고 노동자를 가지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각각 인간의 이성과 기개 그리고 동물적 본능을 담당하는 역할을 합니다. 불완전한 개인은 완전한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부품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은 한가지 어려운 질문에 부딪힙니다. 국가는 완벽한데도 현실속에서는 타락하고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다시 그 답을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찾았습니다. 국가가 부패하는 이유는 지배계층이 단합하지 못하고 인간이 퇴화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퇴화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아이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계층간의 피가 섞이는 잡종과 변종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배계층의 불화의 씨를 만든다는 겁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굉장히 전체주의적이고 굉장히 비민주적이었으며 혈통을 굉장히 강조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된 이유는 완벽한 이상국가가 왜 타락하는가라는 질문때문입니다. 플라톤은 악마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악마로 선택된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플라톤의 역사이론은 불완전한 인간이 잡종과 변종을 만들어 낸 끝에 퇴화해 가는 생물학적 이론이 됩니다.

 

포퍼는 규범적 법칙과 자연법칙이 혼동되어지는 두가지 이유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규범적 법칙을 자연적 법칙으로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적 법칙이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어떤 사회적 관행과 법규를 자연법칙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더 중요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착각에 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게 그런게 아니라고 지적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근거없는 관행과 규범은 비교적 잘 유지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윤리적 결단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사실 알고 있으며 현실과 맞지 않는 법규가 잘못을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사람들은 그럴 때 세상에는 역사적 사회적 법칙이 존재하여 지금과는 다르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잘못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다고 하고 싶은 겁니다. 

 

사람들이 법칙을 발견하는 한가지 예는 이런 겁니다. 세상을 둘러보니 우리는 누구나 길에 떨어진 지갑을 보면 집어가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법칙을 발견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사람은 길에 떨어진 남의 지갑을 보면 주워 가진다. 

 

그리고 이걸 법칙으로 여기면 내가 그런 상황에서 지갑을 주워가지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걸 안가지는 사람이 어리석고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위선자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여전히 그래도 인간은 다르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다 지갑을 주워가지는 것같아도 나는 안가질 수도 있죠. 그리고 어쩌면 그런 나의 작은 선택이 세상을 바꿀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역사적 자료에서 사회적 자료에서 법칙을 찾아내고 그것을 믿는 것에는 이런 위험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랜동안 짐승처럼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짐승처럼 살기를 관뒀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처럼 삽니다. 이렇게 인간은 역사를 반복하면서 살기 보다는 과거의 인간을 초월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적 자료에서 법칙을 뽑아내는 것은 결국 우리를 과거에 머물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리학자 어윈 슈뢰딩거는 자기를 부정하고 진화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역사주의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반이성적인 일이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가는게 아니라 역사의 법칙의 노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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