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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무소유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21. 5. 6.

21.5.6

법정스님은 아예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무소유를 말하셨지만 사람이 먹고 마시고 살아야 하며 초목처럼 희노애락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뭔가를 가지게 되어 있다. 당장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할 것이고 검소하게 산다고 해도 옷도 신발도 필요하다. 사실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냥 굶어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무소유의 진정한 뜻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을 뿐 오히려 적극적으로 좋은 환경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환경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도 좋은 생활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고 돌멩이처럼 멈춰있는게 무소유일 수는 없다. 우리가 때로 산에 가서 초목을 보며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그럴 때 비록 그 산이 내가 돈주고 사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사실 그 산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할 수도 있다. 나를 산이라는 환경에 놓았다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좀 다르게 해서 방안에 화분이 있는게 좋아서 화분을 놓았다고 하자. 그 화분은 내 돈주고 산 물건이니 분명 법적으로 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산은 내가 돈주고 산 것이 아니니 내 것이 아니고 화분은 내가 돈 주고 산 것이니 내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떤 환경속에 놓았나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산이나 화분옆에 놓았다라는 사실이다. 나라는 것은 마치 거울과도 같아서 산옆에 가면 산을 닮고 화분 옆에 있으면 화분을 닮게 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우리는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걸 내 일부로 삼는 과정을 계속해 간다. 책옆에 있으면 책을 닮아가고 삼겹살집 옆에 있으면 우리는 그 삼겹살 가게의 분위기를 수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필요한 것은 그때 그때 다르다.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제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계속 먹고 계속 반복해서 들으면 맛없고 재미가 없다. 살아있는 인간은 변해간다. 살아있는 인간은 계속해서 뭔가를 배워간다. 다시 말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살아있는 인간은 주변 환경으로 나 자신을 내보내고 또 주변환경을 흡수하여 나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 

 

그런데 섯부른 무소유니 뭐니 해서 마치 돌멩이처럼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느끼지도 않고 생각도 없이 살면 그게 좋은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참선을 한답시고 멍청하게 눈만 감고 앉아 있으면 무슨 대단한 진리라도 저절로 깨달아질 수 있겠는가? 어떤 의미에서 고금의 맛좋은 음식은 모두 먹어보고, 세상의 절경은 모두 즐긴 사람이야 말로 탐욕스런 인간이 아니라 세상을 배우고 성장하는 인간이 아닐까? 법정스님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셨는데 만약 세상만사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웃이며 국가가 무슨 상관일까? 세상에는 분명 흙탕물 같은 인간들도 많다. 그런 인간들 사이를 허우적 거리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물론 적게 가지는 것,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왜냐면 가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가지고, 필요없는 것을 가지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따금 금식을 하는 날이 있으면 좋다고 해서 굶어죽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듯 먹어야 산다고 해서 소화불량으로 죽을 만큼 먹거나 아무 것이나 먹기만 하면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물건 자체는 그저 물건일 뿐이다. 세상에는 좋은 물건도 나쁜 물건도 없다. 스마트폰에 중독된 것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으니 스마트폰을 아주 사악한 물건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마치 수갑처럼 우리를 철저히 구속하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스마트폰만큼 우리를 해방시켜준 물건도 없다. 그래서 너도 나도 쓰는 것이 아닌가?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어디를 가도 연락을 취할 수 있고 간단한 사무도 볼수 있게 해주는 기계가 있다면 너무 좋겠다면서 우리는 그걸 강렬히 꿈꿨을 것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개발되고 대중화된 것이다. 사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도무지 스마트폰 없었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나 싶다. 길이라도 어긋나면 사람을 기다리고 찾느라 무한정 시간을 써야 했다. 스마트폰은 꿈같은 기계다. 이제는 가히 우리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마트폰 네비없이는 길도 못찾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렇다. 다만 그 안에 빨려들어가서 나를 잊게 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사람이 없는 조용한 바닷가나 산중에 가면 혹은 사막이나 바다위에 가보면 우리는 그 진공속에서 뭔가를 느낀다. 그래서 그것은 참으로 좋은 경험이 된다. 하지만 정말 그게 좋기만 하다면 왜 인간들이 이렇게 바글거리며 모여살겠는가. 산중에서 홀로 산다면 특히 문명과 떨어져 산다면 우리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하루의 모든 시간을 써야 한다. 생각할 시간도 사랑할 시간도 독서할 시간도 없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물건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기왕에 뭔가가 있어야 한다면 우리는 마음에 드는 것, 좋은 것을 놓고 싶다. 많은 물건들이 우리를 해방시킨다. 인간은 스마트폰으로 해방되었지만 그 이전에 자동차로 해방되었다. 차가 있으면 좀 더 쉽게 움직일 수가 있다. 신용카드가 있으면 물건을 구하는 거나 돈을 지불하는 일이 쉬워진다. 하지만 완전히 공짜인 것은 없다. 스마트폰도, 자동차도 신용카드도 다 관리를 요구한다. 그래서 너무 많은 것을 가지면 편하자고 구한 물건이 오히려 일거리를 만든다.  

 

복잡한 IT기기를 쓰거나 복잡한 수학계산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뭔가 바람직하지 않고 단촐한 옷에 거의 금식하다시피 하면서 산중에 앉아 돌멩이처럼 변해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넓게 보고 크게 보며 그러면서도 마음이 안정되어 나를 잃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재미있는 삶이 바람직하다. 다만 휩쓸리고 집착하는 일을 경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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