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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누군가의 섯부른 조언이 나를 아프게 할 때

by 격암(강국진) 2021. 5. 21.

21.5.21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해준다는 간섭이나 조언이 우리를 아프게 할 때는 많다. 그들이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마음대로 판단하여 뭘 잘했느니 못했느니 뭐가 과분하니 하는 말을 듣다보면 그것이 비난이건 칭찬이건 피곤해 진다. 그들과 나는 돌고래와 닭만큼 서로 다른데 왜 모이를 쪼아먹지 못하냐던가 수영을 이렇게 잘하다니 대단하다는 말을 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세 사람 정도만 모여서 그렇게 하면 상황은 종종 매우 곤란해 진다.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점점 용기를 내는 그들은 남의 인생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세 사람이면 군중이고 군중이면 자신들의 생각이 상식이니 모여든 세 마리의 닭은 한 마리의 돌고래를 쏘아붙이기 시작한다. 몰상식한 당신은 그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해명할 의무가 있다는 식이다. 게다가 당신이 설사 뭐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러분의 생각보다는 자기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당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 것이며 좀 억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이 당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그들의 뜻대로 살기를 강요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미안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기는 커녕 마치 자신이 당신을 돌봐주고 있다는 듯이 행동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 마음대로 스스로를 보호자의 자리에 놓고 당신을 아무 것도 모르는 유치원생 보듯이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보다 그 사람들의 말 자체보다 그 말의 형식을 좀 더 천천히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가 내 일에 끼어든다던가, 누가 나보다 잘난 척을 한다던가 하는 생각은 나와 상대에 대해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 말이 옳은가라는 질문에서 뒤로 물러나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조언하고 끼어드는 것이 모두가 주제넘은 것이며 나쁜 의도를 가진 일인 것도 물론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어떤 말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기 전에 그게 누구의 입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형식으로 나온 말인가를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누구의 입에서 나왔건 옳은 말은 옳은 말이다같은 말하는 사람들은 바보다. 말의 의미는 문맥에서 나온다. 성실은 좋은 것이지만 원자탄을 만드는 성실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듯 어떤 구체적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했을 때 메세지와 메신저를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다. 당신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전체의 일부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옳다니 무슨 문맥에서 그렇다는 말인가? 살인자가 칼을 팔라고 해도 점원으로서 칼을 파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며 칼을 건네주는 것이 일은 일이고 법은 법이다같은 말이다. 그런 일이 당연히 옳다고만 단언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바보취급당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우선 그 사람이 어느 정도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태도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중에는 남의 일에 끼어들고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결코 그 일은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임은 지지않고 간섭은 하겠다는 것이다. 그 일이 내 일이 아닌데 내가 무슨 책임을 지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조언을 하는 사람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이 세상 모든 일은 일단 관여하기 시작하면 책임이 붙기 마련이다. 그런 각오와 생각없이 던지는 조언은 무의미하고 위험하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책임을 질 생각을 하면서도 관여하는 것이지 괜히 한번 건드리듯이 관여하지 않는다. 

 

반면에 평상시에는 전화 한 통화하지 않고 방문하는 일도 없으면서 만나면 대뜸 이게 옳니 그르니 따지려고 드는 사람들이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그들은 사실 깊은 고민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이 그저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작해야 자신의 체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그저 의견일 뿐', '그냥 하는 말' 이라고 하면서 집요하게 말하는 것은 앞뒤가 안맞지만 그들이 짐짓 진지하게 말하는 척 한다고 해도 사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의 의견에 별 확신이 없다. 그들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서 당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해서, 심지어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속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당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있다고 해도 정말 사소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그들이 스스로의 조언에 책임질 의사가 없다는 것에서도 들어난다. 즉 비난하고 간섭해서 당신의 인생을 흔들고는 싶지만 그 결과가 나쁘게 나오는 상황이라도 자신이 아무런 책임은 질 생각은 없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투자를 100% 확신하고 친구에게 그걸 권한다면 당신은 투자가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남에게 투자를 하라고 하는 사람에게 당신돈도 여기 걸어라고 했을 때 뒤로 물러선다면 그런 권유는 그저 말뿐인 것이다. 진심이 아니다. 진심이라도 좋은 조언일지 아닐지 모르는데 진심도 아닌 조언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주식이나 땅투자에 대해서 실제로 투자는 안하면서 뒤에서 내가 그게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엄청나게 많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투자하면 잘할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의 어려움을 굉장히 과소평가하고 있다. 에베레스트산 아래에서 입으로만 정상을 정복하고 당신에게 저 산에 오르라고 하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말이란 그런 훈수꾼의 말이다. 

 

이런 것보다 더 나쁜 조언도 있다. 그것은 무관심한 조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하는 사람의 조언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은 나의 행동이나 선택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듯이 말하지만 실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당신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고 나면 굉장히 어처구니 없을 때도 있다. 나의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이익을 위해 남의 인생의 큰 줄기를 뒤흔들려고 하는 때도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은 조언이나 간섭이 아니라 부탁이나 이해의 요청인데 그는 거꾸로 조언을 제공해준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만약 그 사람이 상황을 솔직하고 겸손하게 말하며 협동과 이해를 요청한다면 충분히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부탁을 해야 할 때 조언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마치 계약조건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이런 조언들은 흘려들어야 한다. 숨겨진 의도들은 위험하다. 이런 조언을 듣느니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의견을 듣는 쪽이 더 객관적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조언이란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만이 가치가 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란 나는 비록 이 사람과 다르지만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인정, 그의 삶과 나의 삶을 이어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걸 위해서 나의 삶을 어느 정도 허물고 상대방의 삶속에 참여해 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다. 자기의 삶을 확고하게 방어하면서 타인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 들어볼 생각도 없으면서 던지는 조언이란 가치가 없고 파괴적이다. 조언은 대개 정보를 몇개 조합하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안에 숨겨져 있는 여러가지 편견과 가정에 근거한다. 그 편견과 가정들은 그 사람이 결코 당신에게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는 것이거나 그 자신도 자신이 편견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돌고래를 이해하지 못하는 닭처럼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숨겨진 편견과 가정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돌고래인 것을 알고 상대방이 닭인 것을 알면서도 관심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의 조언만이 가치가 있다. 

 

이때문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들에게 하는 조언과 자신의 제자에게 하는 조언은 서로 매우 다를 수 있다. 자신이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아들의 경우는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을 조금 더 상세히 살피게 된다. 게다가 미래에 아들이 어떻게 되는가하는 것이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더 말에 신중을 기할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삶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물론 자식의 행복을 바랄 것이며 자식의 가능성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만큼의 애정이 없는 제자라면 판단은 상당히 다를 수 있다. 아들은 하나의 인간으로 인식되지만 제자는 그저 청년이니 대학생이니 한국인이니 취준생이니 하는 보통명사로 어설프게 파악된 존재이며 종이나 컴퓨터 스크린 위에서 쓰여진 숫자중의 하나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 사고도 표면적인데서 멈추게 되어 여러 조언을 하지만 그 조언의 바탕을 보면 '너 정도면 이만큼 살면 만족해라.'라던가 '돈 많이 버는 직장이 무조건 좋은 직장이다.', '이러저러한 법칙에서 결국 너는 예외가 될 수 없다.' 같은 그다지 자명하지 않은 전제가 깔리기 쉬운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전제를 눈치채기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 없는 사람의 조언이 무의미해 지는 이유다. 

 

불행히도 관심과 애정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그걸로 이해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 그래서 낡은 시대에 익숙한 부모의 애정어린 조언은 아주 자주 자식을 망친다. 그 부모들은 진심으로 좋은 것을 주려고 하면서 조언을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자식은 지금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게 된다. 

 

세상을 테니스 게임으로 보는 사람은 설사 그 아들이 노벨상을 탈 학자거나 경제계를 주무르는 기업가라도 테니스도 잘 못치는 바보로 여길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매우 성공한 가수인 아이유는 어릴 때 가수가 되겠다고 할 때 많은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를 구박한 친척들이 뭘 알겠는가. 그들은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이는 가수의 삶을 모른다. 그들은 애초에 노래에 대한 열정도 없다. 그러니 행복한 여자의 삶이란 그저 알바나 열심히 하다가 바보같은 남자 하나 잡아서 애나 낳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이유에게 그렇게 살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야 말로 자신들이 해야 할 도덕적인 행동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애정으로 인한 행동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조언은 물론 이해에 근거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보편적이고 일반론적인 조언도 어렵지만 좀 더 개인적인 조언은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조언은 종종 상대를 해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말을 조심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에게 조언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의 섯부른 조언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고 할 때 과연 그들은 내 가슴을 아프게 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가? 자격없는 사람들의 평가는 무의미하다. 자신이 닭인지도 내가 돌고래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때로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모르거나 잊어버린다. 일상생활에 젖다보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보면 자기를 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자신이 닭인지 돌고래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슴이 아픈 것이다. 

 

섯부른 조언이 우리를 아프게 할 때 우리는 세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1. 그들은 당신에게 사실은 관심이 없다.

2.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다시 가질 필요가 있다.

3. 나쁜 일은 본래 종종 생긴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고 그 일은 결국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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