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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나이가 드는 것과 판단이 빨라지는 것

by 격암(강국진) 2021. 6. 26.

21.6.26

사람마다 격차가 워낙 크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지만 내 주변의 노인들을 보면서 나는 문득 나이가 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바로 판단이 빨라지는 것이다. 나는 이걸 좋은 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나쁜 것이다. 판단이 빨라지는 것은 경험이 쌓여서 그렇게 되는 면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큰 이유는 실질적으로 그 사람이 사는 세계가 점점 줄어들어서 그렇게 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당신이 미지의 거대한 대륙에 처음 던져졌다고 하자. 당신은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조심스럽다. 그러니까 무슨 판단이든 느리고 대개의 경험은 신기한 것이 된다. 당신의 하루는 긴장의 연속일 것이고 놀라움의 연속일 것이다. 흔히 어린애의 하루는 아주 길지만 나이가 들면 하루 하루가 빨리 간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렇게 모든 순간 순간이 의미있고 긴장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며 삶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신이 작은 방안에 갇혀서 매일 매일을 보낸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 방안에서 이미 상당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 방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 설사 지금 앉아 있는 의자에서 책꽃이 뒤편이 안보인다고 한들 거기에 가면 진귀한 보물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으며 맹수가 튀어나올거라는 생각도 없다. 이렇게 당신이 사는 세상에는 불확실성이란 없으므로 당신의 판단은 점점 빨라진다. 자기의 세계를 확실히 알고 있으니 망설일 것도 없다. 당신은 눈을 감고 손을 뻗어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 

 

불행히도 적어도 많은 사람은 사물을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용기가 없으며 세심한 관찰력이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든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판단이 빨라지는 것을 그저 자신이 젊었을 때에 비해 경험이 쌓이고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진실의 절반도 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더이상 도전할 용기가 없는 사람의 세계가 줄어드는 현상이다. 당신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우리는 어느새 여행도 시들하게 생각하게 되고, 고금의 고전에 도전해서 정신적 한계를 넓혀보겠다거나 자신이 이제껏 해보지 않은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경험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나이가 젊으면 육아나 직장일들 때문에 경험의 폭이 넓어지거나 유지되는 일이 어느 정도 저절로 생긴다. 하지만 나이가 좀 더 들어 아이도 다 크고 정년이 다가오고 일은 익숙해지면, 아니면 아예 은퇴를 하면 그런 일은 별로 없다. 그렇게 삶이 단조로워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조금씩 생각과 도전이란 것을 포기하게 된다.꼭 치매 판정을 받아야 우리의 세상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삶에 흥미라는 것이 줄어들고 가는 곳이 줄어들면 대개 세상이 줄어들기만 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설사 그걸 안다고 해도 종종 우리는 용기와 지혜가 없다. 자기의 세계바깥으로 나갈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확장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당연히 용기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도전은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현명한 도전을 해야 한다. 하지만 더이상 우리는 열정도 지혜도 없기에 모처럼 용기를 내서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턱도 없는 것을 하게 되어 해보자 마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곧장 다시 그 옛날의 작은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바로 확신과 판단이 빨라지는 것이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척척 판단한다. 천천히 상황을 느끼고 음미하는 일이 없어진다. 사람을 만나도 사소한 몇가지 단서를 통해 이 사람은 참 훌룡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몹쓸 사람이라고 단언해 버리고 만다. 

 

노화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럭저럭 그렇게 계속 살 수 있으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은 불행하게도 긴밀하게 세상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따금씩 우리는 바깥 세계와 접촉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관공서에서 처리할 공무가 있어서 서류를 작성하게 된다던가, 이사를 가게 되어 새로운 장소에서 적응을 해야 한다던가, 생각지도 못하게 건강이 나빠져서 내 작은 세계를 견딜만하게 만들어 주던 부분이 사라지고 마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삶은 공포스러워진다. 그러면 빠르게 빠르게 판단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원래는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을 잔뜩 만든다. 애초에 차분히 결정하고 행동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데 일들을 미루다가 할 때는 너무 서둘러 처리하다가 끝없이 일이 생기게 되고 심하게 되면 혼자서는 해결이 안될 정도로 일이 꼬이게 된다. 

 

자기를 지키는 일은 실로 쉽지가 않다. 큰 집을 수선하면서 살듯이 계속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살아야 한다. 모르는 사이에 한칸 한칸이 무너지고 망각될 수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도 필요하지만 자기 자신의 기억을 계속 확인할 필요가 있다. 10대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20대에는, 30대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꾸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기를 쓴 사람은 이따금 그걸 읽어볼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작품이랄까, 당시의 자기를 기억하게 해줄 것이 있다면 그걸 보관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게 지나치면 과거에 갇히는 것이 되지만 거기에 게으르게 되면 우리는 점점 작아지는 인식의 감옥속에 갇히게 되기 쉽다. 언젠가는 새로 공부한 것보다 잊혀지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이미 배운 것이나마 지키는 것도 어렵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도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보라. 이 일은 치매환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젊던 늙었던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그 일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한가지 증상을 볼 일이다. 

 

당신의 판단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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