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수동적인 삶과 행복

by 격암(강국진) 2021. 7. 24.

21.7.24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능동적인 선택을 하고 살고 어느 정도는 수동적으로 우리 주변의 환경에 떠밀려 산다. 그런데 이 능동성이란 행복이나 삶에 대한 만족감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하고 능동적인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능동성이 우리의 행복에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다른 어떤 때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즉 능동적인 삶이란 자아발견의 순간들이 연결되는 삶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환경에 떠밀려서 산다. 그 첫걸음은 유아시절이었을 것이다. 유아시절이라면 부모가 정해준 경계안에서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청소년이 자아를 발견하는 기본적인 과정은 바로 이 부모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분리하면서 일어나는 것이고 다시 말해 부모의 뜻대로, 부모의 해석대로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는 다른 선택을 하면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분리가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는 나도 모르지만 부모도 모른다. 이런 단계에서 부모의 뜻은 부모라는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의 의견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나 상식처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부모가 내일 태양이 동쪽에 뜬다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부모가 태양보고 동쪽에서 뜨라고 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매사를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에게 순종하게 된다. 

 

이 과정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아이들은 진학에서 교제, 취미에서 패션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의견을 그저 또 하나의 인간의 의견으로 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30이 넘고 50이 되어도 부모나 형제의 눈치를 본다. 그러니까 부모가 멋지다고 말하면 아 멋진 건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형제가 별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자신의 성취나 자신이 가진 것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아적인 태도를 나이를 들어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기본적으로 본인의 책임이지만 가족이 그 사람을 계속 어린애 취급하며 억압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둘러 보면 사실 세상에는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애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종종 다시 자신의 아이들을 억압하고 어른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다면서 결코 아이들을 자기 손 바깥으로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억압을 애정과 관심이라고 부르고는 한다. 

 

이 과정은 물론 반드시 가족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지역사회의 굴레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수동성에 빠져 있을 수 있고, 어떤 조직속에서 그렇게 될 수 있으며 국가단위에서 그렇게 될 수 있다. 직장에만 몰두하면서 살다가 은퇴후에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는 이야기도 결국 직장생활이라는 환경에 수동적으로만 적응해서 살다보니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수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마치 영화를 찍는 데 너무 몰두한 배우와 같다. 그는 열심히 주어진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를 한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고 시나리오 바깥의 세상에 대해서도 잊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영화촬영에는 끝이 있다는 것도 문제다. 영화촬영이 끝이 나고 나면 이런 배우는 우울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이렇게 영화를 찍는데 몰두한다는 것이 영화배우로서도 한계를 만든다. 시나리오를 읽고 연기한다라는 일상에 몰두한 사람은 그 일상을 넘어설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시나리오를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해 진다. 영화를 영화로 보고 영화를 찍어야 진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영화와 영화를 구분해야 즉 하나의 영화안에 갇히지 않아야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는 좋은 배우가 된다는 것말고도 많은 가능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이 배우는 알기 어렵다. 

 

수동적인 삶이란 결국 자신을 어떤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종종 필요한 일이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라 시간도 유한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도 유한하다. 어떤 분야의 연구에 평생을 바치거나 어떤 지역사회의 발전에 평생을 헌신한 사람들의 삶이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집착하는 테두리가 언제나 충분히크지는 않다.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이며 우리가 말하는 그 테두리를 주는 가족이나 직장이나 골목의 이웃들은 종종 영원해 보이지만 실은 한계가 있는 게임같은 것이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가족이나 직장같은 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10살무렵에 너무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서 그 10살 무렵의 삶을 영원히 재생하고 보존하려고 하는 노력에 빠지는 것은 퇴행적이다. 성공할 수 없고 운좋게 어느 정도 성공한다고 해도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거기서 새로운 추억과 행복을 찾아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유한한 우리는 언제나 어느 정도는 수동적이다. 능동적인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매순간 새로운 것을 찾아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도달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순간 우리의 판단과 선택을 한다. 새로운 게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이것이 능동성이다. 

 

능동성이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자아발견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치타라면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쾌감과 성취를 느낄 것이다. 돌고래들 사이에 끼어서 바보 돌고래라고 구박만 받다가 달리기를 시작해 보니 당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수영을 좀 더 잘하니 못하니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누구나 유한하지만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더더욱 유한하다. 그래서 아인쉬타인이 아들이라도 그 아들을 멍충이 취급할 부모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아들이 유현진이라도 그 아들을 억지로 야구를 못하게 하고 막노동을 시킬 부모도 넘쳐난다. 돌고래는 바다에 있을 때 행복한데 돌고래를 억지로 숲에서 살게 하는 그런 사람도 세상에는 흔하다. 

 

인생은 결코 완벽할 수가 없다. 어떻게 살건 설사 빌게이츠나 아인쉬타인처럼 살아도 인생에는 후회와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여기에는 특히 남과의 비교라는 문제가 등장하는데 이런 걸 생각해 봐야 한다. 숲에사는 원숭이가 바다에 사는 돌고래에게 숲은 축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바보같은 소리다. 돌고래에게는 바다가 더 좋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같은 소리다. 그런데 현실에는 이런 바보같은 소리가 넘친다. 

 

너도 나도 서로를 똑같은 것으로 판단하면서 집이 어떠니, 자식이 어떠니, 차가 어떠니, 주말에는 어떤 호화로운 식사를 했으며 어떤 비싼 휴가를 갔니를 가지고 싸운다. 실용적인 의미에서건 미적인 의미에서건 뭘 느낄만한 감수성이나 지식도 없으면서 유명 브랜드 옷이나 가방을 가지고 자랑을 한다. 내 집은 너의 집보다 두 배가 크니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고, 나는 너보다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 행복하다고 말하며, 내 얼굴이 더 예쁘고, 내 근육이 더 우람하니 나는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자기가 원숭이인지 돌고래인지도 모른다. 대개의 경우 수동적인 삶을 살면서 누군가가 주입한 가치판단의 기준에 따라 좁쌀같은 세상에서 살 뿐이다. 

 

우리는 유한하므로 뭘 선택하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성공이 뭔지를 절대적으로 정의할 수도 없다. 어떤 행복한 삶을 살건 거기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며 실은 다른 선택을 해서 좀 다른 삶을 살았다면 당신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만족하며 살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공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이것 저것을 고치며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삶에 코가 꿰여서 탈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조심하면서 살아볼 뿐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는 확신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만 언젠가 삶을 끝낼 때 능동적인 삶을 산 사람은 나는 나름대로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재미있게 살았다는 느낌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은 적다. 왜냐면 그건 상당부분 운과 댓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박스를 열었는데 그게 복권당첨은 아니었다. 그게 내 선택이었다. 

 

수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남이 열어준 박스만 본다. 그래서는 모처럼 운이 좋아서 복권에 당첨되도 행복하지가 않다. 언제나 우리는 더 큰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처럼, 실패한 사람처럼 여길 수 있다. 그 도전도 그 성공도 내 책임이 내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도 자신이 가지 못한 길만 아쉬워하며 우울해 하게 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