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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따분함에 대한 단상 2

by 격암(강국진) 2021. 8. 26.

인간은 신기하고 불쌍한 생물이다. 쥐나 토끼로 살아 본 적이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쥐나 토끼의 삶은 그렇게 많은 자극이 필요없다. 아메바가 지루해서 죽었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듯 동물의 삶은 인간의 그것에 비하면 지루한 반복의 계속인데도 동물들은 그럭저럭 자기를 지키며 산다. 토끼는 여전히 토끼일 수가 있고 쥐는 여전히 쥐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의미로 불완전하다. 인간이 생물학적인 의미이든 문화적인 의미이든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빠르게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제자리를 지키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따분함을 잘 견뎌내질 못한다. 침팬지나 코끼리에게 만년전의 삶이 지금과 달라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만년전과 지금이 전혀 다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물이 그렇게 하는데도 인간만은 태어난 그대로 살다가, 부모가 살던대로 살다가 죽지 못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불행하고 고통스럽다. 종종 너무나 어리석고 미친 짓을 할 정도로 말이다. 

 

내가 어려서는 인간이 이런 특징이 있다는 것을 오히려 절감하지 못했다. 사는게 바쁘니까 따분함에 대처하는 일이 인생의 큰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동물중에서도 가장 긴 유년기를 가지고 있다. 망아지는 태어나서 얼마되지 않아 뛰어다니고 동물들은 대개 한두해면 성년이 되기 마련이고 그것보다 더 짧은 경우가 많다. 아마도 말이나 개는 자신이 어렸던 적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태어나서 얼마되지 않아 어른이 되고 그 다음에는 완성된 성인으로 계속 똑같이 산다. 마치 우리가 기어다니던 시절의 기억이 없는 것처럼 그들은 아예 유년기의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정신차려보니 이미 성인이었고, 정신차려보니 바로 지금 사는 방식 그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유년기가 유달리 긴 인간은, 그리고 문화적 이유로 많은 것을 배우는 인간은 이와는 거의 정반대다. 나이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제외하면 인간의 기억은 대부분이 변화의 기억이다. 종종 우리 앞에는 끝없이 해야할 일이 쌓인다. 소년은 청년이 되고,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을 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며, 아이를 낳아 기르고, 회사에서 진급을 한다. 그런 계속 되는 변화에 허둥대며 적응하느라 바쁘다가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이제는 삶이 무료하고, 반복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어느새 그 나이가 반백이 넘었기 쉽다. 요즘이야 인생을 절반도 안 산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시대지만 예전같으면 죽을 때를 생각할 무렵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대처해야할 문제는 따분함이 아니라 바쁜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이따금 따분함에 고통받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거나 여행을 다니고, 때때로 돈과 명예와 성취에 대한 야망에 빠져 든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럭저럭 따분함은 사라진다.  따분함은 해결하기 쉽다고 느끼며 오히려 자신의 삶은 함정에 빠진 듯하여 매양 바쁘니 제발 한가하고 따분하게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따분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문제이며, 아주 일찍부터 그 인생에 끼어든 문제이다. 인생이 함정에 빠진 것같고 좀처럼 쉴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당신에게 따분함의 문제가 없다면 그건 당신이 따분함을 오히려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당신이 너무 쉽게, 너무 빨리 그 따분함을 치워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당신이 만약 매우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이라면 그래서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그걸 하느라 언제나 바쁜 사람이어서 진정으로 따분함의 문제가 크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당신의 삶이 함정에 빠진 것같다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따분함은 문제가 아니었고, 바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선택한 것을 했던 때문이니 그다지 불만이 없다. 놀이공원에 가서 이 기구 저 기구 타느라 바쁜 사람이 바뻐서 불만이라고, 제발 한가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실은 그 사람은 따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걸 치워버리기 위해 섯불리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일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식으로 벌인 일은 나중에 함정이 된다.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고, 잠시 멈춰보면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늘상 그것때문에 바쁘다. 그런 삶에서 빠져나갈 방법도 보이질 않는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도 그리고 주변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듣는다.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아주 좋았을 텐데. 아무 투자도 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그냥 하던거 하고, 이사하지 말고 살던데 살고, 그냥 그렇게 살았더라면 지금은 훨씬 더 한가하고 성공적으로 살 것같은데 괜한 짓을 해서 인생이 부질없이 바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이런 후자의 경우라면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사실은 따분함에게 휘둘린 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이 따분하다는 것을 조금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을 희생시킨다. 결혼생활이 망가지고, 야망이 망가진다. 재산이 날아가고 진정으로 좀 더 큰 스케일로 재미있고 남다르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 예를 들어 공부라면 따분함의 상징 같은 행위다. 그 따분한 공부를 참고 열심히 한 사람이 모두 자극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따분해도 참을 수가 없어서 공부따위 노력따위 금방 금방 포기하는 사람이 인생의 따분함에서 벗어날 진정한 길을 찾기는 힘들다. 남들은 공부할 때 땡땡이치면서 술도 마시고 클럽에도 가서 노는 학생들은 공부만하는 학생들이 참 따분하게 산다고 놀릴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일이 반복되면 진정으로 따분하게 사는 사람은 수업에서 도망간 사람들이다.  약간의 따분함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뻔하디 뻔한 세상에 갇혀서 진짜 따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면서, 조금의 따분함도 견디지 못하고 그 따분함을 재빨리 치워버리면서 생겨나는 일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일이고, 남의 명령이나 압력이 없으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일상에 빠져서 바쁘게 산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일상을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지만 많은 사람들은 재수가 없었거나 재능이 없었거나 따분함을 견딜만한 참을 성이 없어서 뻔한 일상을 오히려 반복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 따분한데 바쁘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우리가 해야 한다는 일들이 주어진다. 우리 앞에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쌓여있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등돌릴 수가 없다. 우리는 그런 걸 받아들이는데 익숙하고 그러다보면 주체성이 사라진다. 즉 나는 이런 저런 걸 하고 싶다거나, 이런 저런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자꾸 이런 저런 이미 주어진 의무를 로보트처럼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날 운이 좋아서,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아니면 고생할만큼 고생해서, 이제 당신에게 이러니 저러니 하는 사회적 압력이 사라진 때가 와도 당신은 스스로가 뭘 해야할지 모른다. 언제나 남이 하라는 것만 했으니 마치 주문이 안 들어오면 음식을 만들 수 없는 요리사처럼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생은 따분하다고. 뒤돌아보면 조금씩 느리게 호흡하며 그때 그때 천천히 살았다면 하나씩 하나씩 탈출했었을 장벽들이 모두 쌓여 있다. 그 길고 바쁜 인생은 스스로가 깊고 깊은 함정을 파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만 같다. 그래서 이제는 그걸 탈출할 엄두도 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람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망각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외부에 의존해서 나를 정의했다. 나는 회사원이다. 나는 아빠다. 나는 남편이다하는 정체성만 생각하다보니 그런 사회적 굴레를 느슨히 하면 나 자신이 사라지고 만다.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도 그걸 빼고 나면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나도 모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란 타인에게 덜 의존한다. 예를 들어 우리 조상은 자기 수양을 인생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자기 수양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은 따분함을 이기기 쉽다. 이건 누구를 위해서나 누구를 이기기위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다듬고 지키는 일 혹은 내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만들어 보는 일 이런 일은 그냥 나 자신의 이야기다. 나는 이런 걸 세상에 남기고 싶다, 나는 이런 걸 하는 사람이다라는 이야기가 소년시절부터 청년을 지나 노년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기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은퇴를 하건, 주변에 사람이 북적이건 그렇지 않건 따분함에 잘 빠져들지 않는다. 뭔가를 만들어 보고, 자기의 생각을 다듬는다. 반면에 자기 이야기도 없이 뭔가를 해야겠다고 허둥대는 사람들은 세상이 준 일로 바쁘기만 할뿐 자기를 둔하게 만드는 일을 반복한다. 의미도 모르고 노동을 하고, 의미도 모르고 사람을 만나며 초초한 마음을 술이나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채워넣는 일을 계속하다보면 몸도 마음도 둔해질 뿐이다. 그리고 나면 이제는 더더욱 자기가 뭘 해야 하는 사람인지 모르게된다. 

 

따분하지 않은 사람은 겉보기에 매우 따분하게 살 수 있다. 겉보기만으로 모른다. 방안에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이 꼭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은 사실 표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같지만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일 수있다. 반면에 매일 매일 하루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것저것 하는 사람도 그 마음이 온통 초조함과 혼돈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라면 실은 따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모색하지 못하고 옛 패러다임에서 허우적 대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리를 청소 하는 사람은 계속 몸을 써서 노동을 했으니 따분할 틈이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옳지 않다. 문제는 겉보기 이상으로 내부에 있다. 

 

우리는 소나 말처럼 살지 못한다. 인간은 성장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퇴화하고 만다. 따분함은 서둘러 치워버려야 할 일은 아니다. 때로는 성장의 기회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그것에 잘 대처하지 못했을 때 큰 고통이 된다. 우리는 무의미앞에서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따분함은 지금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병의 증상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따분함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안쓰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대로 놔두면 사고를 치거나 우울증에 빠져들기 쉽다. 따분한게 싫어서 자기 인생을 스스로 파괴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따분함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탈출구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찾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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