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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편견과 관용 그리고 착한 학생 증후군

by 격암(강국진) 2021. 9. 6.

21.9.6

편견이란 의견이 어떤 한 쪽으로 치우쳐진 것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좋지 못한 것, 피해야 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편견에 대한 관용을, 아니 그것을 넘어 편견의 절대적 필요성이나 편견의 찬양을 말해야 할 이유가 있다. 첫째로 오늘날은 아주 미디어가 잘 발달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며 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옛날의 평균적 인간, 보통인간은 몇백, 몇천명의 평균을 말했다면 오늘날은 그 규모가 훨씬 더 커졌고 규칙과 압력이 많아졌다. 그 결과 편견을 가지지 말자는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ly correct) 즉 PC는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둘째로 편견은 사실상 개인의 특징내지 정체성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주변 사람과 다를 때 바로 그 부분이 여러분의 특징이 되고 정체성이 된다. 만약 여러분이 주변 모두의 사람들과 똑같은 어떤 부분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런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꼬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꼬리가 없는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각을 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반면에 여러분의 귀가 하나라면 여러분의 별명이 짝귀가 되고 사람들이 무엇보다 그 점에 주목할 가능성이 크다. 

 

이 순간에도 더 커진 사회 시스템은 우리의 편견을 두들겨 없애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언제나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법을 만들고 사회적 상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문제는 사람들 중에는 이 법과 상식을 끝없이 자세한 것으로 만들어, 모든 일에 옳고 그른 것을 자세히 정하고 그것을 규칙으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들을 착한 학생 증후군에 걸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학교에는 선생님이 있고, 교칙이 있다 그리고 이 일은 맞고 저 일은 틀리다는 것을 말해주는 교과서도 있다. 오늘날 학교란 기본적으로 이런 규칙들을 배우고 외워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질문에 대해 같은 답을 말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기관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스승이 소수의 제자들과 자유로운 소통을 하면서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정신적 확장을 시도하는 장소라기 보다는 마치 기계를 조립하는 공장처럼 지식을 분야별로 나누고 다 큰 어른들이 각자의 분야의 교과서만 달달외워서는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수많은 과목을 한꺼번에 공부하게 하는 곳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본래도 어른들보다 경험과 지식이 없는 학생들이 도저히 선생과 교과서를 이길 수가 없다. 수년간 한 과목의 교과서만 달달 외운 어른 교사와 여러 다른 교과목들을 한꺼번에 모두 그리고 처음 공부하는 한 명의 학생이 같이 공부를 하면서 교사의 의견에 제대로된 의문을 표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시험성적이며 시험은 교과서 내용을 외우는 것이므로 심지어 교사의 의견도 중요하지 않고 교과서를 그저 외우라는 태도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즉 문자화된 정보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배운다. 

 

따라서 이런 학생시절을 몇년이고 보내고 나면 자연스레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공통적인 습성이 길러지게 된다. 그것은 모든 일에는 똑같은 정답이 있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답이 없는 질문이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서도 안된다. 그런 질문이 시험에 나오면 그것은 강력한 항의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내가 말한 착한 학생 증후군이란 이런 태도가 몸에 배인 것을 말하는데 이 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자연히 모든 일을 미리 결정해 두고 싶어한다. 즉 이것은 이게 맞고, 이것은 저게 맞으니 모두 답으로 정해두고 고정시키자는 것이다. 규칙을 만들자는 것이다. 규칙이 정해져야 그걸 외워서 지킬 것이 아닌가. 

 

교과서란 수없이 많은 학생들이 배우는 똑같은 교재로 당연히 그 안에서 편견은 세심히 제거되어진다. 저자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저술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건 다시 수없이 많은 검수과정을 거친다. 교과서를 이렇게 만드는 일은 자연스럽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 우리는 교과서를 자아가 없는 로봇을 만드는 기계로 만들고 만다. 더 좋은 교과서를 만들면 만들 수록 자연히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튀지 말 것을 요구하고, 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게 아니라 교과서같은 책속에 이미 인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앞에서 말한대로 사회적 규모가 커질 수록 우리는 정밀 기계 같은 인간으로 키워진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꼭 가져야 할 능력이 오히려 더 많이 제거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착한 학생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해도 매사에 논쟁을 벌이기를 좋아한다. 그 논쟁은 물론 규칙을 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매사를 세심히 관찰하여 모든 것을 규칙으로, 상식의 일부로 만들고 고정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서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자들과 싸우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데 공공의 영역에서 이러저러한 편견을 가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닌가라는 지적에 대해 반박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소중한 약속이며 그래서 일단 결혼을 하면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조차 요즘에는 쉽지 않다. 왜냐면 이런 말은 이혼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에 대한 편견을 만든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혼이 늘어나면 그래서 이혼은 정상적인 것이며 전혀 부담가질 일이 필요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게 옳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친구의 부모가 이혼했다고 할 때 그 친구의 부모는 나쁜 사람이 되고 그 친구는 나쁜 사람의 자식이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는 이미 외국인이 많은데 한민족의 전통문화 운운하면서 한국문화를 강조하면 그건 외국문화에 대한 비하가 되기 쉽고 그 반대로 어느 문화나 다 중요하다고 말하면 우리 문화의 가치를 폄하하게 되기 쉽다.

 

이 딜레마들에 대한 탈출방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걸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란 당연히 불가능하다. 어른들은 알쏭달쏭한 말을 늘어놓으며 문제를 회피할 뿐이며 아이들은 체험없는 공허한 말들을 외울 뿐이다. 결국 현대사회는 어린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면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 어른들은 실제로는 교과서처럼 편견없이 살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살라고 말하고, 어려운 변명이나 늘어놓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은 정직하게 질문하고 답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변명이나 늘어놓으며 위선적으로 사는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이상은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미래일지는 모르나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편견과 특권으로 가득 찬 진흙탕이다. 누구도 혼자만 살지 않기 때문에 그걸 완벽히 피할 수 없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그 진흙탕속에서 조금 더 깨끗한 사회를 꿈꾸며 행동할 뿐이며 법과 상식을 초월하여 개인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세상은 가정폭력 남편이 나쁘고, 뇌물받는 경찰이 나쁘고, 노동자의 피해에 눈감는 기업가가 나쁘다라는 식의 단순한 말만 가지고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 말들은 물론 소중히 기억하고 지켜야 할 상식이고 그 이전에 법이다. 따라서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절대 옳은 정답이지만 현실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같은 사람이 언제나 옳은 일만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을 위해 나쁜 수단이 필요하다는 말을 언제나 부정할 수도 없다. 세상에는 겉보기에는 비사교적이고 투박하지만 말없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옳고 빛나는 정의로운 행동만 하지만 실은 그것이 다 자기를 빛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사람도 많다. 

 

예를 들어 여기 치매가 온 부모에게 아주 모질게 대하면서 같이 사는 자식이 있다고 해보자. 이 자식은 부모에게 험한 소리도 하고, 거의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런데 일년에 한두번 명절에 나타나서는 부모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핀잔주는 또 다른 자식이 있다고 하면 과연 이 두 명의 자식중에서 옳은 사람, 정의로운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은 없다. 같이 사는 자식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못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이 사는 자식은 진흙탕 속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무너져 가는 세상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방관자로 살면서 이 행동은 옳다, 저 행동을 옳다하고 지적질이나 하는 사람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설사 부모가 나는 이 자식이 고맙다라고 말해도 관점에 따라서 진짜 고마운 자식은 다른 쪽이 될 수 있다. 

 

착한 학생 증후군 환자는 대개 방관하고 지적질이나 하며 그러면서도 모든 일에 끼어들려고 한다. 그들은 종종 다른 사람이 버둥거리는 진흙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 없다. 엄마나 아빠에게 폭력을 당한 아이는 무조건 부모에게 떼어내어 고아처럼 혼자 살게 만드는 게 정의일까? 가출학생은 무조건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까? 폭력은 나쁜 것이다라는 말만으로 정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고 시비를 가리고 싶다면 진지한 관심과 이해가 그리고 책임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그저 법으로, 둔탁한 상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1년에 한번 부모를 들여다보면서 잔소리나 해대는 자식과 다를게 없다. 

 

현실은 판단의 연속이다. 그리고 진정한 판단은 정답이 없다. 정답이 있는 것은 대개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냥 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딜레마에 빠지고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닌 것같을 때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 설사 어느 쪽을 선택한 후에도 객관적이고 엄밀하게 왜 그 선택을 했는지를 다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럴 때 우리의 결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편견을 포함하게 되어 있다. 유한한 우리가 살아온 남다른 삶의 괘적이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하게 해준다. 교과서만 외운 사람, 언제나 남의 이야기에 휘둘린 사람은 일관성이 없고 세상에 대한 진짜 이해가 없기에 완전히 엉터리 판단을 하게 된다. 돕는다는게 죽이는 일을 하게 되고 정의로운 사람을 지지한다면서 악당의 편에서 일하게 되고, 가정이 중요하다면서 가정을 파괴하게 된다. 

 

내가 그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기꺼이 사소한 법률을 어기면서 시위에 참여할 것이다. 예를 들어 누드로 거리에 나가서 시위를 하는 일도 필요하다면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이 옳을까? 그것은 분명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상처주는 일이다. 이런 선택에 정답은 없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의 욕망과 가치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 자신의 욕망이나 가치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질 생각도 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꼴사나운, 변명하기 어려운 선택을 한다. 그것은 종종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지만 또한 그만큼이나 자주 우리가 그저 우리의 진흙탕에서 버둥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의 삶은 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산속에서 홀로 수도하며 살아가는 종교인이라도 마음에는 진흙탕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에 얼마간의 빚을 지고 산다. 홀로 산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로 이기적인 선택인데 왜 진흙탕이 없다는 것인가. 도울 수 있는 사람,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돕거나 구하지 않았는데도 왜 누군가를 외면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인가. 그런데 사회속에서 온갖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나는 이기적인 선택따위는 하지 않았고 이때까지 딜레마라고 느낀 선택은 없었다. 언제나 당연한 행동속에서 해야할 일을 하며 살았고 받을 것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남덕에 사는지는 전혀 모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이다. 재벌3세가 자기는 그저 있는 기회들을 이용했을 뿐이고 열심히 일해서 돈벌었다고 말하는 식이랄까.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가 로또당첨이나 다름없는 기회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제 세상을 보자. 우리는 법을 만들고 상식을 만든다. 우리는 단호함도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사형을 집행하기도 한다. 상식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기도 한다. 어떤 선만은 넘지 말자고 욕도 하고 돌도 던진다. 그래도 우린 모두 진흙탕에서 버둥거리고 있다. 그게 삶이다. 우리는 누군가는 합격시키지만 누군가는 불합격시키며 어떤 여학생은 생리대걱정을 하는데 나는 근사한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기도 한다. 삶은 타협과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착한학생 증후군 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아를 가져야 한다. 어떤 건 되지만 어떤 건 안된다는 나의 판단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우리가 모두 유한한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편견은 나쁜 것이지만 편견에 대한 관용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모두 빠져 있는 진흙탕에 대한 예의다. 그렇지 못할 때 착한학생들은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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