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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인과론과 우리의 삶

by 격암(강국진) 2021. 9. 27.

21.9.27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다 원인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은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채워져 있다고 하는 생각을 우리는 인과론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인과론은 사실 엄밀한 증명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인과론은 오히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전제조건이다. 

 

인과적인 관계는 언뜻 생각하면 매일 매일 계속 경험하는 것이라 별로 의심할 이유가 없을 것같다. 이런걸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때려서 우리의 뺨이 아프다. 이럴 때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의 뺨을 때리는 행위를 원인으로 우리의 뺨이 아픈 것을 결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그때 마침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고 해도 그것이 뺨이 아픈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뺨을 맞으면 아프다라는 법칙을 믿는다는 뜻이며 원인과 결과를 지목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어떤 법칙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면 우리의 뺨이 아프다는 법칙은 모르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 소리를 원인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과론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어떻게 어떤 법칙을 알거나 믿을 수가 있을까? 맞으면 아프다는 법칙은 아마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다른 어떤 법칙은 틀릴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법칙이 맞고 어떤 법칙이 틀린지 모른다.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뺨을 맞고 아프다는 당신의 생각은 그저 환상일 수도 있다. 인과론이 어떤 증거, 어떤 인과적 법칙때문에 옳다는 것은 자기 순환적인 논리다. 

 

그런데 이런 알쏭달쏭한 이야기에 공감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당신이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고민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나는 이 일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비트코인의 원리나 원자폭탄의 제조방법이나 괴델의 정리의 증명따위는 모를 것이다. 그런데 몰라도 그런 이야기는 누군가 전문가가 제대로 처리하겠지라고 믿으며 살만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인과론의 이야기는 우리가 피할 수가 없다. 

 

첫째로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믿는 이 인과론은 적어도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게 양자역학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이유다.  어떤 방사선원자가 붕괴하여 두 개로 쪼개질 때 그 원자가 정확히 언제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에는 원인이 없다. 그저 확률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양자역학에 있어서의 인과론 실패는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문맥에서는 오히려 작은 이야기다. 이것은 원자의 세계에서나 그럴 뿐으로 확률적으로는 이야기가 다르다. 누군가가 나에게 총을 쏘면 그 총알이 내 몸을 그냥 통과할 확률이 있을까? 있다! 그것을 우리는 터널링이라고 부르며 원자 수준의 세계에서는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핸드폰에 잔뜩 들어있는 반도체에서 터널링효과는 늘상 일어난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말하면 총알이 내 몸을 터널링으로 그냥 지나갈 확률은 지극히 낮기 때문에 나는 그걸 믿고 나에게 총을 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확률적이라는 전제를 붙이면 인과론은 뉴튼의 고전역학에서처럼 엄밀하게 작동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양자역학에서의 인과론 실패를 거론한 이유는 그것이 인과론을 그렇게 당연한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된다는 명확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현실적으로는 설사 인과론이 옳다고 해도 현재의 우리가 그 인과관계를 제대로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신이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어떻게 신의 뜻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신학적 질문과 비슷하다. 즉 유한한 인간이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존재가 신이라면 신이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는 말은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양자현상때문에 생기는 일은 인간에게는 원인을 지목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그게 원숭이나 개미에게 의미가 있는 설명일까? 그런 상황에서 원인이 있다거나 없다는 말이 의미가 있는가? 괜히 원인이 있다는 말을 맹신해서 이상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게 되지 않을까? 

 

사실 인과론의 질문과 신학적 질문이 비슷해 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은 인과론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낸 결과다. 이런 의미에서 인과론은 어쩌면 가장 원시 종교적인 생각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세상의 존재를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의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그 원인의 원인을 찾다 보면 결국 모든 일의 첫번째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그것, 우리의 생각이 멈춰야 하는 무한의 끝에 있는 존재이자,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그것을 우리는 바로 신이나 진리로 부른다. 이렇게 보면 인과론은 오히려 신보다 더 근원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인과론을 믿기에 신의 존재도 느끼고 생각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들이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가치판단과 윤리적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일상속에서 더 가치있는 일을 하려고 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하며 공평하게 행동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선택과 행동은 인과론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인과의 관계를 너무 믿으면 우리는 그 인과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의 맨끝과 처음만 보게 된다. 

 

물리학 이야기를 다시 해서 미안하지만 극명한 예인 뉴튼의 법칙을 생각해 보자. 엄격하게 결정론적인 뉴튼의 운동방정식은 지금의 상태가 미래의 모든 상태들을 다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과거의 어떤 한 시점에서의 하나의 사건이 그 이후의 모든 사건을 다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혁명이래 학문의 모범사례였던 물리학은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세상일을 이렇게 보도록 만들어 왔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타임머신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거기서 주인공이 과거로 가서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바꾼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오면 현재가 바뀌어 있다. 우리는 시간여행을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얼마나 결정론적인 인과론을 강하게 믿는가를 보여준다. 사실 역사를 읽을 때도 우리는 임진왜란때 이것만 달랐다면 역사가 달랐을 텐데라거나 박정희가 5개년개발계획을 실시하지 않았으면 한국은 지금 형편없을텐데라는 식으로 말하고 그걸 쉽게 믿는다.

 

곰곰히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은 터무니 없을 뿐만 아니라 상호충돌한다. 당신이 만약 뉴튼의 전기영화를 보고 있으면 뉴튼위로 떨어진 사과 한알이 인류의 역사를 바꿨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뉴튼 이래 이제까지 살았던 모든 다른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돌멩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기억하는가? 초기조건과 뉴튼 운동방정식.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화에 대한 과학 다큐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수십만년전에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을 만들어 낸 돌연변이의 탄생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아 저 유전자 돌연변이 하나가 역사를 만들었다! 후자의 사고 방식속에서는 이제 뉴튼이나 뉴튼의 사과따위는 보이질 않는다. 그 유전자 돌연변이 하나가 현대과학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 다시 말하겠다. 기억하는가? 초기조건과 뉴튼 운동방정식. 우리가 얼마나 이런 인과론적 사고에 중독되어 있는가가 느껴지는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역사처럼 복잡한 대상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을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설사 어떤 슈퍼 지능을 가진 존재에게는 그 원인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해도 적어도 지금의 인간에게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건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과학같은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과론이 옳은가 그른가는 현실적으로 의미가 약하거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끝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면서 이론을 만들고, 설명을 만든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타고난 특성이며 이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뭔가를 믿어야 한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그걸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 끝없이 고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돌을 던졌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는 화가 난다. 그 사람이 내가 아픈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알고 보니 치매노인이었다면? 어느새 내 마음은 풀어진다. 그는 치매라는 병의 피해자일 뿐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낼 수가 없고 그렇다고 치매라는 병에게도 화를 낼 수가 없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를 보는 관점에 따라 우리의 행동은 이렇게 쉽게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직장에서 해고된 것은 누구 때문일까? 내가 부자로 사는 것은 누구때문일까? 어떤 사람이 오늘 죽었다는데 그건 무엇때문일까? 우리나라가 잘 사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북한이 못사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세상일들의 의미는, 원인과 결과는 자명한 객관적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전부가 아니면 적어도 대부분 우리가 우리 머리속에 가진 생각들, 이론들때문에 나온다. 그리고 생각과 이론들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검증이나 고민없이 그냥 여러 설명과 법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깝게 낭비될 것인가. 필요없이 분노하고 자기 인생을 파괴하며 사실상 가장 소중한 은인에게 욕을 퍼붓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도 우리가 인과의 법칙은 당연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자명하고 당연하다는 법칙이란게 뭐란 말인가. 

 

인과론에 대해서는 이제 한가지만 더 말하고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사실 모든 것이 인과론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말하려는 한가지란 약화된 인과론과 그 의미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뉴튼의 운동법칙은 결정론적이다. 그래서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의 상태가 그 이후의 미래를 전부 결정한다. 인과론에 중독된 우리는 세상일들에 이런 멋진 설명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이런 설명에 절대 도달할 수 없으며 사실 뉴튼도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뉴튼은 고립계라는 세상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동역학을 연구한 것이다. 우리가 관심있는 것만 그 고립계 안에 있고 그 바깥의 것은 일단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고립계다. 이것은 현실에 대해 이따금 맞는 근사일뿐이다. 예를 들어 행성이나 달의 움직임따위를 연구할 때 말이다. 뉴튼 방정식을 쓸 수 있다고 해도 현실적인 조건에서는 그 방정식을 절대 풀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삼체문제라고 불리는 문제에서 오래전에 보여졌다. 그 고립계 안에 물체가 2개가 아니라 3개만 되도 일반적으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약화된 인과론은 원인과 결과를 다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건들은 확률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확률이란 반드시 양자역학적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정말 전혀 모른다. 이런 관점속에서 역사는 다시 민중에게 돌아간다. 호모사피엔스를 만든 유전자 변이가 역사를 만든게 아니다. 그 이후 있었던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내린 하나 하나의 선택들이 각자 역사를 만든 것이다. 이승만이 이걸하고 박정희가 저걸 해서 한국이 지금 잘사는게 아니다. 한국속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 하나 내린 판단과 행동들이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이다. 좋건 나쁘건 10년전에 내린 한가지 판단때문에 지금 당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게 아니다. 매일 매일 내렸던 작은 선택들과 우연들이 당신을 지금처럼 살게 만든 것이다. 법칙과 설명은 세상을 또렷하게 보이게 만든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내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또렷해진다. 그러나 그게 너무 또렷해도 곤란하다. 그 법칙과 설명은 기본적으로 우리 머리안에서 나온 거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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