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5
우리는 여행을 간다던가, 진학을 한다던가 혹은 저녁에 뭘 먹을까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산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과 살아가는 존재라 그 결정은 종종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고 설사 그것이 누군가의 모자를 사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어떤 개인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조언과 의견을 요청받게 되는 일이 많다. 하지만 뭔가를 남과 의논하고 결정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흔한 이유는 이 의논이라는 것이 객관적 지식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 주전자가 1kg을 넘을까 넘지 않을까같은 질문에는 객관적 답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다면 그 답을 말하면 된다. 우리는 이 주전자의 무게가 그걸 이야기하는 문맥에 따라 달라질거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성이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런데 대개 우리의 토론은 완전히 혹은 그 상당부분이 객관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주관적 취향의 문제거나 평가하는 방식에 의존하는 성질을 가진 질문에 대한 것이다.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이 가방과 저 가방중 어느 것이 좋은가에 답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프라다 가방보다 비닐 봉지를 더 좋아한다. 왜냐면 비닐봉지는 공짜다. 게다가 들고다니면서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몇백만원짜리 가방은 무서워서 들고 다닐 수 없는 귀중품이라서 싫을 수도 있다. 그러니 프라다 가방이 좋은가 비닐 봉지가 좋은가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하기 나름인 것을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원래 이렇다라던가, 당연히 이렇다고 말하는 사람과 이야기해봐야 힘만 빠진다.
그런데 주관적 문제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로는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된다. 예를 들어 우리 마을에 댐이 건설되어야 할 것인가라던가 대학에는 꼭 진학해야 하는가같은 질문들처럼 많은 질문들은 사실 가치관의 문제가 개입하는 주관적 측면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 답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상 이러저러한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다 자각하지 못한다. 이러니 대화가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비슷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단순한 주관과 객관의 문제보다 더 어려운 문제도 있다. 주어진 질문이 그걸 평가하는 방식에 의존하는 문제는 더 이해하기 어렵고 극복하기 어렵다. 더 넓고 크게 보는 사람과 더 좁게 보는 사람의 시야는 다르고, 먼 길을 떠날 생각을 하는 사람의 판단과 내일만 생각하는 사람의 판단은 다르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도가 없고 정확한 정답도 없다.
여기 거지 마을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거기서 누군가가 한 사람을 지목하면서 이 사람은 부자냐고 물었다고 하자. 그 거지가 그 거지마을 최고의 부자라면 부자인 것이 맞다. 하지만 테두리를 조금 넓혀서 보면 이 거지나 저 거지나 다 거지다. 그들은 누구도 부자가 아니다.
앞의 이야기가 공간의 측면이었다면 이 테두리의 문제를 시간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 바로 새옹지마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에서 어떤 사람이 말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는 일은 시간이 흐르면서 좋은 일이 되었다가 나쁜 일이 되었다가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절름발이가 되는 일이 좋은가라는 질문의 답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바뀌는 것이 보여진다.
테두리의 문제는 시공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으로도 많이 생긴다. 누군가가 우리 아이가 과외를 하는게 좋을까요라고 묻는다고 하자. 아이는 과외선생님으로부터 문제를 푸는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감이 생기고 공부에 취미를 가지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려운 길을 쉽게 가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그 아이는 나중에 진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스스로 그걸 해결할 힘이 없을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경우를 몇번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좋은 환경에서 도움받으며 공부한 아이들은 중학교정도까지는 수재처럼 보였으나 고등학교에서 갑자기 평범하게 변하는 경우가 있다. 어린 시절에는, 예를 들어 초등학교나 유치원때는 어른의 도움이 얼마나 있는가에 따라 아이의 성취는 크게 차이가 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과외도 하고, 선행학습도 하는 아이를, 부모가 더 신경써주는 아이를 그런 도움없이 공부하는 아이가 따라가기 힘들다. 하지만 대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주변과 어른의 도움은 한계를 들어내게 된다. 그 일은 고등학교때 있을 수도 있고, 대학 때 있을 수도 있으며 직장에서 처음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늦게 일어나면 날 수록 오히려 비극은 더 커진다. 어릴 때 실패하고 넘어지면 일어나기 쉽지만 과대망상 수준으로 커진 자기 이미지가 다 커서 처음으로 망가지면 회복이 아예 안될 수도 있다. 실패가 용납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도와줘야 하나, 아니면 자기 힘으로 극복하게 해야 하나? 실패도 약이 된다고 실패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나?
인간은 어차피 유한한 존재이니 멀고 넓게 본다고 해봐야 결국 시야는 한정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꼭 넓게 보는 것이 옳다는 근거도 없다. 깊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사랑에 빠지질 못한다. 왜냐면 온갖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윤리적, 경제적, 가치적 고민을 하다보면 아무 일도 생기질 않는다. 어쩌면 가장 사려깊은 생각이란 인생은 따져봐야 모르는 것이니 마음가는대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일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마치 내일 전쟁이 나서 이 세상이 뒤집어질 판인데 그걸 모르고 진급걱정하고 같은 반의 아이와 경쟁을 하고 있는 우물안 개구리일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상당히 다른 시야와 안목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이걸 가르켜 가치관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기도 하는데 대개 그 말보다 더 복잡하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경험의 총체다. 암투병해본 사람과 안해본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계를 가지는 문제랄까.
이 경험의 총체는 설명하기 어렵다. 완벽한 설명은 분명히 불가능하며 아주 긴 설명과 좋은 이해력이 있어도 약간 이해가 될까 말까다. 그러니 남의 말을 대충 듣거나 쉽사리 자기의 의견을 지나치게 믿어서 서울 안다녀온 사람이 서울 다녀온 사람에게 서울이 이러니 저러니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대화가 참 어렵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참 많다. 난 물리학 박사인데 스스로를 수학을 포기한 사람 즉 수포자라고 소개하면서도 과학이란 이런거다 저런거다 한 두줄로 가르쳐 줄려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토론이란 마치 나는 야구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축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은 게임이 되기 쉽다. 어찌보면 쉽고 단순한 질문도 남과 이야기해서 합의에 이르기가 참으로 어렵다. 둘이서 해도 그런데 셋이되고 다섯이 되면 합의가 되는 게 없다싶을 정도다. 그저 모두가 쓴웃음을 지으며 흘러가는대로 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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