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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옳고 그른 것이 전부가 아니다.

by 격암(강국진) 2021. 6. 28.

21.6.28

우리는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신경을 쓰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큰 착각이며 특히 요즘 시대 정신을 모르는 착각이라서 우리를 비합리적으로 만드는 이유가 된다.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문장을 명제라고 하는데 개인주의적 시각이랄까, 고립계적 시각이랄까라고 할 수 있는 이 관점은 다음처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정보는 모두 명제다. 

 

우리는 이 관점에 이미 중독되어 이걸 그럴듯하게 말하기란 쉬운 일이다. 옳고 그른 걸 말할 수 없는 문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옳고 그른게 없으니 아무래도 좋은거 아닌가? 그런 걸 주관적 주장이라고 하지 않는 가? 우리는 객관적 사실에 주목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옳은 명제인 팩트에 집중하자는 말을 계속 듣지 않는가? 나는 여기서는 이런 관점을 개인주의적 시각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회사에 가야 할까 저 회사에 가야할까? 이런 정책을 써야 할까 저런 정책을 써야 할까? 이 남자와 결혼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개인주의적 시각에 중독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만나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혹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명제로 본다. 즉 옳은 선택이 있고 틀린 선택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가능한 답과 선택들을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비합리적인 이유 그리고 이걸 내가 개인주의적 시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개인주의적 시각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이고 유일한 문맥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과학이다. 이 세상에 옳은 과학은 하나밖에 없으며 과학자들의 말은 대개 명제다. 즉 옳은 주장이 있고 틀린 주장이 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말도 나름의 빈틈과 논쟁거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명제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은 문맥에 따라 참도 되고 거짓도 되지는 않는다. 객관적으로 참거짓을 논할 수 있는 문장 즉 명제는 이렇게 하나의 고립계내지 절대계를 전제한다. 진공속에 홀로 존재하는 원자처럼 홀로 존재하는 이 문장이 무엇인지, 즉 참인지 거짓인지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관계적 시각이라고 부를 관점에 따르면 이것이 불가능하다. 여기 나사가 하나 있다고 하자. 이 나사는 한 때 자동차 엔진의 일부였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자동차의 일부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왜냐면 홀로 존재하는 나사는 뭐든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나사는 흉기로 쓰일 수도 있고, 벽에 액자를 고정시키는데 쓰일 수도 있으며 자전거의 일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나사가 무엇인지는 이 나사가 놓여질 문맥 혹은 관계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에 이 나사 하나를 고립시켜서 이게 뭔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이 나사를 가지고 뭘 하는가에 달려있다. 

 

이 차이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거대한 실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적절한 조정을 조금 가한다면 세상일을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다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마 독자중에는 내가 위에서 든 나사의 예가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고 느낀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나사를 둘러싼 문맥과 관계를 우리가 쉽고 빠르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정 문맥을 가져다 붙이면 우리는 나사에 대한 말을 명제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다.

 

이 나사가 엔진을 만드는데 쓰이면 이 나사는 자동차의 일부가 된다.

 

이제 우리는 확실하게 개인주의적 시각으로 돌아왔다. 물론 우리는 뭔가의 의미나 정체성이 그것이 가지는 관계나 그것이 놓여진 문맥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관계와 문맥을 빠르게 파악하고 지적함으로써 다시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있는 명제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인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일은 여전히 믿을 수 있는 방법이다.

 

개인주의적 시각이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과학은 개인주의적 시각의 대표적 예이며 나는 과학자출신이다. 내가 과학을 부정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적 시각은 점점 무능해지고 있다. 

 

이런 걸 생각해 보자. 한 친구가 자기 집에 가서 놀자고 말했다. 그에 대해 개인주의적 시각으로 문제를 보면 이렇게 된다. 

 

이 친구의 집에 가서 놀면 재미있을 것이다.

 

이 말은 옳은 말일까 틀린 말일까? 이 말은 옳은 말도 그른 말도 아니다. 설사 우리가 이 친구집에 갔더니 재미있었다거나 재미없었다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그렇다. 왜냐면 그 결과는 우리의 의지와 참여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친구의 집에 간다고 해도 무슨 일이 있을지 우리는 다 모른다. 미리 이 친구의 집에 가면 이러저러한 일을 할 거야라고 다 결정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불확실성속에서 우리는 또한 새로운 결정들을 할 것이다. 그 친구의 집에 갔더니 그 집은 귀신이 나올 것같은 지저분하고 어두컴컴한 곳이었지만 만약 우리가 그런 집의 특성을 생각해서 귀신놀이를 한다면 재미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모른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문맥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미리 이것이 이렇다 저렇다 판정할 수 없고 오직 확률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지만 그 확률 판정도 그렇게 믿을 수 있는것은 아니다. 우리는 뭐가 가능한지 미리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문장은 객관적 명제와는 달리 당신의 참여에 의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면을 생각해서 이런 문장을 봐야 한다. 그게 관계적 시각이다. 

 

현대 사회에서 관계적 시각이 점점 더 중요해 지는 이유는 세상이 빨리 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변하고 문맥이 변하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가능성이 자꾸 열린다. 이런 환경에서는 미리 선입견을 가지고 가능성을 차단하는대신에 순간순간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그것에 즉흥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이 중요해 진다. 그런데 우리가 개인주의적 시각에 중독되어 세상을 살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모든 말들을 전부 미리 해보기 전에, 나와 상관없이 옳고 그른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설사 그 답을 내가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공중화장실은 화장지를 제공해야 한다. 

 

이런 말은 옳을까 그를까? 누군가가 공중화장실에 화장지가 있으면 다 훔쳐가니까 돈 낭비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 사람에 따르면 이 문장은 그른 문장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공중화장실의 화장지를 훔쳐감으로써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다. 보라. 공중화장실에 화장지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훔쳐가지 않냐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인간은 혹은 한국인은 분명 이러저러하다는 생각을 너무 확신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관계적 시각으로 보면 참과 거짓이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제안이 된다. 즉 우리가 모두 화장실에서 화장지를 훔쳐가지 않는 규칙을 가진 게임을 하면 공중화장실을 더 편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문화적 게임에 참여하면 그 게임은 성립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 게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결과는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누군가가 페이스북같은 것을 만들자고 했다고 하자. 이걸 개인주의적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 된다.

 

페이스북 서비스를 만들면 성공할 것이다.

 

이 문장을 100% 참과 거짓이 있는 문장으로 보고 있는가? 이미 세계 최고의 부자회사중 하나가 페이스북이니까? 중요한 것은 참여고 놀이다. 우리가 페이스북 놀이가 페이스북 게임이 멋지고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참여하면 페이스북은 성공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이 부분을 망각하고 문장과 동떨어져서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개인주의적 시각에 중독되어 시대정신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는 문화적 제안으로 가득 차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맥,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가능성들이 폭발하는 시대에 과거의 시각에 매몰되어 이건 옳고 저건 그르고 하는 식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당신은 본질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 데이터가 답을 말해준다고? 10년전에 안됐다고 지금도 안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은 10년이면 엄청나게 변하는데? 어떤 일에 대한 증거가 넘치도록 쌓이면 그 분야는 이미 소위 레드오션이 된다. 그때 뛰어들면 이미 늦은 것이다. 

 

물리학을 전공하면 재미있고 보람찰 것이다.

이 여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부자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되면 한국은 더 번영할 것이다.

 

이런 말들은 명제가 아니다. 아무리 자료를 많이 모으고 섬세하게 생각을 한다고 해도 그 시작을 이미 이것이 참과 거짓이 있는 문장으로 바라보는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보는 순간 당신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물리학을 전공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물리학을 전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고 높은 지위를 얻는 일은 확실히 확률상 생물학이나 컴퓨터 공학이나 법학을 전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객관적이고, 나라는 주체를 문제의 본질에서 떼어내서 바라보는 관점은 나라는 중요한 본질을 빼먹고 있다. 나는 단순히 70억중의 하나가 아니다. 나는 나이며 나의 참여와 나의 선택이 미래를 바꿀 것이다. 인생을 두번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고, 그 길로 가고 싶다면 그 길로 가서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해지지도 못했고 돈을 벌지도 못했다고 해도 상관없다. 첫째로 다른 길로 갔으면 더 잘되었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은 지금정도 사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둘째로 그런게 꼭 가장 중요하고 행복을 주는 요소는 아니다. 나는 나의 생각, 나의 관점, 나의 문맥이 있다. 

 

일단 여러분이 관계적 시각이라는 것이 개인주의적 시각이란 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면 고개를 들어 세상을 보라. 그리고는 눈을 감고 본인의 일상도 생각해 보라. 아마도 여러분은 금방 여러분들이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처럼 처리하고, 동참을 요구하는 제안을 참과 거짓이 있는 문장처럼 이해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혼을 하기 전에 이 여성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답은 없다. 설사 그 여성과 죽을 때까지 살아도 그게 잘한 선택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인생은 두번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은 반복적 관찰과 실험으로 객관적 사실을 증명해 나가는 과학실험이 아니다. 당신이 누구인가를 판정하는 자아찾기도 그렇다. 그건 과학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은 명제인가? 이걸 명제라고 여기고 비판하고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런 문장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헛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위대하게 만들면 대한민국은 위대해 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게임에 동참하면 위대해 지는 것이다. 이걸 옳다 그르다라고 말할 수 있는게 아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이전에 믿음이다. 이거 재미있고 멋진데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개인주의적 시각을 중독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하면 경기를 일으키며 무슨 광신도 사교집단같은 것만 떠올리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가면 갈수록 개인주의적 시각보다 관계적 시각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증거가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테슬라같은 회사가 1등회사가 될 수 있을까? 증거가 있건 없건 대한민국의 문화가 한류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비트코인이나 공유경제가 성공할지 안할지 미리 예측할 수 있을까? 지방시대를 열어간다는 것은 명제인가 참여에 대한 호소인가? 

 

이 정도면 충분히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너무나 많은것들이 관계적 시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개인주의적 시각에 중독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람들이 학교에서 그렇게 교육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를 비합리적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두지만 나는 물리학 박사학위를 가진 과학자다. 이런 시각은 비과학적인 시각이 아니고 무슨 사이비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런데 과학공부도 그다지 하지 않은 사람들이 과학이니 논리니 하면서 개인주의적 시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그들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야 말로 과학이 아니라 유사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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