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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언어 그리고 철학

by 격암(강국진)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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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16

일찌기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하나 이상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 철학을 배우는데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기서 그가 말한 언어는 한국어나 프랑스어같은 일상어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수학도 하나의 언어로 여겨서 수학을 배우는 것이 철학을 배우는데 중요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언어가 우리 안에서 뭘 하는 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상어에는 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들이 조합되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 세계를 묘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수학에도 단어라는 게 있을까? 수학에도 정의라던가 공리같은 것이 있다. 선이나 점이라던가 임의의 두 선을 지나는 직선은 하나 뿐이다같은 기하학의 공리가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수학의 단어의 전부라면 수학은 매우 단순하고 제한된 언어일 것이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은 23개의 정의와 10개의 정리를 가질 뿐이다. 하지만 이런 공리들이 조합되어져서 나오는 정리들이나 수학공식들은 논리적으로는 독립적이지 않지만 하나의 독립적 단어처럼 쓰인다. 우리가 구구단을 외워서 계산을 할 때 그 구구단의 하나 하나는 단어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좀 더 길고 복잡한 계산들은 이런 공식들의 나열이 된다. 그 복잡한 공식들을 몇개인가 나열하면 우리는 더더욱 복잡한 공식을 증명해 낼 수 있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런 걸 알고는 있겠지만 이게 언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어도 이와 대단히 비슷한 데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과와 탁자는 그냥 독립된 단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수학의 체계 안에서는 공리가 몇개가 존재하는지가 분명하고 일상어나 물리학에서는 그게 불분명하지만 일상어 속의 단어들도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사과라는 단어를 말했다면 사실 그 말의 사회적이고 엄밀한 의미는 이 세상의 누구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과로 불리는 과일들이 서로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사과라는 말은 실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체로부터 추상화되어져 나온 어떤 관념이다. 그것이 어떤 관념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한데 예를 들어 사과와 배는 어떻게 다른지, 사과에도 여러 종자가 있는데 그 차이가 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시장에서 가서 사과를 한봉지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누군가가 사과대신에 귤을 줬는데도 그 세상에서는 사과와 귤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항의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언어생활이란 실질적으로 사회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정보창고를 가정하는 것이다. 마치 법에 대해서 자세히 몰라도 살 수 있고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에게 문의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쓰는 말들을 대충만 할뿐 아주 자세히는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긴 설명이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걸 우리가 믿는만큼만 우리의 언어는 객관적이다. 그런데 하나의 단어에 대한 설명은 무수한 다른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뤄지게 된다. 이 때문에 사과라는 말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존재하는 모든 단어들과 어떻게든 연결되기 마련이고 이런 의미에서 사과와 탁자는 독립적인 단어가 아닌 것이다. 마치 두 개의 수학정리가 두개의 수학 공리가 아니듯이 말이다.

 

수학 공식의 조합들을 통해 우리는 매우 복잡한 세계를 때로 매우 엄밀하고 빠르게 이해할 수가 있다. 원의 면적은 파이에 반지름의 제곱을 곱한 값을 가진다. 이걸 증명하는 것은 꽤 긴 계산이 필요하지만 일단 공식이 만들어 지고 나면 우리는 그 공식을 외워서 써먹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증명을 못하는 사람도 반지름이 두 배 큰 피자를 4등분하면 그 각각이 원래의 피자와 같은 면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뉴튼의 물리학을 배우고 그 공식을 외웠다면 쏘아진 포탄은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알고 흔들리는 추의 주기는 실의 길이의 제곱근에 비례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렇게 증명을 못해도 공식은 쓸 수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실은 우리의 일상어 생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나 국가나 세금이나 결혼이나 학교라는 말을 쓸 때 사실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꽤 긴 강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고작해야 한두마디 할 수 있는 것이 다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말들을 써서 민주국가안에서 세금을 내고 결혼도 하고 학교도 다니면서 산다. 우리는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질서와 법칙과 개념을 암기한다. 그렇게 추상적인 법칙을 쓸 수 있기에 인간은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속에서도 군대도 가고 취직도 하고 투표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현대인을 사이보그 1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단순히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난 이후에 교육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 제조과정의 핵심은 언어의 주입이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의 언어 환경이 급격히 변한다면 우리는 사이보그 2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언뜻 들으면 추상적이고 말싸움같지만 세상에서 법리 논쟁이 벌어지거나 국가의 기본 가치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중요해진다. 어디선가 멀리서 내가 모르는 군인이 내가 모르는 시민을 쏴죽였다고 해보자. 사실 내 가족이 죽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충격을 받아야 할까? 그것은 우리의 정신과 언어의 기초에 있는 관념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당신은 돈을 받기로 하고 일을 하는데 그 돈이 휴지일지도 모른다는 식이다. 모든 것이 사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인간이고 시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는 개일지도 모른다. 같은 이유로 해서 그것이 우리 나라의 일이 아니고 바다건너의 일일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덜 충격받는다. 완전한 분리는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그건 우리의 시스템이 아니고 우리의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을 동정할 뿐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수학의 체계가 있다. 도형이 나오는 기하학과 산수를 포함하는 대수학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른 공리들이 만드는 수학은 완전히 다른 언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수학 체계는 수없이 많다. 다만 그 수학체계들이 모두 우리에게 유용한 것은 아니다. 당신의 여행기는 이론적으로는 한국어가 아니라 기하학으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체험을 고차원 공간의 도형으로 여겨서 당신의 여행에 대한 정보를 그 도형안에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표현방식이 인간에게 편리할까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컴퓨터는 압축파일로 그림이나 동영상을 저장한다. 그럴 때 컴퓨터 끼리는 소통하기가 더 편리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그런 압축파일은 읽을 수 없는 언어다. 

 

이렇게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언어가 있다. 실질적으로 이 세계는 하나 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어떤 종류의 언어로 그 세계를 이해하고 본다. 다른 언어로 본 같은 세상은 어느 정도 다를 수 밖에 없기에 정신적으로 말하면 세계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사적인 언어다. 나는 무엇을 써서 세상을 보는가? 프랑스어? 영어? 한국어? 물론 일상어만 해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사실 우리가 모두 한국어를 쓰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언어는 실질적으로는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사회적으로는 우리의 말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하나의 뜻을 가지고 번역될 것이다. 우리가 한국어로 쓰여진 계약서에 사인을 했는데 나중에 나는 그게 그 뜻인줄 몰랐다고 주장해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이상일 뿐 사실 우리의 언어는 아무래도 우리가 알고 이해한 것으로 제약된다. 즉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는 것은 사적인 언어다. 다만 그 사적인 언어는 우리의 사회생활을 통해 끝없이 영양을 주입받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결혼을 할 때 그 결혼은 그 결혼을 하는 두 사람에게 많건 적건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 차이를 서로에게 이해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기본적으로 서로의 체험과 이해가 같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과 수학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플라톤은 수학을 공부하지 않은 자는 그의 학교에 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수학과 언어를 생각할 때 그것들이 가지는 내부적인 일관성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동떨어지고 부실한 체험과 삶의 방식은 어떤 세상이든 세상을 보는 눈이 되기에 부족하고 그렇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그 영향력이 사라진다.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멋진 엔진이나 타이어보다 움직이는 손수레가 훨씬 더 쓸모있는 경우는 많다. 오직 하나의 언어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한 공부만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바꾸고 다른 것을 흡수한다. 

 

철학이란 곧 언어다. 언어안에 세상을 보는 관점이 들어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장대한 철학적 시스템의 조각만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는 강압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판단을 이해하지 못해도 복종을 강요받는 경우가 그렇다. 어떤 때는 자기를 확장하고 초극해 보려는 욕심에 그렇게 된다. 하지만 모든 비약이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만약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할만한 글을 하나도 쓸 수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며 우리의 철학은 위태로운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팩트가 중요하다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부질없는 연결되지 못하는 퀴즈문제의 답같은 것을 부지런히 외우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의견 따위는 하나도 만들수가 없다. 물론 지식도 유용하다. 하지만 내적인 통일성을 생각한다면 소박해도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야 말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우주 끝까지 퍼져 있는 자잘한 팩트들을 외우는 것으로는 당장 하루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은 이 자기 일관성의 중요성을 가장 잘 가르쳐주는 언어다. 단 하나의 모순된 말이 모든 시스템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잘 보여지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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