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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세상은 바뀌었을까 아닐까?

by 격암(강국진) 2022. 2. 20.

2022.2.20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바뀌어 온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극단적인 두 개의 말이 오고가는 것같다. 하나는 방금 말한 것처럼 한국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그건 겉보기만 그럴뿐 본질적으로 세상은 바뀐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세상은 바뀌었을까 아닐까? 세상은 정말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을까? 여기에는 뻔한 답이 있는 것같다. 반박할 수 없고 논리적이며 자기 방어적이기도 한 주장은 그냥 세상에는 바뀐 것도 있고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뻔한 답은 왠지 뒷맛이 쓰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기 위해 조금 이야기를 돌려 비슷한 질문을 던져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누구나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소년 소녀였던 때가 있다. 그런데 이제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바뀌었을까 아닐까? 물론 우리는 바뀌었다. 어떤 것은 아주 크게 변해서 키도 커지고 몸무게도 늘었다. 이제는 자가용도 몰고 다니고 훨씬 더 고급의 옷을 입고 다닐 수도 있으며 배우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우리가 바뀌었다는 것만은 아주 분명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겉모습일 뿐이고 우리 안에 있는 본질은 거의 혹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뀌지 않은 부분이야 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의 답은 다시 분열된다. 우리는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답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바뀐게 없다는 주장이다. 사실 우리는 흔히 영혼같은 것이 인간의 육체안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질적인 부분이 설사 변하다고 해도 우리 안의 영혼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온 세상에 널리 퍼져있다. 

 

이 예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혹은 우리를 변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은 일종의 본질주의적 사고 방식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고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개는 개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왕족의 피는 성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고 살인자의 자식은 더러운 피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나는 나이고 한국은 한국일 뿐인 것이다. 아무리 거대한 변화가 표면적으로 있어도 나는 나이고 한국인은 한국인일 뿐이다. 세상이 변한다는 생각은 그래서 착각이다. 이런 믿음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사회적 관습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믿도록 교육받았다고 까지 할 수 있다. 만약 본질같은 것이 없다면 어제의 내가 저지른 죄를 왜 오늘의 내가 책임져야 할까? 왜 우리는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가? 작년에 내 부모님이었던 사람은 왜 올해도 내 부모님인가? 왜 우리는 국적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왜 지금의 한국은 과거의 한국의 역사를 승계하는가?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세상에는 어떤 시공을 초월하는 본질이라는 게 있을까?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고 한들 그걸 우리가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까? 나는 나라고 할 때 우리가 확신하는 우리의 본질이 정말 존재하는지 존재한다고 해도 그걸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이걸 믿는다. 믿기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가끔 실수는 할지 몰라도 누군가의 본질을 명확하고 빠르게 알아챌 수 있다고 까지 믿는다.

 

이름의 연속성에 대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들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죽지만 생명은 분명히 자기를 지키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속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유전자 정보를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인체의 내부를 유지시키는 항상성을 가진 것이 생명이다. 또하나는 설사 무생명이라고 해도 존재하는 것들에는 흔히 큰 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산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부서져 모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매우 빨리 시간을 돌린다면 산도 바다위의 이름없는 파도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흔들리고 섞이는 파도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서서히 풍화되어가는 산에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언제나 같은 산인 것처럼 부른다. 인간의 수명을 단위로한 시간에서는 존재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 존재의 관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분명히 어제의 나의 연장이지 나는 하루만에 거품처럼 사라지는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이쯤까지 생각하고 나면 본질이란 절대가 아니고 근사이고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나는 나이지만 내가 아니다. 한국은 한국이지만 한국이 아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본질을 제 아무리 생생히 느끼더라도 그것은 편의상 만든 관념일 뿐이지 진짜로, 엄밀하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조금은 덜 완고해 질 수 있고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본질을 믿으면 변화를 믿지 않게 되고 나아가 변화를 거부하게 된다. 그러다가 쌓여가는 변화가 누적되어 도저히 변화를 거부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극단적인 인식적 착오를 인정하는 일을 한다. 즉 오늘의 세상이나 오늘의 나는 본래 그런 존재였는데 다만 내가 그 본질을 잘못봤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누군가를 본질적인 실패자라면서 내내 무시하고 기회를 주지않다가 그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을 어느날 인정하게 되면 갑자기 이 사람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뭔가 달라보였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본질을 찾으려고 하면 모순을 누적시키고 쓸데없는 피해의식을 가지게 된다. 만약 내가 타고난 지배자라고 믿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악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산다고 믿게 되기 쉽다. 누군가가 타고난 바보라고 믿는다면 그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전부 운때문이라거나 어떤 부당한 도움때문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본질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악이니 선이니 운이니 도움이니 하는 환상을 만들게 하고 뻔히 보이는 사실을 부정하게 만든다. 변하는 세상이라는 진실을 덮고자 존재하지 않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제 그런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변했는가? 물론이다. 우리에게 운명은 없고 본질도 없다. 관성은 있다. 오랜동안 살면서 쌓아온 것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매일 다시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렇게 변해갈 것이다. 우리는 때로 큰 깨달음을 얻고 하루만에 행동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큰 깨달음은 나 자신의 본질이 고정되어 있다는 큰 어리석음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큰 깨달음은 오늘 하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실은 오랜동안 우리 안에 누적된 것이었는데 우리의 어르석음이 그걸 보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변했는가? 물론이다. 한국은 어제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는 오랜 동안 만들어졌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한국이 있기에 어떤 한국의 본질 혹은 특징이 지금의 한국의 번영을 만들어 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이 본래 위대한 국가일 운명이었다거나 한국이 본래 망할 나라였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한국은 매순간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걸었던 한걸음이 내일의 한국을 만든다. 위대한 희생이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우리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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