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이해하기

다시 보편성과 특수성

by 격암(강국진) 2022. 4. 2.

22.4.2

나는 이전에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오늘은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한다. 그것은 이해와 예측이라는 측면에서다. 우리는 먼저 학문적인 분야나 사회적인 토론은 보편의 차원에서 다뤄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뭔가를 이해하고 뭔가의 미래를 예측하려면 우선 우리는 그 이해와 예측의 대상이 되는 그 뭔가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래서 정체성이라는 측면에 대해 이전에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해와 예측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남았으며 나는 이런 측면에서의 보편과 특수의 혼동이 우리의 삶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말했듯이 우리는 이해와 예측을 위해 보편성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런 걸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특정한 힘으로 돌을 던졌다. 돌은 얼마나 멀리갈까? 그런데 문제에 돌의 무게가 나와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답은 돌의 무게에 달린 것인데 그 무게가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의 무게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의미가 있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젠 돌이 날아가는 거리는 오로지 그 돌의 무게에 달린 거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돌의 색깔이 문제에 나와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는 돌의 색깔이 없으므로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고는 항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해와 예측을 위해 보편성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우리는 유한한 특징들로 이해와 예측의 대상이 되는 것을 정의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할 수 있고 그 대상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 대상의 이해와 그 미래 예측은 시작도 하기 전에 불가능한 것으로 판별될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 보편적 특성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이해와 예측의 대표적 사례는 바로 물리학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물리학은 이제까지 어떤 소수의 특징들로 이뤄진 단순한 시스템들이 분석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왔고 그 시스템이 우리가 실생활에서 만나는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왔다. 모두는 아니다. 그래서 역사나 사회 그리고 유기체처럼 복잡한 대상의 미래를 물리학적으로 풀어내고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크다. 그러나 그 분석이 가능한 대상만 해도 상당히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기에 우리는 이 물리학을 학문의 모범으로 삼고 어느새 합리적 사고의 모범으로까지 삼고 있다.

 

물리학이 이뤄낸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이체문제와 진동문제다. 두 개의 질점이 중력법칙하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수학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뉴턴은 이걸로 지구와 달, 지구와 태양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었다. 뉴턴은 지구나 달이 질점이 아니고 거대한 구체라는 것때문에 고민했지만 미적분을 통해 완벽한 구체와 구체사이의 중력 작용은 그 모든 질량이 한 점에 모여있는 경우와 같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론적인 큰 성과였다. 물론 여기서 지구에 바다가 있고 인간이 살고 있다는 특수성은 중요하지 않다. 원칙적으로 이체문제는 지구와 달사이의 관계나 태양과 목성사이의 관계를 똑같이 처리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또다른 예는 진동문제다. 물리학 대학과정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진동에 대한 2차미분방정식에 대한 해가 삼각함수와 지수함수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수학적 분석이 가능하다. 일단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세상의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이 진동이라는 측면에서 알 수 있다. 거대한 빌딩도 바람에 흔들거린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트램폴린이나 사랑하는 배우자의 볼살의 떨림이나 어느 정도 시계추의 움직임과 보편적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 움직임들도 수학적으로는 어떤 한계내에서 이 2차미분방정식에 의해 기술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중요한 예지만 제한적인 예다. 당연히 모든 물체는 둥근 구체가 아니고 진동도 너무 진폭이 커지면 소위 말하는 비선형 진동이 되어 정확한 수학적 분석이 불가능해진다. 물리학적 이해란 그 한계가 크다. 우리는 혼돈이론(chaos theory)같은 것을 통해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려고 버둥거릴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세상의 모든 문제가 고전 물리학자의 분석처럼 될거라고 가정하는데 중독되어 있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보편적인 정보를 몇개 수집한 후 그것만으로 그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그 대상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너무 쉽게 단언해 버린다.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어도 우리는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그런 무리한 예측과 이해를 정당화한다. 주식 시장에는 이런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그래서 미국에서 주식이 오르면 한국도 오른다던가, 금요일에는 언제나 주식이 하락한다던가 재벌 3세가 사는 주식은 오르게 되어있다는 식의 법칙을 쉽게 발견하고 그걸 믿는다.

 

안되는 줄은 알지만 이해를 해보려고 하고, 예측을 해보려고 하는게 뭐가 나쁘냐는 반박은 옳다. 다만 우리의 무지를 진짜로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점쟁이의 예측이 잘 안맞는다는 것은 알지만 점쟁이에게 궁합을 물어보고 그 궁합이 나쁘다고 하면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는 행위는 옳은 것일까? 점쟁이의 의견도 의견중의 하나고 그 의견도 귀기울이는 것이 옳을까? 돌이 얼마나 날아가는가를 예측해야 하는데 무게를 모른다면 아무도 그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굳이 점쟁이의 의견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일찌기 말하지 않았던가 가장 현명한 자는 자신의 무지를 아는 자다.

 

우리는 이 함정에 너무 쉽게 빠진다. 여기 한 노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베트남 여자고 한국에 살고 있다. 이 일반론적인 정보만 가지고도 당신은 이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고 그녀의 미래가 예측된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고작해야 베트남이니 여자니 하는 일반론적인 몇몇 특성밖에 모르는데 말이다. 한국 남자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포르쉐를 타는 사람이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마술사나 사기꾼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잘 속는다. 그들은 자기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소를 탄 화이트와인같은 것을 와인 감별전문가에게 마시게 하면 그들은 그걸 레드와인이라고 믿고 엉터리 감별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인보다 더 잘 속는다. 왜냐면 색소를 탄 화이트 와인을 마시게 될 일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은 그런 걸 이용한다. BMW를 탄 사기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여자는 BMW 키만 보고도 속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걸 선입견이라는 말의 차원에서만 생각해 보고 넘길 일이 아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가지 책들을 보라. 다시 말하지만 예측과 이해는 기본적으로 이미 '어떤 보편성의 차원에서 예측과 이해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을 전제한다. 그 책들은 답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질문이 잘못되어져 있는가 아닌가는 별로 논의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성역처럼 여겨지지만 무슨 말을 가져다 붙이든 여성이라는 보편적 차원에서 행하는 이해와 예측이 의미가 있다는 전제를 붙이고 있다. 오해하지 말라. 나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사회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그것이 어느 정도나 가능할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떤가? 인권이나 자유나 평등은 어떤가? 무슨 MZ세대니 주부니 블루컬러 노동자니 하는 말들은 어떤가.

 

우리는 여러가지 일반론적 관념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런데 그 세상이 이해불가능하면 우리는 다시 그게 이해가능해 보일 때까지 더 복잡한 개념들을 도입하고 어떤 개념들을 구부리고 잘라내어서 결국에는 어떤 설명같아보이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여성혐오가 있다던가 남성혐오가 있다던가 세대 죽이기가 있다던가 종북세력이 있다던가 친일파가 있다던가 하는 결론을 만든다. 세상이 갈기 갈기 찢어져서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다는 결론을 만든다. 특히 기자들은 이런 일을 날마다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

 

인생은 일반론적이고 보편론적으로 말하면 언제나 암울하다. 청년들은 대개 진학을 잘 못할 것이고 취업도 잘 못할 것이고 사랑은 깨질 것이다.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평생 가봐야 이렇다할 의미있는 업적도 세우지 못할 것이고 자살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배우자들은 서로를 속이는 불륜을 행하고 있을 것이고 아이들은 부모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폭행당하고 있을 것이며 당신의 이웃은 매정하고 무식하고 온갖 편견에 빠져 있어서 상대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공들여서 추구하고 있는 어떤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거의 확실히 실패할 것이다. 이게 일반론의 세계다.

 

그런데 인생의 앞을 보지 말고 뒤를 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뒤를 돌아보면 우리는 대개 이런 말을 한다. '정말 안될 것같았는데 운이 좋았다.' 뜻하지 않은 기회, 뜻하지 않은 성공, 뜻하지 않은 진로가 우리의 인생길을 열어왔다. 뜻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계와 특수성에 많이 관련되어져 있다. 유명한 배우인 차인표는 공부잘하는 형을 보면서 어릴 때는 열등감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학교내의 세상만 볼 때 형보다 공부를 못하는 자신은 영영 열등생이 될 것같았다. 그런데 성장해서 보니 세상에는 배우라는 영역도 있었고 자신은 그 세계에서 성공하여 형보다 더 성공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살게 되었다. 여기서 경계란 지금의 우리가 보는 세상의 테두리고 특수성이란 차인표가 미쳐 몰랐던 재능이다. 차인표는 그냥 10대 남자나 성적이 중상위권인 남학생이 아니었다. 십만명중의 하나, 백만명중의 하나인 특수성이 있었다. 그 특수성이 그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것은 미리 예측할 수 있고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뭘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가 보는 세상의 경계를 넘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때는 대단해 보이던 아이가 20대가 되면 아무 것도 아닌 경우는 세상에 많다. 우리가 보는 시야가 달라졌기 때문이고 그 초등학생 인기인은 그 세계가 좋아서 그때의 세계에 갇혀있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시야와 세계는 이제 앞으로는 변하지 않을까?

 

얄팍한 일반론적인 이해나 예측은 이런 걸 모두 무시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패러다임에 더 빠져들게 하고 그 결과 스스로를 망치게 한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트 안하고 9급공무원 공부하다가 실패해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비참한 인생을 살게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일반론이다. 그리고 철학자가 되지 못한 모든 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일반론에 중독되어져 있다. 그 일반론들은 저 사람보다 가난하니 내 인생은 실패라던가 부모님이 인정해 주니 내 인생은 성공이라던가 하는 일반론을 포함한다.

 

무게를 모르는 돌을 던지면 얼마나 날아갈까라는 질문은 답이 없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의 너무 많은 것들은 바로 이 '무게'같은 핵심적 특수성을 간과하고 있는 일반론적 관념, 보편론적 관념이다. 특수성과 보편성을 혼동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잊게 된다. 그런데 그게 어떤 때는 깨달음으로 느껴진다. 불확실하고 안개낀듯 보이지 않았던 세상일들이 환하게 보이는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뭔가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당신은 그 순간 당신의 무지를 잊게 되었을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