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1
일찌기 마셜 맥루한은 그의 책 미디어의 이해에서 미디어가 메세지라는 말과 미디어는 육체의 연장이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미디어란 사실상 우리가 쓰는 모든 도구들을 말하는데 문자라던가 자동차라던가 디카같은 것들이 모두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기술은 인간의 육체를 연장시키고 그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도 그것으로 인해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세상보는 방식이 다르듯 다른 미디어의 시대를 살고, 다른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른 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럼 우리는 요즘 어떤 미디어에 둘러 쌓여 있는가? 그 답이 무엇이든 그것들은 짧고 빠른 것이기 쉽다. 긴 기사를 읽기보다는 짧은 트위터의 글에 더 많이 반응하고, 긴 다큐를 시청하기 보다는 10분 15분단위의 강연에 집중하는 시대가 요즘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도 짧아지고 빨라진다. 요즘은 축약하는 말, 그러니까 야간자율학습을 야자로 줄이는 것과 같은 말도 많이 쓰이는데 이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보니 우리는 어떤 가정을 자연스레 수용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메세지는 짧게 표현되고 전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빠르게 질문을 제기할 수 있고 그걸 또 빠르게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의 요청을 잘 포용한 강연이 TED 강연이나 세바시강연 같은 것이다. 1시간이나 2시간 혹은 한학기에 걸쳐서 어떤 것을 배우기 보다는 우리는 10분이나 15분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강연, 인생을 바꿔줄 메세지를 주는 강연을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 메세지라는게 왜 애초에 길어야 할까? 문제의 핵심은 문맥에 있다. 어떤 메세지가 길어지고 복잡해지는 것은 그 메세지를 전달하는 문맥, 그 메세지에 쓰이는 단어의 의미따위를 그 메세지를 받는 사람이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그 문맥없이는 전혀 전달이 안되는 것 일수도 있다.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함께 지리산 정상 정복정도는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들과 함께 지리산을 고생해서 올라서 밤을 지새고 아름다운 일출을 보면서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말을 해야 그 메세지는 제대로 전달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때 메세지를 전달하는 과정은 산을 오르는 행위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게다가 많은 경우 사람들은 전달하고자하는 메세지를 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같은 메세지를 전달한다고 해도 그 표현은 받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밤새도록 한마디도 안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행위도 어떤 의미로 메세지를 주는 행위이다. 그런 행동은 의미를 가지게 되고 따라서 말을 한 사람이 오히려 뭔가를 받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짧은 메세지와 빠른 소통이라는 것은 거꾸로 어떻게 가능한가? 왜 이 시대는 짧고 빠른 소통의 시대가 되었는가? 과거보다 훨씬 강력해진 통신 기구들 덕분에 그런 소통도 의미가 있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서서 한줄의 문장을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행위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 것에 주목하지도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이해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트위터에 남기는 한줄의 글은 다르다. 그 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그 중에는 그 글을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그들은 그걸 또 퍼뜨려서 한줄의 메세지가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이것은 요식업의 현실과도 비슷한 것같다. 진짜 인도카레를 파는 집을 연다고 해보자. 인터넷도 네비도 없는 세상에서는 레스토랑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이 된다. 그리고 요리는 좀 덜 개성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더 대중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검색해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서라면 가게가 좀 후미진 곳에 있어도 되고 특징이 좀 강해도 된다. 왜냐면 굳이 찾아오는 손님들은 그런 걸 좋아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메세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불특정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떠드는 사람은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이야기할 필요가 있으므로 말은 길어지고 결론을 내는데 시간이 오래걸린다. 하지만 검색에 의해 내 메세지를 듣는 사람을 상대한다면 이야기는 상당히 처음부터 개성적이고 특별할 수 있다. 그걸 읽거나 보는 사람은 이미 준비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은 짧아지고 빨라진다. 오히려 그래야 인기가 더 좋다.
이러한 변화가 나쁜 것이라고만은 당연히 말할 수 없다. 애초에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런 도구들을 쓰지 않을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을 단기간에 모아줄 수 있는 것이 요즘 미디어의 힘이다. 그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세상의 많은 변화를 일으키지도 쫒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가 라디오스타를 죽였다는 노래의 제목처럼 어떤 특성을 가진 미디어가 그 시대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이 되면 그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 미디어는 매력이 없어진다. 사람들은 새로운 미디어에 중독되고 모든 경우에 그런 방식의 소통과 메세지 전달이 옳다고 느끼게 된다. 느리고 긴 메세지는 이제 답답하고 무능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예를 들어 두껍고 긴 책을 읽는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세상을 보는 문맥을 알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자신을 바꾸게도 된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 이런 독서다. 물론 두꺼운 것이 무조건 미덕은 아니다. 내용도 없이 말은 길어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해도 책이 나를 바꾸고 확장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책에 의해 우리가 세뇌가 되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독서는 작가와의 대화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말의 의미중에는 나를 지키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도 있다. 즉 그 내용을 그냥 수동적으로만 읽지 말고 자기를 지켜가면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 일은 그다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짧고 명확한 메세지에도 위험한 면이 있다. 어떻게 문맥이 없는 메세지 전달이 가능한가? 첫째로 그 메세지는 좋게 말하면 당신에게 맞춤형이고 나쁘게 말하면 당신에게 아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당신은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게 된다. 이건 마치 전자동으로 내 입에 먹을 것을 집어넣어주는 기계에 몸을 붙인 것과 같다. 당신은 먹는 행위에서 순수히 입안의 것을 삼킨다는 행위이외의 것을 다 없애버린다. 그것은 편하지만 동시에 음식을 가축에게 주는 사료따위로 만드는 행위와도 같다. 뭔가를 먹기위해 어딘가로 가고, 특정한 옷을 입고, 음식의 생김새를 감상하는 행위는 음식의 맛이라는 본질과 상관없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그 음식을 먹는 체험에 큰 영향을 준다. 그런 기계에 중독된 당신은 가축처럼 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짧고 빠른 메세지에만 중독된 사람은 자기의 세계속에 갇혀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정신적 비만환자가 되기 쉽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점점 단순해져 가는 자기를 살찌우는 것이다.
둘째로 짧고 빠른 메세지가 경쟁력을 가지는 또 다른 분야는 과학처럼 보편성을 가진 일이다. 이런 형식은 특별한 것, 일회적인 것,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것에 관련된 것을 표현하는데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팩트만 많이 알면 뭐가 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 요즘 시대다. 그런데 연애에 대한 통계를 줄줄이 외우는 것과 연애를 하는 것이 다르고, 과학퀴즈 대회에서 1등을 하는 것과 과학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후자의 중요성은 창의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과학자는 아직 아무도 도달한 적이 없는 세계에 도달하려고 연구를 하는 것이다. 과학자는 논문을 쓰는 일을 하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논문은 다 세계최초다. 그게 아니면 그건 표절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 과학자는 주어진 과제를 오랜동안 깊게 보는 일을 한다. 아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애초에 특정한 주제 그러니까 지렁이의 소화기관따위를 전공하게 되기 위해서는 과학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가지게 된다. 즉 진짜 전문가가 가진 것은 문맥이 거의 다다. 진짜 과학자는 딱딱한 로보트가 아니라 예술가이고 철학자다. 그 무모함은 열정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과학퀴즈왕은 이런 문맥을 전혀 가지지 않고 한줄로 질문되고 한줄로 답하는 일에만 익숙하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익숙하면 할 수록 그나 그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오히려 감퇴되게 된다. 누구도 만들지 못한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과 공장에서 틀로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사람의 차이다. 사람들은 팩트, 팩트를 외치지만 문맥없는 팩트는 공해다. 이론과 이해는 팩트에서 그냥 나오는게 아니다.
이건 퀴즈왕의 문제만이 아니다. 시대가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문장들을 끌어와서 말하는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드는 기술만 늘어간다. 서로 다른 문맥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가져다 붙인다. 요즘 미디어에서 인기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예능쇼같은 곳에서 수십명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재치있는 한마디말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지식인이고 뭔가를 아는 사람이다. 트위터의 라이브 쇼랄까. 다들 서로 서로에게 한줄짜리 메세지를 마구 날린다.
그건 분명 재능이다. 거듭 말하지만 새 시대의 미디어가 장점이 없는 것도 분명 아니다. 다만 그게 전부라고 느끼고, 그걸로만 사람을 평가하고 메세지를 평가하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진짜 전문가가 요즘의 토론회나 예능에서 당황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초등학교 교실에 갔는데 나에게 질문에 날라온다. 양자역학이 뭔가요? 나는 이것을 한문장으로 답해야 한다. 이런 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보면 역시 질문자는 초등학생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심지어 거기서 멈추지도 않는다. 그 초등학생은 양자역학에 대해서 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오히려 자기가 이겼다고 의기양양해 한다. 역시 모르는 군요라고 말하는데 한문장으로 양자역학 말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그 대답을 모른다고 나는 초등학생과 같은 수준이 되거나 오히려 그 수준 미만이 되는 것이다. 다음번 질문은 이런 식이다. 학교앞 떡볶기집의 아줌마가 초록색 신발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시나요? 나는 모른다. 그런 팩트가 그렇게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 초등학생은 다시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다. 역시 모르는 군요. 이런 것도 모르면서 우리학교에서 말할 자격이 되시나요?
요즘의 인기인이 만들어 지는 방식은 종종 이렇다. 하지만 과학퀴즈왕에게 연구실을 마련해주고 그래 한번 너도 과학연구를 해보라고 하면 그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인기 정치인이나 예능인이나 지식인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은 적어도 언제나 합리적이지는 않다.
나는 이런 시대에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나게 될런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나 역시 아이들을 키운 부모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머릿속을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던 것을 생각해 보고 그게 유치원생때부터 반복된다고 생각해 보라. 이건 무시무시할 정도다. 짧고 빠른 미디어는 사람들의 성장을 막고 자기 자신의 세계에 갇히게 만든다.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반복해서 보고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치있게 말로 자기를 방어하는 기술만 크게 키워준다. 그러면서 자기가 뭔가를 안다는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짧고 빠른 메세지는 귀로 들어와서 그들의 입으로 나가는데 그들의 뇌속 깊은 곳에는 도달하지도 않는 것같다. 그들은 자신이 쓰는 단어의 의미를 매우 매우 피상적으로 알면서도 자신이 그걸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미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는데도 자신만만하다. 이런 사람들은 만나면 어른이건 아이건 거대한 자기확신과 자기보호의 벽이 느껴진다. 그 벽은 종종 절망적일 정도로 튼튼하다.
내가 젊었을 때도 대학교수들이 추천하는 고전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책들이어서 읽기가 어려웠다. 이해가 안되도 한번 읽어는 두자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과연 요즘 시대에 그런 걸 하는 아이들이 있을까? 적어도 대부분은 반페이지 길이의 글도 읽으려고 하지 않을 것같다. 하물며 글쓰기를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런 건 다 인기없는 미디어다. 하지만 이래도 될까? 특히 이런 식으로 살아도 된다고 했을 때 미래 세대가 어떤 걸 결정하게 될까? 앞으로 더욱 더 기술은 발전할 텐데 그 미래세계에서 과연 민주주의라는게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아니 이런 미래는 이미 온 것일까?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미래는 찬란하면서도 위협적이다. 그건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정신과 관련한 문제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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